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 앞에 선 오토바이 두 대에 신경이 쓰입니다. 옆구리에 적힌 ROK 세 글자가 자꾸 눈길을 잡아당깁니다. ‘대한민국을 가리키는 영어 약자인가? 그럼 임자는 한국인일 텐데, 비행기로도 열세 시간이 걸리는 자그레브까지 오토바이를 몰고 왔다고? 정말?’ 정말이었습니다. 임자는 갓 결혼한 앳된 부부였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배로, 그 다음부터는 오토바이를 몰고 유럽대륙을 가로지르는 여행을 하고 있답니다. 세 달 여정인데 벌써 3주가 지났다고 했습니다. 꿀 같은 시간이어서 일분일초가 아쉬운 눈치였습니다. 얼굴 절반에는 피로가, 나머지 절반엔 그 노곤함을 가리고도 남을 만한 생기가 일렁입니다. 부럽습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습니다. 플리트비체로 간답니다. 우리가 2주에 걸쳐 내려온 길을 단숨에 거스를 심산입니다. 눈이 핑핑 돌아가게 빠른 속도에 숨이 막힙니다.
반사적으로 잔소리머신에 시동이 걸립니다. “왜요? 급한 일 있으세요? 여정을 줄이고 조금 천천히 가시면 어때요? 속도가 빨라질수록 시야가 좁아지는 법이라잖아요. 그렇게 앞만 보고 냅다 내빼서야 길가에 지천으로 핀 보라색 꽃들이 보이겠어요? 바닷가 작은 마을에 들러서 오징어튀김이라도 한 접시 맛보고 가시면 좋잖아요. 인적 드문 해변에 차를 대고 반나절 헤엄을 즐겨보세요.” 입 밖에 내진 않았습니다. 대신 남은 먹거리들을 탈탈 털어다 건넵니다. 포장을 뜯지 않은 고추장 한 통이랑 매운맛이 더해진 된장, 김, 카레 따위를 쥐어줍니다. 신랑의 입이 헤벌쭉 벌어집니다.

저녁상을 물리자마자 난데없이 초인종이 울립니다. 문을 반쯤 열고 고개를 삐죽 내밉니다. 복도 끝 현관문 너머로 젊은이 둘이 간절한 눈빛을 보냅니다. 영어로 말을 거는 걸로 미뤄 동포는 아닐 듯합니다. 무슨 사연이 됐든, 일단 방 안에 들여서 듣기로 합니다. 이곳 날씨는 밤낮이 딴판이어서 해만 지면 늦가을 한기가 옷깃을 파고듭니다. 그이들이 쏟아내는 말들을 토막토막 종합해 보니 숙소에 체크인을 해야 하는데 주인과 연락이 닿지 않는 듯했습니다. 아무 집 대문이나 두들기고 누군가 나오면 물어볼 요량이었답니다. 아무개가 어디 사는지 아느냐고요. 요행히 그이들이 찾는 주인은 우리 숙소의 주인이기도 했습니다. 대신 연락을 넣어주고 자리를 권합니다. 아내는 서둘러 차 끓일 물을 불에 올립니다.
부부, 적어도 연인인 줄 알았던 둘은 생면부지랍니다. 총각은 독일에서, 아가씨는 영국에서 공부하는 중국 학생들인데 온라인게임을 하면서 알게 됐답니다. 의기투합해서 여행길에 나섰지만 온라인이 아닌 현실에서 얼굴을 본 건 오늘, 공항에서가 처음이랍니다. 그런 여행이 가능하다는 게 신기하다 싶기도 하고, 아빠·엄마는 아시는지 묻고 싶기도 하고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꼰대’다운 잔소리머신이 부르릉거립니다. “동행을 너무 쉽게 정하신 게 아닐까요? 여행길에 동무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긴 여행은 가깝고 오랜 관계도 쉬 망가뜨린답니다. 몸이 고단하면 서로 거친 생각과 감정이 거름망 없이 그대로 튀어나오거든요.” 입 밖에 낼 시간은 없었습니다. 집주인이 헐레벌떡 달려왔거든요. 주인이 묻습니다. “니들, 원래 아는 사이니?” 우리가 답합니다. “아시아에선 다 이렇게 해.”

몬테네그로의 소도시 코토르에 들렀습니다. 소박한 삶의 기운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좋았습니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좁다란 골목들은 명품이었습니다. 고양이상품만 파는 가게에 들릅니다. 구경만 할 셈이었는데 귀여운 표정에 홀려 인형을 둘씩이나 사들고 말았습니다. 여기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우리식’ 아메리카노로 커피 갈증도 달랩니다. 이렇게 먼데까지 나와 카페를 연 한국인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마을을 절반쯤 누비고 성당 계단참에 주저앉습니다. 전반전 끝, 이제 하프타임입니다. 끝없이 움직이던 세계가 멈추자 비로소 귀가 열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거슬리는 소리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달달달, 들들들, 덜덜덜. 성문에 들어섰을 때부터 귓가에 맴돌던 그 소음은 트렁크 바퀴가 돌바닥을 구르는 소리였습니다. 집채만 한 짐을 끌고 다니는 이가 한둘이 아닙니다. 목적지로 가는 길에 잠깐 들러 구경을 하자니 짐을 버려둘 곳이 마땅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중국인 아가씨가 제 몸의 절반을 가릴 만큼 거대한 트렁크를 내려놓고 계단 반대편에 앉습니다. 눈길이 마주치자 짐을 가리키며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가방 크기는 여행자의 내공을 보여줍니다. 짐의 크기는 여행의 질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무거운 가방은 에너지를 축내고, 기력이 떨어지면 구경이 즐겁지 않습니다. 피곤은 성격을 뾰족하게 만들어서 분란의 원인이 됩니다. 잔소리머신을 돌리고 싶지만, 영어가 짧아 오지랖의 범위를 해외까지 넓히지 못합니다.

드디어 집에 돌아왔습니다. 마당에 내어둔 화분들이 걱정스러웠는데, 다행히 모두 멀쩡합니다. 진입로를 뒤덮은 잡초들만 쳐주면 얼추 갈무리는 되겠습니다. 앞쪽 덤불을 걷어내자 반가운 얼굴이 보입니다. 지난봄, 순만 똑 따다 데쳐먹고 새카맣게 잊었던 엄나무들입니다. 세월을 먹고 크는지 허리가 손가락만 하던 녀석들이 제법 굵어져 나무 티를 냅니다. 그새 식구도 불려서 가족을 이뤘습니다. 여행을 떠날 때만 해도 푸른 잎들을 달고 있었는데 이젠 다 사위어 앙상한 몸뚱이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목욕탕에 들어선 일가족처럼 귀여워 보입니다. 낫을 든 채 그 앞에 서서 여행을 떠올립니다. 다녀온 여행 말고, 앞으로 이어갈 여행 말입니다. 이번엔 엄나무가 잔소리머신을 돌립니다. 너무 빨리 달리지 말랍니다. 자기들처럼 진득하게 한 자리에서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답니다. 너무 많은 짐을 지지 말랍니다. 잎을 덜어야 영양을 모았다가 새 순을 낼 수 있다고요. 제 식구들처럼 좋은 동무들과 함께 가야 한답니다. 그래야 가시가 돋친 몸끼리 부대껴도 덜 아프다고요. 

나벽수는 전문 번역가이자 작가, 기자다. 「천로역정」, 「래디컬」, 「닉 부이치치의 허그」 , 「팀 켈러, 결혼을 말하다」 등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번역했으며, 「벽수 씨의 교회 원정기」, 「까칠한 벽수 씨, 목사에게 묻다」(공저)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