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은 명답을 주고, 성경은 정답을 알려줍니다

people 2018년 09월호 인문학은 명답을 주고, 성경은 정답을 알려줍니다 한재욱

아빠, 엄마가 그림책을 읽어줍니다. 글을 배우고 나면 동화책을 읽습니다. 학교에 가면서 일기를 씁니다. 국어 시간에 시를 짓습니다. 자라면서 역사를 배우고, 생각하는 법을 터득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인문학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인문학은 이미 어린 시절에 시작됐습니다. 인생은 인문학의 강을 흘러가며 성장합니다. 마음속에 잠겨 있던 인문학이, 책 속에 머물던 인문학이 언제부턴가 거리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거리의 인문학은 이미 처음부터 우리 삶을 장악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복음을 듣습니다. 성경을 읽습니다. 묵상을 합니다. 전도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신앙인의 인문학입니다. 인문학은 인본주의의 표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문학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생각에 사로잡혀,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든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인문학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은 인문학의 언어로 말씀하셨고, 성경은 인문학의 원형이라고 말하는 목회자가 있습니다. 「인문학을 하나님께」의 저자, 한재욱 목사를 강남비전교회에서 지금 만납니다.

취재 김재원 정리 이승연 사진 정화영

 

 


목사님 인생에서 책은 어떤 의미인가요?
하나님이 주신 사명입니다. 제 인생이기도 하고요. 하나님이 주신 것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 성경과 독서가 제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죠. 이 둘을 잘 어우러지게 하는 것이 제가 한국교회 앞에 드려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께 글을 쓴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글을 쓴다는 건 ‘육화’된다는 거죠. 책이나 생각에 대한 육화, 글을 통해 내 몸을 완전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또 공감의 과정인데요.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감하지 않으면 나만의 영역에 머물게 됩니다. 글을 쓴다는 건 공유할 수 있는 공감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감을 전제로 한 글쓰기를 통해서 나눔을 실천한다는 거군요?
그렇죠. 은혜를 나누는 겁니다. 기쁨을 나누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고독을 덜기도 하고, 그렇게 함으로 같이 살아가는 거죠. 이것이 제가 받은 사명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 「인문학을 하나님께」는 어떤 마음으로 쓰셨나요?
최근 인문학이 유행한다고 해서 이 책을 쓴 건 아닙니다. 저는 경제통계를 전공했지만 인문학을 좋아했죠. 사실 문학 전공으로 들어갔다가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아버지의 권유로 이른바 돈 버는 과로 바꿨습니다. 저는 시인이 되고 싶었고, 문학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학 시절부터 문학과 철학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관점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인문학 열풍이 일기 전부터 이미 해 왔던 작업이었죠. 그래서 인문학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선포하고 싶었습니다. 아울러 이 책이 전도를 위한 접촉점이 되길 원합니다. 「넛지 전도」를 쓴 레너드 스윗이나 애즈버리 신학교 교수 조지 헌터는 전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넛지’라고 합니다. 복음을 결정적으로 전하기 위해서는 넛지라고 하는 접촉점이 적어도 15번에서 20번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죠. 이런 관점에서 인문학은 훌륭한 접촉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이 전도용으로 쓰이면 좋겠습니다.

책, 인생에 스며들다

목사님의 어린 시절, 청소년기는 어땠나요?
평범했습니다. 다만 그때부터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했습니다. 특히 엉뚱한 글쓰기를 좋아해서 전형성에서 벗어난 일기를 썼습니다. 처음에는 친구들이 놀리기도 했는데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이 제 일기를 보고 친구들에게 일기는 이렇게 써야 된다, 글은 이렇게 쓰는 거다, 칭찬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자신감이 생겼죠.

이미 그때부터 낯설게 하기, 차별화된 글쓰기를 시작하셨군요?
낯설게 하기, 다르게 보기를 일찍 시작한 거죠. 일기도 문체를 달리하고. 빤한 전형에서 벗어나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써보고, 글쓰기도 이렇게 저렇게 다양하게 시도하다 보니 무척 즐거웠습니다.

