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소외층을 향한 전도자의 메시지

issue 2020년 10월호 사회 소외층을 향한 전도자의 메시지 글 이성조

이 세상의 불공정은 저주인가 축복인가?
전도서 4:1~16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 불공평합니다. 이 세상이 어느 정도 정의롭다면 이 세상은 반드시 불공평해야 합니다. 어떤 아르바이트생은 8시간 동안 열심히 일합니다. 다른 아르바이트생은 거의 퇴근 때가 다 되어 출근해서 1시간도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둘 다 똑같이 하루 임금 10만 원을 주었다면 8시간 열심히 일한 아르바이트생은 분명히 불공평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전 4:5) 게으른 사람도 있는 반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를 다해(전 4:4) 열심히 일해서 결국 성공하고 많은 재물을 모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수고하고 창의적 아이디어를 통해 성공한 사람들을 시기하고 질투하여(전 4:4) 각종 세금과 부담금의 명목으로 빼앗아 자기의 몸만 축내는 사람들에게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나누어 준다면 과연 그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일까요? 개인의 열심과 노력에 의한 차등이 어느 정도는 보장되어야 정의로운 사회입니다. 기독교는 결코 이렇게 노력으로 얻어진 축복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차등이 구조적으로 당연시 되는 경우입니다. 이미 성공하고 부유한 사람이 더 쉽게 자기의 부를 쌓게 되는 기득권적 사회가 된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그 차등을 극복할 수 없게 됩니다. 권력자나 기득권자들이 가난하거나 소외된 자들을 더 쉽게 학대하고 억압하는 사회 구조가 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지만 학대받는 자에게는 위로자가 없습니다(전 4:1).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지요. 지금도 부유한 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낮은 이자로 마음껏 돈을 빌릴 수 있습니다. 정작 돈이 필요한 가난한 사람들은 돈을 빌릴 수가 없습니다. 20~30% 이상의 고리를 주고서야 겨우 빌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이 악화되고 대물림 되는 부조리한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버드대 석좌교수이자 정치철학자였던 존 롤스(John Rawls, 1921~2002)는 현대 국가들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다양한 법을 제정하고 복지 제도를 넓혀야 한다고 말합니다. 롤스에게 정의란 소외 계급의 사람들에게 이 구조적인 차등을 없애서 적어도 출발선을 같게 해 주자는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일한 대로 정당한 보상을 얻게 하자는 것입니다. 당연히 기득권층은 불평하겠지요. 그래서 롤스는 원초적 입장을 설명합니다. ‘사람들에게 무지의 베일(A Veil of Ignorance)을 씌워서 자신이 앞으로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 어떤 지위를 갖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회 구조를 선택하게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운이 좋으면 좋은 환경과 가정에서 태어날 수 있지만, 운이 나쁘면 아주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날 수도 있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균등한 기회가 제공되는 사회 구조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롤스는 차등의 원칙과 기회 균등의 원칙을 주장합니다. 사회적으로 운이 없었던 품꾼들, 즉 소외 계급에게 그만큼 더 많은 기회와 보상을 제공해야 정의가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정말 기회가 균등하고 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이 주어진다면 정의로운 사회가 될까요? 전도서 말씀은 각기 다른 2명을 소개합니다.
한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습니다(전 4:8). 고아인 것이지요. 그는 균등한 기회를 제공받아 열심히 일해서 안정적으로 재산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고아인 그에게 믿을 수 있는 것은 이 땅의 물질뿐입니다. 얼마큼의 재물을 모아야 삶의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요? 처음에는 집이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시대에 집 한 채 있다고 해서 삶의 안정감을 느낄 수 있던가요. 그는 빌딩 정도는 있어야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10년을 쉬지 않고 일해서 강남에 작은 상가 건물 하나를 드디어 마련했습니다. 자, 이제 그는 정말 행복할까요? 전도서 저자는 말합니다.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전 4:8).
그는 성공할수록 물질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없는 진짜 고아가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남을 학대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입니다. 요즘 청년들이 불공정을 일컬을 때 대표적으로 하는 말이 ‘수저론’입니다. 기성세대가 모든 기득권을 가진 상황에서 아무리 일해도 신분 상승은 어렵습니다.
또 다른 젊은 사람을 봅시다. 그는 가난하게 태어났습니다. 심지어 감옥에도 갔다 왔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일하고 공정과 정의를 부르짖어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왕의 자리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는 정의와 공정을 이야기하며 왕이 되었습니다만 이제는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불의와 악행을 서슴지 않고 행합니다. 결국 그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미움을 받고 타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전 4:13~16). 그래서일까요? 전도서는 불공평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 정의를 외치지 않고, 대신 ‘허무함’을 탄식합니다. 헛되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인류의 역사가 아닐까요?

세상의 불공평한 상황은 돌고 도는 쳇바퀴일 뿐입니다. 아무리 법적으로 약자를 보호하고 기회를 균등하게 한다고 해도 그 법은 또 다른 불공정과 부정을 낳습니다. 아무리 개인의 기회와 인권을 보장해도 그것이 개인의 행복을 증진하기보다는 사회 구성원 간의 갈등과 싸움, 시기와 질투를 조장하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는 공정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의는 법이라는 강제적인 힘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많이 벌었다는 이유로 소득의 40%를 세금으로 내야 하고, 가난한 사람이 빵 하나 훔쳤다는 이유로 감옥에서 19년을 살아야 합니다. 법이 폭력이 되는 순간입니다. 

어떻게 해야 세상의 불공정을 극복하고 개인의 삶이 행복의 단계로 오를 수 있을까요? 전도서 저자는 우리에게 제안합니다. ‘우리는 개인(individual)으로 사는 존재가 아닌,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적 인간(person)이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지만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으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전 4:9~12). 우리가 공동체적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불공정을 우리의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을 우리 공동체 안에 모이게 하십니다. 강한 지체도 있고 연약한 지체도 있습니다. 부한 지체도 있고 가난한 지체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공정의 대척점에 있던 서로 다른 지체를 한 공동체로 모이게 하신 것일까요? 우리가 개인(individual)이 아닌 공동체적 인간(person)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넘어지는 자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넘어지는 자를 보고 그냥 지나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괜찮은지 물어보고 그 사람을 일으켜 세웁니다(전 4:10).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타자(나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가 없다면 진정한 정의도 없다고 말합니다. 내 안의 관심에서 벗어나서 ‘자기’라는 그 감옥의 저주를 깨고, 나의 얼굴과 두발을 향하게 해 줄 수 있는 존재는 누구인가요? 바로 타자입니다. 타자의 얼굴입니다. 이제 불공정을 말하기 전, 우리 안에 가장 가난하고, 고통받고, 외로운 사람들의 얼굴 앞에 서야 합니다. 그 얼굴이 내게 말합니다. “넘어진 나를 일으켜 줄 수 있니? 나에게 진정한 사랑을 베풀어 줄 수 있니?” 그 얼굴이 내게 하는 명령에 순종하길 소망합니다. 그러면 이 불공정 사회가 주는 시기, 질투, 분노와 갈등을 넘어 내 삶에 대한 진정한 자유와 가치와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성조는 상동감리교회 담임목사다. 경영학과 신학, 그리고 교육과 철학을 넘나들며 대중과 소통하는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불편한 믿음」, 「그래도 행복해 그래서 성공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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