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거인>

issue 2022년 11월호 영화 <거인> 글 장다나

이미 훌쩍 커 버린, 하지만 여전히 

보살핌이 필요한 소년

 

 

영재(최우식)는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그룹홈에 들어간 청소년이다. 보호와 관심이 우선시되는 이 시기에 그의 집은 안식처가 아닌 오히려 가장 두렵고 불편한 공간이다. 그래서인지 영재는 누구보다 만족스러운 그룹홈 생활을 하지만 이도 잠시, 곧 이곳을 떠나야 할 시기가 온다. 일정 나이 이상이 되면 자립해 이곳을 나가야 하는 것이 그룹홈의 규정이기 때문이다. 어엿한 성년의 길목에 들어선 이 소년은 응원과 지지를 받고 이곳을 떠나게 될 텐데 이곳은 조금 이상한 상황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이가 많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하루가 멀다 하고 의미 없는 핀잔 따위를 영재에게 던지고 있달까. 사실 그룹홈 담당자들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돌봐야 할 아이들은 점점 많아지는데, 가장 큰 후원체인 종교 시설의 지원은 점점 줄어드는 판국이라 막막하기는 매한가지다. 그 와중에 나이가 차고도 남은 영재는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으니 그를 결코 예쁘게만 볼 리 없다. 이런 상황에서 영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저 담당자들에게 잘 보이는 것뿐이다. 종교 시설의 지원을 인식한 듯, 신부가 되겠다며 시설 담당자들의 구미를 맞추거나 그룹홈 내에서 모범적인 행동을 하는 등 이곳에 남기 위한 영재의 몸부림은 그야말로 처절하다. 하지만 그룹홈 밖에서는 후원 물품으로 들어온 신발을 훔쳐 팔거나 주변인들에게 거짓말로 속여 이익을 꾀하는 등, 또 다른 방식의 살 궁리에 정신이 팔려 있는 상태이다. 이런 이중적인 모습은 영재가 처한 경계선 위의 아슬아슬한 상황과 오버랩 된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던 어느 날, 그렇게도 피하고 싶던 아버지가 영재를 찾아온다. 더욱이 영재의 동생까지 데려와 떠맡기려 하자 영재는 결국 폭주하고 만다. 

김태용 감독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영화 <거인>의 주인공 영재가 본인의 청소년기를 고스란히 입은 캐릭터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감독 역시 청소년 시절 집이 너무 싫은 나머지 스스로 박차고 나와 그룹홈 생활을 했다고 한다. 영재가 신부가 되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나,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도 실제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이렇게 자전적인 이야기로 영화를 채워 넣은 이유에 대해 “힘들고 기댈 곳 없었던 자신의 10대 시절을 재현함으로써 지금의 10대들을 위로하고 싶었다”라고 대답한 감독의 인터뷰는 퍽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초기 시나리오 개발 과정에서 이 영화의 제목은 <거인>이 아닌 <눈물>이었다고 한다. 극 중 영재가 이곳에 남게 해달라고 울며 원장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리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감독은 이 순간이 어쩌면 힘든 청소년기를 보내는 영재가 나중에 어른이 되어도 가장 힘들었을 순간으로, 또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을 순간으로 기억하는 장면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지은 제목이라고 한다. 그러나 막상 촬영이 시작되면서부터 문득 초등학생들과 같이 밥상 앞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눈칫밥을 먹는 영재의 모습을 보니 힘없고 덩치만 큰 연약한 아이의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고. 아직 단단해지지 않은 내면과는 달리 불안과 상처를 먹고 몸만 커져 버린 ‘거인’의 모습으로 말이다.

 

최근 청소년기를 소재로 제작된 영화들을 생각해 보면 학교폭력, 자살, 입시 지옥, 따돌림 등 이슈의 정점에 놓인 사회 문제들을 소재로 극적인 서사를 부여하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사실 <거인>은 위의 영화들과는 확실히 다른 결을 지녔다. 가해자와 피해자 혹은 강자와 약자 같은 극단적인 구도를 벗어나 살아남고 싶어 하는 주인공의 감정선 자체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다고 할까. 극 중 영재가 보여 주는 성실한 모습과 어두운 모습 역시 어느 한쪽으로 무게중심이 치우치지 않다 보니 영재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눈여겨보기보다는, 영재가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마음을 떠올려보는 순간을 대면하게 된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영재가 가지고 있던 끝없는 불안과 아픔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배려된 친절한 연출 방식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 한구석이 찡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안의 시기를 감독이 집요하게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일 터. 영화는 초입부터 영재의 불안을 가득 머금고 시작한다. 함께 기도하는 그룹홈 아이들 사이로 영재가 보인다. 슬쩍슬쩍 눈을 떴다가 감는 영재의 모습을 보며 문득 어릴 적 기도시간에 눈을 꼭 감아야만 하나님이 들으신다던 할머니의 이야기가 떠올라 살짝 웃음이 나기도 했다. 호기심에 눈을 떴을 때 앞에 있던 친구와 눈을 마주치고 재미있다는 듯 웃던 유년의 시간이 뇌리를 스치던 순간 아, 지금 영재는 전혀 다른 상황이구나, 라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았다. 영재의 실눈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눈을 떠 보는 어릴 적 장난이라기보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 같다. 모두가 눈을 감는 합의된 시간에도, 불안함에 결코 눈을 감을 수 없는 이 아이의 부유하는 마음을 관객이 알아차리는 순간 영화는 비로소 불안의 동력을 채우고 서사를 시작한다.