이런 일을 스스로 하셨으니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셨겠네요.
그렇죠. 하지만 꼭 즐겁지만은 않았습니다. 이어령 교수님께서 어린 시절부터 고독을 느끼셨다는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저도 왠지 모르지만 어릴 때부터 책을 읽으면서 고독을 느꼈습니다. 명확하진 않지만 어릴 때부터 어떤 진리, 영원한 것에 대한 깊은 묵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저도 왜 이럴까 싶었죠. 예를 들어 소풍을 갑니다. 소풍 가는 날 그렇게 설레고 좋습니다. 그런데 설렘과 동시에 싫기도 합니다. 소풍이 끝나고, 해가 뉘엿뉘엿 질 때, 집으로 돌아오는 그 시간이 정말 공허해지기 때문이죠. 어린 시절에도 그런 감정이 소풍을 가기도 전에 생각나는 겁니다. 어쨌든 저는 책 읽기를 통해 기쁨과 고독을 함께 느끼는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신앙은 언제쯤 받아들이셨나요?
어린 시절부터 교회는 다녔습니다만 인격적인 만남은 극적이었습니다. 중2 말 무렵, 정동 교회에서 외국인 선교사들이 전도 집회를 했습니다. 그때 외국인들이 춤추면서 찬양하는 모습이 신기하게 보였습니다. 그들 중 한 분이 유독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인상이 워낙 강해서 무섭게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집회 중에 그들이 회중석으로 내려오는데, 그분이 제게로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분이 내게 오셨고, 영어로 몇 문장을 말했습니다. 그 당시 제 성적이 꼴찌에 가까웠는데 영어를 어떻게 알아듣겠습니까? 무조건 ‘오케이’, ‘땡큐’ 그랬죠. 나중에 옆에 계시던 선생님이 통역을 해주셨는데,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시고 너를 향한 특별한 계획이 있다, 너를 부르셨다,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충격을 받았어요. 그 후 목사님 설교가 이어졌는데, 하나님을 떠나서 내 마음대로 내가 주인 되어 사는 것이 죄라는 말씀과 십자가 복음이 마음을 내리쳤습니다. 예수님 영접하고 하나님 자녀 되어서 하나님 비전 가운데 살라는 말씀에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느껴서 손들고 영접했습니다. 저는 그때 이미 내가 목사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때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삶이 바뀌셨군요?
영접한 그날 밤에 하나님 아버지만 밤새도록 불렀습니다.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체험이었습니다. 제가 중2 말에 58명 중 56등을 했는데요. 영접하고 중3 올라가 처음 본 시험에서 9등을 했습니다. 그때는 기초가 없어서 방학 동안 영어, 수학책을 다 외웠었죠. 내가 하나님의 자녀고, 목사가 될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진짜 공부를 시작했죠. 그 이후로 9등, 7등, 급기야 1등까지 했습니다. 예수 믿고 삶이 변한 사람이 바로 접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기독학생회 활동을 했는데, 당시 제가 다닌 대학 기독학생회에 옥한흠 목사님을 비롯해 지금 목회를 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목회자가 내 길이란 것을 받아들여서 신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죠.

지금도 교회 목회를 하시면서, 이메일로 ‘경건 편지’를 보내고 여러 미디어 사역을 하고 계시다고요?
왜 이렇게 인도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대학 때 문학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글 쓰는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습니다. 방송국 자료조사, 작가, FD도 했죠. 이미 그즈음부터 인문학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글로 쓰고 있었습니다. 훗날 전자우편이 생기면서 지인들에게 제가 쓴 글을 메일로 보내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방송국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지금은 2만2천 명에게 메일로 경건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평소에 하던 작업이 사역이 됐죠.

모든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군요. 지금 하시는 미디어 사역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나요?
극동방송에서 〈인문학을 하나님께〉라는 프로그램을 4년째 진행하고 있고, 국민일보 에서 ‘겨자씨 칼럼’을 3년째 쓰고 있습니다. CTS에서는 제가 보내는 경건 이메일을 받아서  〈새벽 종소리〉라는 새벽 묵상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습니다.

원고 압박이 상당하겠어요.
늘 해 왔던 일이라 부담스럽지는 않습니다. 은혜로 감당하고 있죠. 아마도 지금 새로 시작하라고 하면 못할 겁니다.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의도한 적도 없습니다.

 

 


인문학, 정체를 드러내다

인문학 얘기를 해보죠. 인문학이란 ‘무엇’일까요?
인문학의 정의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저는 이어령 교수님의 정의를 좋아합니다. 내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본질에 대한 궁금증에 답변하는 것이 인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은 ‘왜’ 중요한가요?
인문학은 본질을 보는 겁니다. 인간은 본질에 대한 궁금증이 항상 있습니다. 그게 인문학을 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죠. 또 스티브 잡스나 마크 주커버그에 의해서 인문학이 거리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인문학을 하면 창의력을 길러 줍니다. 인문학은 밥도 먹여 주고, 사람들의 마음을 공감하게 합니다. 인문학은 매력이 참 많죠.

우리는 인문학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요?
그리스도인도 인문학을 가까이 두고 기쁘게 보면 좋습니다. 성경은 문학의 옷을 입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간의 언어를 입은 하나님의 말씀이죠. 문학의 주인도 하나님입니다. 역사의 주체도 하나님이시고, 철학의 주인도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전제로 인문학을 가까이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우문이 될 수 있습니다만 인문학은 ‘어디’에 존재하는 걸까요?
지금 인문학의 열풍이 부는 것은 대학 강단에 있던 문사철(文史哲)을 스티브 잡스와 마크 주커버그가 거리로 가지고 나왔기 때문인데요. 문학, 영화, 음악 같은 대중문화에도 인문학은 스며들어 있습니다. 드라마 제목도, 광고 스토리텔링도, 다 인문학입니다. 인문학은 사실 학문에 머물러 있는 것도, 마음속에 있는 것도 아니라 우리 안방까지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인문학이라고 말을 못 할 뿐이지, 실은 인문학 속에 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럼 인문학은 ‘언제’부터 존재하는 걸까요?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실은 태초부터 인문학이 있었다고 봅니다. 철학이 생긴 이후는 물론이고, 심지어 동굴에 그린 그림조차도 인문학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생긴 본질에 대한 궁금증이 점차 우리의 실생활로 들어오게 된 거죠. 우리가 굳이 인문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지 사실, 인문학적 사고는 이 세계를 지배하는 포대기와 같습니다.

