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워 못 살겠네” 소리가 절로 나오는 8월의 어느 날, 아내로 엄마로 사회인으로, 더위도 잊은 채 바쁘게 지내고 있는 아나운서 이정민을 만났다. 최고로 더운 날이었지만, 우리의 임무는 9월호 인터뷰와 표지 촬영. 마치 가을이 온 것 같은 옷차림과 표정으로 취재에 임하는 그녀의 모습이 프로다웠다.
아나운서로서 10년을 넘게 걸어왔다. 아내로서 5년째에 접어들었고,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지는 3년째다.
그녀가 신앙인으로 살아온 지는 20여 년 세월이 흘렀다.
아름답고 지혜로우며, 여전히 소녀처럼 밝고 쾌활한 이정민이 엄마, 아내, 아나운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어떤 역할을 감당해 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이름표를 바꾸려는 이때, 그녀와의 이야기는 어둠이 내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취재 서진아 사진 정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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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라는 이름의 자애로운 역할자

딸 ‘온유’가 올 9월이면 만으로 딱 3살이 돼요.
어휘도 많이 늘었고, 한창 예쁜 짓을 많이 해요.
요즘에는 출근하는 제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나가지 말라고 할 때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마음이 아파요.
모든 워킹 맘들의 공통된 어려움이겠죠?
아이를 낳고 키우고,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참 많이 생각해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아이를 보며 가끔 물어요.
“온유야, 엄마 사랑해?”
그러면 온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네, 엄마 사랑해요”라고 말해 줘요.
근데 그게 그야말로 ‘해주는’ 것일 때가 많아요.
엄마가 물어보니까, 엄마가 그 대답을 원하는 것 같으니까, 엄마가 기뻐하는 것 같으니까, 또 대답 안하면 계속 물어보니까….
그냥 기계적(?)으로 “사랑해요”라고 말해 준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근데 엄마 눈엔 그게 다 보이잖아요.
물론 그 “사랑해요”가 건성이어도 듣기는 좋지만, 가끔 아이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엄마 사랑해! 엄마, 온유가 진짜진짜 사랑해”를 외치면 정말 너무 행복한 거예요.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해줄 수 있을 정도로요.
그런데 그 순간 뒤통수를 딱 맞은 것 같은 깨달음을 얻었어요.
내가 하나님께 그렇게 자발적으로 사랑한다고 외쳐본 적이 있는가!
내가 마치 어린 딸이 된 것처럼, 주님을 아주 가까이에서 인격적으로 대해 드리고 있었는가!
결국 그거구나 싶었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시니, 그분이 원하시는 건 결국 우리의 그런 모습이겠구나.
사랑한다고, 감사하다고, 마음을 다해 고백하기만 하면 되는구나.
속마음까지 다 읽고 계신 그분 앞에 잘 보일 필요도 없고, 그저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딸이 되기만 해도 되는구나.

근데 그 고백은 하나님을 온전히 내 주인으로 모실 때만 가능해요.
모두들 입으로만 하는 사랑 고백이 아닌, 진짜 마음에서 튀어나오는 “주님, 사랑해요!”를 마음껏 외쳤으면 좋겠어요.
자식을 키워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고, 아이를 낳아보니 나를 이 땅에 보내신 그분의 사랑과 뜻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아내’라는 이름의 지혜로운 역할자