 

영화 내면에 흩날리는 이 ‘불안’이라는 정서는 영재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그가 이동하는 모든 공간에 서려 있다. 항상 눈칫밥을 먹을 수밖에 없는 그룹홈, 음성적으로 물건을 팔며 들킬까 두려워하는 학교, 성당 역시 신부님에게 잘 보이기 위한 목적성 있는 장소일 뿐 이 영화 어디에도 영재가 마음을 둘 곳이 없다는 점은 내내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영화 중반부에 등장하는 바다 또한 그러하다. 대부분 영화적 해석으로 바다는 드넓은 꿈, 펼쳐진 미래, 밝은 미래 등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되는데 이 영화의 바다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바다이다. 심지어 영재가 바다 쪽으로 나아갈 수조차 없게끔 하는 부표 같은 것들이 계속해서 영재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시종일관 흐릿한 극 중 날씨 역시 마음으로 스미는 스산한 감정의 부유물들을 만들어 낸다. 실제 <거인>은 겨울에 찍은 영화이다 보니 차가운 공기의 느낌과 더불어 항상 안개 낀 느낌이 가득한데, 오히려 계절 그 자체가 주는 꾸밈없는 정서가 영재의 내면과도 상당히 흡사한 부분이 있다. 만약 영화를 맑고 깨끗한 봄날에 찍었으면 어떤 느낌일까. 아마 날씨가 청명하더라도 맑은 날의 이별이 더 처절하고 슬프듯, 스산함과는 또 다른 방식의 불안이 되어 어떤 형태로든 영재의 공간을 가득 채울 것이다. 작게나마 마음 둘 곳이라면 과외 선생님 집 정도가 되지 않을까. 

“언제든지 배고프면 와.”

과외 선생님의 엄마가 던진 이 한마디에 영재는 이제껏 한 번도 보여 주지 않던 가장 편안한 미소를 띤다. 비록 아주 잠깐이었지만 말이다. 

 

불안의 요소들은 영재를 생존이라는 극한의 상황으로까지 몰고 간다. 이 영화의 독특한 점 중의 하나는 유난히 자는 장면과 먹는 장면이 많다는 것이다. 먹고 자는 것은 워낙 반복적인 것이기 때문에 간혹 의미 없이 지나칠 수 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생존의 문제가 눈앞에 놓인 영재에게는 무엇보다 필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어느 곳 하나 편하게 먹거나 잘 수 있는 곳이 없다. 그룹홈에서도 밥 한술 뜨는 게 그렇게나 눈치 보일 수 없다. 항상 뜬 눈으로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나마 가까스로 잠을 청한다고 한들 누군가에 의해 깨는 등 하루도 편하게 몸을 뉠 날이 없다. 서러움과 슬픔이 차오르는 순간, 견디지 못한 영재는 이른 새벽 이 공간을 박차고 뛰쳐나온다. 생존 자체가 힘든 소년,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이 소년의 몸부림을 어른들은 그저 약삭빠르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치부한다. 매일같이 비수 같은 말들이 영재의 마음으로 쏟아져 내린다. ‘너 혼자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마’, ‘다들 상처 하나씩 안고 있다’, ‘얌전한 척하지만 네가 제일 무서운 애인 거 알지?’ 

 

어쩌면 영재가 힘들어했던 것은 생존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쓸어안고 위로해 줄 사람이 어느 곳에도 없다는 사실 아니었을까. 영재는 계속해서 신부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그룹홈에 남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지만 더 깊은 내면에는 신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인간에게 기댈 수 없다는 절망은 신을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왜냐하면 신은 결코 우리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장다나는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상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 외래교수, 영화진흥위원회 객원연구원으로 영화 교육 및 비평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 영화제와 모두를 위한 기독교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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