인문학은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한 걸까요?
인문학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전제가 중요합니다. 철학이 묻고 있는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답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 ‘인문학을 하나님께’입니다. 인문학의 주인은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마귀가 인문학을 인간이 가져가게 해서 마치 인문학이 인본주의의 표상인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문학, 사학, 철학, 예술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신앙, 인문학과 동행하다

지금 사람들이 인문학을 경계하는 이유가 인본주의의 핵심이라는 선입견 때문이잖아요?
그래서 인문학을 공부하면 신앙이 떨어진다고 하는 사람도 있죠. 물론 아닙니다.  ‘인문학을 하나님께’라는 말은 이런 겁니다. 만물의 본질은 창세기 1장 1절에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거죠. 하지만 인본주의적 인문학자는 그걸 인정하지 않고, 본질을 찾기 위해 철학 하기를 계속 시도합니다. 하지만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문학은 본질을 찾지 못하는 땅의 신음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철학, 역사, 문학을 가지려고 합니다. 본질을 찾으려는 거죠. 하지만 이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는 인문학은 본질을 찾을 수 없습니다.

성경과 인문학을 비교하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인문학은 명답, 성경은 정답. 이게 저의 결론입니다. 인문학은 내가 누구이고,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답은 제공 못 합니다. 그저 공감만 하는 명답을 주죠. 그런데 성경은 옳은 답, 정답을 줍니다. 인문학은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죽음 이후는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인간은 이걸 생각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까지죠. 올바른 답을 주지는 못합니다. 명답처럼 보이는 것을 제시할 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죽음 후에도 영생한다고 이야기해 줍니다. 그리고 인문학은 우리의 죄에 대해서도 계속 문제만 제시할 뿐이지만, 성경은 답을 줍니다. 인문학이 명답 정도만 준다면, 성경은 정답을 줍니다. 이게 핵심이죠.

신앙인에게 인문학은 어떤 쓸모가 있을까요?
신학과 신앙과 인문학은 동행해야 한다고 봅니다. 신학은 하나님의 음성을 전도하는 것입니다. 모든 관계는 대신관계, 대인관계이지 않습니까? 십계명도 그렇고, 주기도문도 그렇죠. 하나님께 받은 것을 인간에게 전도해야 하는데, 전도의 대상들이 인간이란 말입니다. 땅이란 말이죠. 땅을 모르고 어떻게 전도를 하겠습니까? 땅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고, 본질을 못 찾은 사람들이 어떤 신음을 내뱉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전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땅을 알아야 전도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을 알아야 하는 이유죠. 이성복 시인은 ‘저공비행’을 말합니다. 너무 높이 떠서 그들만의 이야기를 해도 안 되고, 땅을 완전히 기는 모습도 안 됩니다. 적당히 떠 있는 높이, 저공비행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땅에서 신음하는 자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예부터 이레니우스, 어거스틴, 종교개혁자 루터, 칼빈, 멜랑히톤, 지금도 마틴 로이드 존스, 존 스토트, 아더 핑크, CS 루이스, 유진 피터슨, 이 사람들 전부 인문학의 대가였습니다. 공통점은 인문학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들이죠. 특히 예수님은 인문학적 언어 사용의 대가였습니다. 그 시절부터 인문학을 우리 것으로 가지고 온 겁니다. 성경에는 인문학적 요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인문학에서 인본주의적 요소를 배제하고, 인문학의 주인인 하나님께 드려서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설교에서도 인문학을 활용하면 공감을 줄 수 있죠.

「빛과 소금」 독자들에게 시 한 편 선물해 주시겠습니까?
김춘수의 〈꽃〉을 드립니다. 이름을 불러줄 때, 존재의 의미가 살아나지 않습니까? 전도라는 것은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어 있던 그에게 너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존재야. 너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어. 이름을 불러줄 때 그 존재는 살아납니다. 김춘수의 〈꽃〉 이야기를 하면서 이름을 불러줍니다. 아담이 이름을 짓는 자였잖아요. 그 사건도 인문학적 사고를 가지고 있으면 감동으로 다가오죠.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이 말에도 힘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한 권의 책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의 인생 책에서 다음 챕터는 어떻게 펼쳐질까요?
아무도 모르죠. 하지만 책과 글로 주님이 인도하시는 거 같습니다. 인문학이야말로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굉장히 좋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방송과 저술이 지금 달려가야 하는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빛과 소금」 독자들에게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질문 하나 해주세요.
지금 당신은 즐거우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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