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그 위대한 생성과 소멸의 도시

issue 2021년 12월호 로마, 그 위대한 생성과 소멸의 도시 글 장다나

영화 <그레이트 뷰티>(2014)

 

몇 년 전 남편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시원하게 때려치웠다고는 말 못 하겠다. 입버릇처럼 “자본주의의 노예로 살 수 없다. 회사에 크게 한 방 먹이겠다”라고 큰소리치더니만 결전의 날, 그 한 방 오히려 본인이 실컷 드시고는 풀 죽어 돌아왔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겉옷도 받아 주고, 좋아하는 느타리도 튀겨 주고 그날만큼은 최대한 기분을 풀어 주려 했다. 그가 날린 마지막 한 방을 맞기 전까지 말이다.
“이제 그 먼 곳으로 출퇴근할 이유 없어져서…, 나 차 팔았어.”
당혹스러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우리 부부의 유일한 재산인 자동차를 한마디 상의도 없이 홀라당 팔아버리다니. 하지만 그와 동시에 반평생을 샐러리맨으로 살아오며 작은 일탈 한 번 하지 않았던 그의 수많은 시간을 기억했다. 마음 한 구석 무언가가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잘했어. 그 고물차 잘 팔았네. 그런데 차 판 돈은 어디에 쓰려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뭇 진지한 그의 표정을 보니 알싸한 긴장감이 몰려왔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는 신호였을까.
그리고 나는 한 달 후 그와 함께 로마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탈리아의 젊은 거장 파올로 소렌티노의 <그레이트 뷰티>는 화려했던 제국의 외피만 남은 도시 로마를 배경으로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고자 하는 한 남자의 여정에 주목한다. 이 여정은 예술과 종교를 끌어들여 과거와 현재 그리고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주인공의 내면을 서정적으로 풀어냄과 동시에 삶과 죽음에 대한 짙은 냉소 또한 탁월하게 감지한다.
한때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젭(토니 세르빌로)은 지금 상위 1%의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삶은 무미건조함 그 자체이다. 화려한 파티, 아름다운 예술도 그에게 공허함만 남길 뿐이다. 어느 날 첫사랑의 부고 소식을 들은 그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떠올리게 되고 허무함만이 가득하던 그의 마음엔 어느덧 작은 궤적 하나가 그려진다.
소렌티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로마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겪었던 로마를 바탕으로 아름다움과 모순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담고 싶었다”라고 밝힌 바 있다. 말 그대로 로마라는 도시는 수천 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아름다운 도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현재는 타락과 몰락의 함의를 가진 곳이라는 것. 이런 감독의 의도처럼 영화는 신성의 의미와 세속의 이미지로 대비되는 두 가지 모습의 로마를 보여 준다. 초반부 대포 소리로 시작하는 신성한 로마는 아름다운 아리아를 들려주는 여성 성가대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종교와 예술, 신화의 근원인 로마제국의 화려함을 입은 이들의 목소리는 고대 로마가 품던 고결함과 위대한 자신감을 입었다. 그러나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이곳의 고결함을 파괴하는데 바로 현대 로마의 등장이다. 아리아와 대비되는 시끄러운 하우스뮤직과 나체의 여성들이 춤을 추는 이곳, 감각적 절정만을 찾는 이곳 역시 로마이다. 건축물을 비롯해 외향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비슷한 듯 모르는 사이 서서히 그 모습을 변화시킨 지금은 로마는 마치 과거의 위대한 예술의 시기를 잊은 듯하다.
재미있게도 이 대비되는 두 세계의 로마, 그 사이에 바로 젭이 존재한다. 젭의 첫 등장은 화려한 생일 파티가 한창인 펜트하우스에서 이루어진다. 남녀가 서로를 갈망하는 격정적인 춤이 난무하는 가운데 그 사이를 뚫고 서서히 정체를 드러내는 젭. 한 여성이 그를 향해 소리친다.
“생일 축하해요, 젭! 생일 축하해요, 로마!”
이는 젭이 영화 속 인물이지만 로마 그 자체임을 직접적으로 은유하는 부분이다. 즉 젭은 로마의 현재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서술자의 위치이면서도 현재의 로마 그 자체가 되어 도시 구석구석을 떠돈다. 인상적인 것은 과거의 유적을 탐닉하기도 하고 다양한 예술가들과 정치인, 종교인들을 만나며 로마의 현 주소를 되새기는 젭의 태도가 시종일관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성과만 드러내기 급급한 예술가들, 권력과 이익에만 매달리는 정치인, 종교에 큰 무게를 두지 않는 성직자, 정직을 내세우지만 실제 사기꾼인 사람들까지. 젭은 그들의 외피를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냉소적 태도로 이 모든 상황을 관조한다. 영화의 초반에서도 셀린느의 「밤의 끝으로의 여행」을 언급하며 모든 것이 죽음을 향한 여정일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젭. 한때 세계의 중심으로 통하던 로마는 이렇게 몰락의 길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은 허울뿐인 로마의 모습에 대한 젭의 안타까움의 정서가 영화 곳곳에 스며든다.

