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베트의 만찬>, 1987

issue 2021년 09월호 <바베트의 만찬>, 1987 글 장다나

화해와 회복을 이루는
따뜻한 만찬으로의 초대

 


밥에 대한 수다로 풍요로운 요즘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느니, 잘 먹고 잘 살자 정도의 목숨 연명에 대한 비유는 안드로메다급 ‘라떼’ 시절 이야기가 된 지 오래다. 지금의 밥은 백세 시대라는 이름 아래 웰빙이나 힐링 같은 건강 트렌드와 함께 필수적인, 때로는 고급스러운 수다의 재료가 되고 있다. ‘맛있는 밥, 우리도 쉽게 만들 수 있어요!’ 한때 돌풍을 일으켰던 백종원 이펙트에 이어 쏟아지는 음식 관련 프로그램, 그리고 집밥, 혼밥, 먹방, 맛집 투어 등의 카테고리가 검색엔진 상위권을 점령하면서 그야말로 다양한 밥의 세계는 삶의 풍요로움을 담당하는 감동적인 이름이 되었다. 이쯤 되면 ‘찬밥 신세’라는 비유도 그 뜻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것 아닐는지.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이른바 먹는 류의 영화가 그렇다. <카모메 식당>의 소금오니기리와 시나몬롤, <리틀 포레스트>의 크림브륄레, <심야식당>의 버터 마구이 등은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지만, 블로그 몇 개만 검색해도 간편한 조리법을 알 수 있어 러닝타임 이후에 더 풍성한 여운을 즐길 수 있는 영화가 된다. 물론 부지런히 실행에 옮겨야 가능하지만 말이다.


밥, 음식 그리고 영화. 이런 즐거운 이야기를 나눌 때면 항상 기다렸다는 듯 자동 반사처럼 머릿속에 재생되는 영화의 한 장면이 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은 식사를 하는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긴장된 표정으로 주시한다. 사람들은 최대한 무표정한 얼굴로 음식을 먹고 있지만 분명 무언가 다르다. 이미 그들의 눈빛은 감흥에 차 있다. 그 눈빛을 감지한 검은 옷의 여인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음식을 한 스푼 입에 떠 넣는다. 이윽고 그녀의 눈빛은 찬란하게 빛난다.”

 

