나를 나로 있게 하는 공간은 어디인가요?

prologue 2019년 11월호 나를 나로 있게 하는 공간은 어디인가요? 빛과소금

버스 도착 알림 서비스가 없던 시절 이야기다. 매섭게 추운 날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자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오른다. 기다리다 지쳐 그만 포기하고 택시를 탈까, 집으로 돌아갈까 고민하며 시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으니 멀리서 버스가 온다. 버스에 오른다. 빈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니 몸이 녹으면서 화도 녹는다. 이어서, 무턱대고 화내고, 맥없이 포기하고, 번번이 실수했던 순간들이 의식의 흐름대로 떠오른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앞선 시간들을 돌이키고 반성하며 다짐한다. 누가 쳐다보는지 신경 쓸 새도 없이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버스 창가 자리는 나의 화를 누그러뜨리는 공간이다. 
어린 시절 엄마는 자주 요와 이불을 바느질했다. 두툼한 솜이불을 방바닥에 깔고 한쪽엔 색동 천을 대고 다른 한쪽엔 아삭아삭 풀 먹인 홑청을 감싸 꿰매고 있으면 어김없이 그 위로 다이빙했다. 잠자리에 들기 위해 하얗고 바삭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면 발바닥이 간질간질해지고 재채기가 날 것 같은 기분에 빠졌다. 엄마는 잠자기 전 이불 속에서 늘 기도를 시키셨다. 어떤 날은 기도를 하다 잠이 들기도 하고 어떤 날은 기도를 하면 할수록 또렷해졌다. 그럴 때면 내 바로 옆에서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는 것만 같았다. 어린 시절 버릇 그대로 난 이불 속에만 들어가면 자동적으로 기도가 나온다. 이불 속은 나를 하나님 품속으로 다이빙시키는 공간이다.
또 어떤 공간들이 나의 삶을 채웠는지 생각해 본다. 살아오는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공간을 만났다. 그중에는 내 인생의 나침반을 바꾸어 놓은 곳도 있고,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아픔과 슬픔을 선사한 공간도 있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나를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게 하는 공간이 있고, 이제는 곁에 없는 사람들이 마치 바로 옆에 있는 듯 느끼게 하는 공간도 있다. 성숙과 성취의 공간이든, 치욕과 상처의 공간이든 그 모든 곳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하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여러분의 삶에는 어떤 공간들이 함께했나요? 그곳을 떠올리며 빛과소금 11월호를 함께 기꺼워해 주신다면 좋겠어요.

 


글 서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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