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사랑이시다

issue 2023년 06월호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글 이종태

기독교 철학자나 신학자에게 (요 3:16을 제외하고)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을 하나 뽑아 달라고 하면 아마 많은 이들이 요한일서 4장 16절을 뽑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
“God is Love.” 기독교 신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 이 구절을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은 그 말씀의 철학적, 신학적 중요성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신학), 또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철학)에 대해 말해 주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심플하면서도 가장 심오한 구절입니다.  

“있으라!”

 

기독교는 이 세상이 있는 건 하나님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보다 철학/신학적으로 말해 보자면, 이 세상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 안에 있기에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행 17:28, 새번역). 그래서 철학적 신학은 하나님을 ‘존재 자체(Being)’라고 부르곤 합니다.

 

하나님이 있기에 세상이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그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있기 때문이고, 이것이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창조론’의 철학적 의미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창조 이야기에 따르면, 이 세상 만물이 있는 건 하나님이 “있으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창 1:3). 이 세상은 하나님이 “있으라” 하셨기에 있게 되었고, 그렇게 있게 된 세상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좋아(라)하셨습니다(“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4). 즉, 하나님은 이 세상이 있기를 바라셨고, 그래서 있으라 하셨고, 그래서 이 세상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 세상이 있기를 바라셨을까요? 기독교 신학자들, 철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요한일서 4장 16절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까닭은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에 영감을 받아 형성된 기독교 사상에 따르면,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사랑이신 분입니다.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는 뜻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은 마치 물이 H2O이듯이, 그 존재 자체가 사랑이신 존재라는 뜻입니다. 사랑은 단순히 하나님의 사역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기에 사랑하고 있지 않은 하나님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타는 것이 불의 본질이기에 타고 있지 않은 불이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을 우리는 흔히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말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사랑이 단순히 하나님의 사역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라면, 그래서 사랑하고 있지 않는 하나님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라면, 가만 생각해 보면, 한 가지 중대한 신학적, 철학적 문제가 발견됩니다. 바로, “그렇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는 어떻게 하나님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는 하나님이 사랑할 대상이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랑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타고 있지 않다면 불이 아니듯이,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삼위일체’ 교리는 이 문제에 대해 답을 줍니다. 기독교 신학의 중추 격인 이 교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세상이 있기 전에도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사랑’으로 존재하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있기 전부터, 영원 전부터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성자에게 끊임없이 내어 주고 계셨고, 성자는 성부를 사랑하여 자신이 성부께 받는 모든 것을 끊임없이 성부께 다시 돌려드리고 계셨으며, 성부와 성자 사이의 이러한 영원한 사랑의 운동으로서 성령이 움직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즉, 태초에 ‘사랑’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신학이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부르는 거룩한 사랑이, 사랑의 운동이, 사랑의 관계가, 사랑의 춤이 영원 전부터, 태초부터, 애초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고 천명합니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고 선포합니다. 즉, 태초에 ‘고독’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태초에는 어떤 절대고독, 고독한 존재가 있었을 따름인데, 어찌어찌해서 다른 존재들, 타자들이 생겨났고, 그 존재들 사이에서 비로소 ‘관계’라는 것이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관계’가 먼저 있었습니다. ‘관계’가 ‘고독’보다 더 근원적입니다. 태초에 우리가 삼위일체라고 부르는 ‘절대관계’가 있었고,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그 절대적 사랑의 관계로부터 비롯했습니다.

 

관계로의 초대

 

태초에 삼위일체라는 사랑의 관계가 있었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태초에 ‘I LOVE YOU’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태초에 어떤 고독한 ‘I’가 홀로 자기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태초에, 태초부터 이미 ‘YOU’가 있었고 ‘LOVE’가 있었고, ‘I LOVE YOU’가 있었습니다. ‘I LOVE YOU’라는 관계의 기쁨, 충만이 있었고, 그 충만이 흘러넘쳐서, 그 기쁨이 차고 넘쳐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세상과 이 세상 모든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에 ‘unnecessary creation’이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이 교리가 뜻하는 바는, 하나님은 이 세상이 ‘필요’해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인데, 다시 말해, 하나님은 뭔가 부족한 것, 아쉬운 것이 있으셔서 이 세상을,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안에 뭔가 채워야 할 것이 있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차고 넘치셔서, 당신의 충만이 흘러넘쳐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충만하셨습니다. ‘세상없어도’ 충만하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사랑의 관계 안에서 충만하셨습니다. 기쁨이 충만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이 흘러넘쳐서,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기쁨이란, 희열(ecstasy)이란 밖으로 넘치는(ek+stasis) 법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영성신학에 따르면, 창조는 하나님의 사랑의 기쁨의 범람입니다. ‘I LOVE YOU’의 기쁨이 너무 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천문학적 숫자의 ‘you’들을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그 ‘you’들을 초대하셨던 것이고,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들어오라고. 이 사랑의 관계 안으로, 이 ‘I LOVE YOU’ 안으로, 이 기쁨 안으로 들어오라고.

 

그래서 “있으라” 하신 것입니다.
세상을 있으라 하셨고, 우리를 있으라 하신 것이며,
“있으니 좋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있는 것이 나는 참 좋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존재합니다(I am loved, therefore I am).

 

 

이종태는 한남대 교양학부 교수다.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미국 GTU에서 영성학을 공부했다. C. S. 루이스의 저서 「순전한 기독교」, 「고통의 문제」, 「인간 폐지」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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