바로 가브리엘 엑셀 감독의 1987년 작 <바베트의 만찬>의 한 장면이자 나에게 최고의 음식 영화로 기억되는 장면이다. 제작된 지 벌써 30년이 지난 오래된 영화가 되었지만, 주인공 바베트가 부엌 한구석에서 요리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는 그 모습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되는 감동적인 장면으로 꼽힌다. 하지만 나는 당시 바베트가 만든 요리 자체에는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프랑스 요리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다 보니 음식 맛을 상상할 수 없어 마치 잘 만든 전시용 플라스틱 음식을 빠는 것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접시에 올린 새의 머리와 거북이를 푹푹 쪄 만든 수프가 공포영화처럼 다가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베트의 만찬>의 식사 장면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어쩌면 그 당시, 나는 음식이 주는 눈과 입의 호강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함께 맛보는 순간을 경험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바베트의 만찬>은 한 여인의 내레이션을 시작으로 조용한 바닷가 마을을 찬찬히 조망한다. 유틀란드 바닷가 마을에 살고 있는 필리파(보딜 카이어)와 마티나(버짓 페데스피엘)는 독실한 청교도 신자로, 이들은 보수적인 목사 아버지 밑에서 그 규율에 맞게 평생을 살아온 자매이다. 한때 외부에서 온 청년들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지만 자매는 마을 신앙 공동체 안에서 아픈 자들을 섬기며 평생을 둘이 함께하는 삶을 선택했다. 어느 날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이곳을 찾아온 바베트(스테파니 오드런)가 자매 앞에 나타나고, 그녀는 보수 없이 자매의 일을 도우며 한집에서 살게 된다. 이웃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적응해 나가던 바베트는 어느 날 엄청난 금액의 복권에 당첨된다. 그녀가 이제 이곳을 떠나 프랑스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매에게 바베트는 한 가지 청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바로 자매 아버지의 기일에 자신이 직접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싶다는 것. 그날로 바베트는 각종 재료를 공수해 마을 사람들에게 선보일 최고의 만찬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바베트의 만찬>은 시종일관 차분한 분위기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영화 공간과 등장인물의 내부로 조금만 들어가면 겉으로 보이지 않는, 희미한 대립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고립된 곳과 열린 곳, 내부와 외부, 그리고 집단과 개인이다. 이런 대립은 묘하게 얽히고설키다가 공동체 그리고 이방인의 모습으로 영화 속에 등장한다.
이 작은 마을은 신앙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 집단이다. 신앙에 근거한 규칙이 이들의 일상을 이루고 있고 그것을 지키고 따르는 것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만큼 타 지역과 소통하는 일을 멀리하고 고립된 생활을 하다 보니 폐쇄적이고 획일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극 중 이방인 어느 누구도 이 마을 공동체 안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건너온 젊은 장교와 오페라 가수는 사랑과 예술이라는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이 공동체에 들어왔지만 서로 다른 상황으로 일원이 되기를 포기한다. 장교는 스스로 공동체에 속할 수 없다고 여겨 떠났고 오페라 가수는 그가 공동체의 방식에 맞지 않다고 본 필리파에 의해 거부당한다. 공동체는 공동체의 규칙을 우선으로 여기고 이방인은 그 규칙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보니 결코 합일점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바베트는 무언가 달랐다. 어떻게 그녀는 이방인이자 공동체 일원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일까. 하나는 자신을 낮추는 섬김의 자세에 있다. 사실 바베트는 전쟁 중 프랑스에서 건너온 일류 레스토랑의 수석 셰프이다. 그녀는 최고의 요리사이지만 본인의 방식을 내세우지 않고, 말린 생선을 물에 불려 놓는다거나 말린 곡류로 오트밀을 만드는 등 자매가 가르쳐 주는 단순한 조리 방법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자매가 타인을 섬기는 방식 역시 그대로 수용한다. 그러다 보니 돌봄을 받는 이들은 어느 순간 자매보다 바베트가 와 주길 내심 고대하기도 한다. 자신을 낮추고 베푸는 삶을 실천하는 것. 이것은 바베트가 보여 준 또 다른 신앙의 방식일 것이다. 또 하나, 바베트는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배척과 균열의 민낯을 서로 바라보게 하고 화해의 제스처를 청하게 한다. 그것도 바로 ‘밥상’으로 말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마을 사람들은 예배 시간에도 서로 헐뜯기 바쁘다. 찬송가를 부르면서도 마주 앉은 사람의 눈을 보며 정죄하기 일쑤다. 질투와 거짓말 그리고 치정이 난무한 공동체의 실체가 점점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이미 서로에 대한 실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지만, 겉으론 질끈 눈을 감고 연신 할렐루야를 외치는 마을 사람들의 표정은 어둡고 싸늘하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바베트의 마법 같은 만찬이다. 

 

영화는 어떠한 책망도 어떠한 규칙도 언급하지 않은 채, 그저 함께 둘러앉아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도 가능한 식탁 위의 기적을 보여 준다. 상에 오르는 진귀한 음식의 강렬함을 넘어 <바베트의 만찬>이 더 감격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음식을 먹는 이들의 변화이다. 바베트가 공수해 온 거북이, 메추리 등등 이국적인 재료를 보고 사탄의 음식일지도 모른다, 먹고 죄악을 범할지도 모르니 음식의 맛에 대해서는 함구하자던 이들의 굳은 얼굴은 음식을 맛보며 하나둘 천진한 어린아이의 표정으로 변화한다. 함께 향기로운 와인을 맛보고 서로의 잔을 맞대는 순간, 어색함은 어느덧 사라지고 식탁 위에는 진지한 자기반성과 허심탄회한 용서의 말이 오간다. 그리고 결코 풀릴 것 같지 않던 이들의 오래된 마음의 빗장이 열리는 순간 우리는 함께 바베트의 만찬 안에 담긴 진심을 맛본다. 음식을 즐기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 그리고 맛이 주는 즐거움과 더불어 함께 먹고 마시는 이들의 관계까지 변화를 일으키는 놀라운 힘을 가진 ‘밥’이라니.


“우리 같이 먹어요!”


둘러앉아 함께 먹는 따스한 밥. 평화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재료 중 하나일 것이다. 

 

 


장다나는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상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 외래 교수, 영화진흥위원회 객원 연구원으로 영화 교육 및 비평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 영화제와 모두를 위한 기독교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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