이런 허무한 세상에서 젭이 경험하게 되는 그레이트 뷰티, 위대한 아름다움은 과연 무엇일까.
젭은 첫사랑의 죽음을 통해 그 먼 옛날 과거의 어느 시기를 다시 한번 기억하게 되는데, 잊고 있었던 사랑의 기억 하나를 현실로 끌어올린다. 사라지고 없다고 생각한 과거의 시기이지만, 그 당시 느꼈던 그녀에 대한 진심 어린 마음과 진정한 사랑, 18살의 나폴리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의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낀다.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지는 세속의 세상 속에서도 단 하나, 기억 속 그녀와의 사랑은 현재의 자신을 살아가게 하는 위대한 아름다움임을 깨닫게 된다. 이는 바로 로마라는 도시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아름다움을 깨닫는 과정과도 같다. 소렌티노 감독은 ‘로마는 경이로움과 위대함의 도시이다. 항상 몰락의 길을 걸었음에도 스스로 자생한 도시이며, 5백 년이라는 도시가 가지고 있는 아우라 그 자체는 현재 우리 모두가 느낄 수 있는 위대한 아름다움, 그레이트 뷰티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셀린느의 「밤의 끝으로의 여행」을 시작으로 영화는 허무한 인생 여정의 서막을 이야기하지만, 젭은 마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처럼 그 여정에서 만나는 수많은 기억과 흔적을 통해 죽음으로 달려가는 우리의 삶 곳곳에 아름다움의 흔적을 남긴다. 그 기억이야말로 다시금 삶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지 않을까. 수많은 인생의 변곡점에 서 있을 때, 혹은 허무한 삶의 기로 위에 서서 정처 없이 부유하는 누군가를 향해, 영화 <그레이트 뷰티>는 당신을 지금까지 있게 한 근원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당신의 화양연화는 언제입니까?”

일주일간의 로마 여행은 생각보다 덥고 피곤했다. 무리해서 여행을 온 탓에 저녁마다 메일을 확인하기 바빴고 숙소에 들어와 일을 처리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도 있었다. 폭염이 극심했던 마지막 날, 결국 나는 콜로세오 입구에서 길고 긴 줄에 지쳐 울음을 터뜨렸다. 이게 여행이냐 생고생이지. 울고불고하는 나를 달랜다며 그는 비교적 관광객이 덜한 포로로마노를 둘러보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하자고 했다. 둘러보는 도중 보슬한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시원한 소나기로 바뀌었다. 잠시 비를 피하기로 하고 노상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몇 시간 전부터 조용하게 내 뒤를 따라왔던 것 같다. 괜스레 미안하기도 해서 많이 피곤하냐고 물었다.
“아니, 이 도시가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 같아” 예상외의 대답에 흠칫 놀랐다. 울고불고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던 찰나, 나 역시 아무 말 없이 커피를 홀짝이며 비를 구경했다.
화려한 유적지는 내리는 빗속에 조용히 침잠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한때 화려했던 이 도시의 기운과 위용은 어딘가에 혹은 누군가에게 남아 있겠지, 라는 생각이 들 무렵, 그의 빛나는 얼굴을 보았다. 그날의 그는 이 도시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아니면 무엇을 느낀 것일까. 

 

 


장다나는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상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 외래교수, 영화진흥위원회 객원연구원으로 영화교육 및 비평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 영화제와 모두를 위한 기독교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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