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꼬마리   illust 장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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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래 넷이서 보는 SNS 단체 대화방에 옛 사진들이 떴습니다. 한 친구가 어디서 찾았는지 희한한 그림들을 스무 장 넘게 올려놓고 들어와 구경하라고 성화입니다. 과거를 더듬는 걸 보니 얘도 나이가 드는가 보다고 구시렁거리면서도 눈으론 연신 사진을 찾습니다. 난생처음 동해바다를 보았던 날, 졸업을 앞두고 캠퍼스 구석구석을 돌며 폼을 잡던 날, 동아리방 앞에서 족구에 열을 올리던 날의 장면들이 사진에 들어 있었습니다. 후덕하고 기름져진 지금과는 비할 바 없을 만큼 날씬하고 파릇한 젊은 애들이 거기 있었습니다. 보통 이런 사진을 보면 젊음이 아쉽다든지 그땐 참 괜찮았다든지 하는 감상에 젖는 법인데, 어찌 된 셈인지 ‘참 못났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고등학교 1학년 어느 날부터 시작된 ‘자각’이니 새삼스러울 바는 아닙니다.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고 까불던 시절은 그해 여름에 끝났습니다. 학생회 예배실에서 정신없이 수련회 준비를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가 거울에 비친 나와 딱 마주쳤습니다. 박박 깎은 짱구머리, 여드름이 촘촘히 들어앉은 얼굴, 번들거리는 개기름에 땀까지 진저리가 날 만큼 못생긴 아이가 거기 서 있었습니다. 난데없이 대한 실상은 마음에 간직하고 있던 초상과는 딴판이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전후 사정을 들은 어머니는 중상을 입고 쓰러진 아들에게 확인 사살을 가했습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못 생긴데다가 머리까지 나빠 봐라.” 상황은 깔끔하게 정리되었습니다. 제작자도 인정하는 자타 공인 못난이임이 분명해진 겁니다.

새로운 자각은 “나는 누구인가?”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거창한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남과 구별되는 나만의 정체성을 세울 기둥이 필요했습니다. 외모로는 승산이 없다는 게 분명해졌으니 평생 삶의 방편으로 삼을 만한 무언가가 있어야 했습니다. 공부를 해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실패했습니다. 웬만큼은 따라갈 수 있었지만 탁월해지진 못했습니다. 손으로 이것저것 조물거리는 걸 좋아하고 잘한다는 소리도 더러 듣던 터라 그쪽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기타를 배우는 데 열을 올렸습니다. 그땐 기타 하나만 뚱땅거릴 줄 알아도 뭇 시선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패했습니다. 코드를 짚으며 음을 따라가는 수준에서 한 걸음도 더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림도 그리고 웅변도 했습니다. 실패했습니다. 학교 안에서는 펄펄 나는데 그보다 넓은 무대에 나가면 기운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밖에도 이것저것 수많은 재주들을 피워봤지만 재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기껏해야 재주꾼이지 달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솜씨로 정체감을 찾고 날 세우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쯤 되면, 남은 기둥이라곤 “괜찮아 넌 속이 예쁘잖아” 어쩌고 하는 것뿐인데, 그런 되도 않은 말로는 남은커녕 스스로도 속여 넘기기 어렵습니다. 내 속이 어떤지는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아는 터라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허접했고 그 이후에도 별반 나아진 게 없습니다. 오늘 하루만 거꾸로 더듬어 봐도 속사람의 수준을 가늠할 증거들은 차고 넘칩니다. 아침 일찍 외출하다 개울가에 널브러진 쓰레기들을 보았습니다. 어제 탁족을 하고 간 가족들이 남긴 흔적임에 틀림없습니다. 짜증이 솟습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들이 밉습니다. 좌회전 차량이 길게 늘어선 교차로, 뻥 뚫린 옆길을 신나게 달려온 차가 코앞에 머리를 들이밉니다. 이렇게 얄미울 수가! 차를 바짝 붙여 침입을 막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이내 후회합니다. 이깟 게 뭐라고 이렇게 악다구니를 쓰고 있는지.
예수님을 감격적으로 만나고 무려 30년이나 지났는데, 성장의 징후가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주님을 진실로 믿는 건 전신 가운데 딱 한 군데, 입뿐입니다.
말로 고백하지만 행동으로 입증하지 못합니다. 사소한 일에도 걱정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분이 내게 가장 선한 것을 주셨고, 주시고, 주실 거라고 머리로 믿지만 손발로 부정합니다. 하나님이 더 지혜로우시다고 말은 하지만 중요한 계획을 세울 때는 “외부인 출입금지(주님 포함)” 딱지를 붙이고 골방에 틀어박혀 궁리에 궁리를 거듭합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본향이 기다리고 있다고 고백하지만 마치 여기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더 편하고, 귀하고, 나은 무언가를 찾으려 발버둥 칩니다. 불편은 눈곱만큼도 참지 못하고 손에 쥔 걸 놓치면 그렇게 아깝습니다. 이런 판에 무슨 염치로 신앙을 정체성의 근거로 내세우겠습니까?

영락없이 도꼬마리 꼴입니다. 얘처럼 튀지 않는 풀이 있을까요? 예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고운 꽃을 피울 줄도 모릅니다. 넙데데한 잎은 끄트머리만 뾰족하고 주위에 톱니를 둘렀습니다. 온몸이 털투성이입니다. 하다못해 이파리에도 털이 났습니다. 곱지 않으니 화분에 들어앉아 총애를 누리기는 아예 글렀습니다. 들판이나 길가, 산에서 마구 자랍니다. 공부 많이 한 분들은 이 풀에 훌륭한 효능이 많다고들 합니다. 알레르기에서 암까지 안 듣는 질환이 없답니다. 하지만 라면에서 탕수육까지 수십 가지 메뉴를 다 파는 맛집을 본 적이 없습니다. 만병통치라는 말이 여기저기 조금씩 도움은 주지만 딱 부러지는 효능은 없다는 소리로 들립니다.
그래도 이 친구가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나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은 오직 하나, ‘악착같이 달라붙을’ 줄 아는 덕분입니다. 도꼬마리의 타원형 열매에는 갈고리 모양의 가시가 달렸습니다. 짐승 가죽이든 인간의 옷이든 한번 달라붙으면 좀처럼 떨어지질 않습니다. 주인이 멈추는 곳에 함께 서서 뿌리를 내리고 새 삶을 시작합니다. 주인만 잘 만나면 잘난 친구들도 넘보지 못하는 시원한 개울가에도, 잘 다듬어진 잔디밭에도, 그밖에 어디에도 자리를 잡고 삶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어차피 못난이 도꼬마리 부류라는 걸 알았으니 생존 전략도 그 비슷하게 마련해야 할 성싶습니다. 좀 면구스럽기는 하지만 일단 믿음직한 주인을 골라 붙들고 늘어지는 쪽으로요. 관건은 주인의 됨됨이가 어떠하냐는 점인데, 그거야 이러니저러니 할 게 뭐 있겠습니까? 두말하면 입만 아프죠. 

나벽수는 전문 번역가이자 작가, 기자다. 「천로역정」, 「래디컬」, 「닉 부이치치의 허그」 , 「팀 켈러, 결혼을 말하다」 등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번역했으며, 「벽수 씨의 교회 원정기」, 「까칠한 벽수 씨, 목사에게 묻다」(공저)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