어느새 결혼 5년차네요.
결혼 발표 당시 한 인터넷 신문에 “이정민, 교회 오빠와 결혼”이라는 기사가 났는데, 사실 교회 오빠는 아니었어요.
교회 오빠가 될 잠재력을 가진 사람이었죠.
결혼 상대자로 믿는 사람을 원했고, 소개해 주는 분께 물어보니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만났어요.
첫 만남에서 교회 나간 지 17년 되었다고 하기에, 다닌 지 17년인 줄 알았더니 안 다닌 지 17년 된 사람이더라고요. 하하.
서로 마음에 들었고, 남편은 곧바로 교회에 다니겠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고 했더니, 그걸 위해 새신자 교육 받고, 일대일 제자 양육 받고, 세례까지 다 받았어요.
결혼을 준비하면서 결혼예비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거기서 그런 말씀을 들었어요.
부부가 삼각형을 이루듯 위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걸어가면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요. 그러나 하나님 없이 서로만 바라보면 엇갈리다가 끝나버린다고요.
정말 그렇더라고요.
다툼이 있더라도 주일에 함께 예배를 드리다 보면 나를 돌아보게 돼요.
그러다가 어느 새 풀어져서 둘이 눈이 마주치면 동시에 피식 웃음이 나죠.
간혹 “저 얘기는 당신 얘기야!” 하면서 큰소리로 “아멘”할 때도 있지만요. 하하.
힘든 일 있을 때 핏대 높여 책임을 전가하는 게 아니라 서로 기도 부탁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요.
부부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살아간다는 게 참 좋은 것 같아요.
제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바로 저희 세 가족이 주일에 예배드리며 찬양할 때예요.
그래서 이 기쁨을 온 가정이 다 누릴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도합니다.
아 참, 남편은 결혼 초에는 예배 때 제 손을 꼭 잡고 예배를 드렸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지나치게 딸 바보여서 질투가 날 정도랍니다.
신혼 때 저를 예뻐하던(?) 모습이 요즘은 딸아이한테로 옮겨 간 것 같아서 약간 샘이 나고 있어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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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라는 이름의 공의로운 역할자

아나운서라는 직업은 남들 앞에 저를 드러내는 일이다 보니 말이나 행동이 참 조심스러워요.
그야말로 말 한마디에 엄청난 여파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언제나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게 무게중심을 잡는 것이 관건이죠.
처음 입사해서 몇 년간은 무척 힘들었어요.
직장 생활을 시작하는 초년생이어서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이 모인 방송가에서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아나운서가 자기를 지켜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이 사람 저 사람의 평가 한마디 한마디가 저를 짓눌렀고, 나중엔 제가 제 스스로를 평가하며 높은 잣대를 들이대고 더 잘해야 한다고 몰아붙였던 것 같아요.
남들의 시선 하나, 말투, 기사 댓글, 수군거림이 저를 힘들게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매달렸죠.
왜 저처럼 이렇게 연약한 아이를 이곳에 부르셨냐고요.
멘탈이 강한 사람들도 많을 텐데, 왜 저처럼 유리 멘탈에 툭하면 눈물을 흘리는 아이를 보내셨냐고요.
그런데 그때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라는 고린도전서 1장 27~28절 이 말씀을 주시더라고요. 늘 말씀으로 힘을 얻지만, 정말 이 말씀처럼 저를 용기 나게 해준 말씀은 없었던 것 같아요.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방송국에서 10년 넘게 잔뼈(?)가 굵었지만 아직도 이 싸움을 하고 있지요.
늘 무너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다시 용기를 얻고, 무너지고, 또 나아가고…의 반복이죠.

‘신앙인’이라는 이름의 거룩한 역할자

믿음 생활하면서 나름의 신조가 있는데, 누군가를 도우라는 마음을 주시면 그건 꼭 지키려고 해요.
거창하게 말할 것도 아니고 비록 미약한 힘이지만, 부부가 마음이 맞아 미자립 교회나 선교단체, CGN TV 등을 후원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결혼 전에 컴패션 비전트립을 다녀온 적이 있어요.
그때 컴패션이라는 단체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아이들이 어떻게 양육되는지 보고 와서 그 아이들을 마음에 품게 되었어요.
남편 역시 저를 만나기 전부터 컴패션에 대한 마음을 가졌었다고 하더라고요.
저를 만난 것을 계기로 아이를 후원하게 되었는데,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후원을 가장 오래 기다린 아이를 선택해 후원했다고 하더라고요.
저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마음이 움직여서요.
부부끼리 이런 마음이 통한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요.
나중에 함께 의료봉사 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내자고 남편하고 약속했어요.
저 역시 제게 주신 달란트를 그분이 원하시는 곳에서 원하시는 때에 나누고 싶어요.
요즘은 왜 포도나무 가지처럼 그분께 붙어 있으라고 하셨는지 알 것 같아요.
꽃꽂이를 해놓고 물을 아무리 주어도 결국 나뭇가지는 시들어 죽어 버리잖아요.
제가 연약해서인지, 단 한순간이라도 하나님을 놓치면 저는 떨어져버린 나뭇가지가 될 것 같아요.
꼭 붙잡고 놓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7~39).
너무나 부족하고 연약한 저지만, 이 말씀처럼 언제나 그분 안에서 승리함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결국 내가 승리하는 게 아니라, 내가 예수님 안에 있을 때 넉넉히 승리할 수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