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큼 지겨워 보이길래. 어떻게 하면 월 오륙백을 벌면서도 저렇게 지겨워 보일 수가 있을까? 성실한 무기 징역수처럼 꾸역꾸역, 여기서 제일 지겹고 불행해 보이는 사람.
그래서 그랬어요.”
 희망이라고는 일절 찾아볼 수 없는 얼굴에 초점 없는 눈동자로 이런 ‘무례한’ 말을 내뱉은 사람은 고작 스물한 살, 이제 갓 청소년기를 마친 ‘지안’이다. 더구나 이 거침없는 말은 또래나 만만한 사람을 향한 평가가 아니었다.
 자신이 인턴으로 있는 한 건축회사의 부장, 그것도 45세 어른인 ‘동훈’에게 한 말이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한 장면이다.
정황을 알고 나면 더욱 기가 막힌다. 회사 내 정치적 갈등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지안이 회사의 대표와 ‘딜’을 하고 동훈을 회사에서 ‘잘라’ 주겠다면서 벌인 일이었다. 물론 동훈은 내막을 전혀 모른다. 다만 어제 저녁, 고마운 일이 있어 밥도 사고 술도 사 주고 돌아서는 길에 느닷없이 지안이 동훈을 안고 키스를 했던 것이 황당했고 어이없어서 이를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밤새 생각을 한 동훈은 출근하자마자 회의실로 지안을 불렀다. 블라인드를 활짝 열고 ‘공식적’으로, 그러나 사람들은 듣지 못하는 상황에서 따끔하게 경고를 하려 했다. “너, 내가 만만해 보이냐? 잘못 전달된 뇌물을 어찌해야 하나 절절매는 모습을 보니 함부로 해도 괜찮을 사람으로 생각했니? 재미있니? 나이 든 남자를 가지고 노니?” 이건 도입부에 불과했다. 이어서 본격적으로 ‘어른의 충고’를 하려고 했는데, 지안이 불쑥 저렇게 답했던 거다. 마치 무기 징역수처럼 그렇게 꾸역꾸역 하루를 성실하게 버티는 모습이 지겨워 보이고 불행해 보였노라고. 그래서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탈이었다고. 그럼 좀 재미가 있어질까 해서. 그런데 하나도 재미가 없단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동훈은 어찌 대응해야 할지 머리가 하얘졌다. 물론 동훈에게 키스를 했던 날, 지안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동료에게 미리 부탁해서 이 장면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다. 조만간 회사에서 가장 입이 가벼운 여직원 눈에 띄게 이 사진을 슬쩍 흘릴 예정이다. 한참 어린 여직원과의 부적절한 관계, 해고당하기에 좋은 명목이니까.
이렇게 한 장면의 배경을 풀고 나면 도대체 이 이야기로 무슨 묵상을 하려나, 걱정도 될 만하다. 더구나 스물한 살 미혼녀와 마흔다섯 살 유부남이라니! 충분히 색안경을 끼고 볼 만한 설정이다. 실은 그래서 드라마 제목만으로도 이미 논란이 있었다. ‘나의 아저씨’라니! 20세기 낭만적 로맨스물의 의미라면 그야말로 ‘생존’이 시대의 키워드인 요즘에는 철 지난 소리요, 21세기 ‘육체 문화’ 속 원조교제를 다룬 것이라면 가뜩이나 반인륜적인 관계들이 가득한 요즘 시절에 드라마까지 합세할 이유가 무엔가. 아직 드라마가 한창 진행 중이니 더 지켜보아야 할 일이지만, 지금까지의 시청 분량만 보아도 동훈과 지안의 관계를 기존의 편견 어린 시선으로 보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리 안심하는 중이다.

무엇보다 동훈이 그야말로 제대로 된
‘어른’이기 때문이다.
그의 응시가, 그의 삶이, 그의 가치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우려하는 ‘아저씨 됨’의
문화적 전제들과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동훈에게는 일찌감치 구조조정을 당하여 집에서도 쫓겨나고 늙은 어머니 집에 얹혀사는 형 상훈이 있다. 뭐라도 일거리를 찾아 사람 구실을 하려고 작은 청소업체를 차렸고, 궂은일을 마다 않는 중년의 아들이 안타깝던 어머니는 도시락을 싸들고 아들의 일터를 찾았었나 보다. 그런데 하필 술이 잔뜩 취한 건물주가 별것 아닌 일로 상훈에게 갑질을 하는 장면을 목격하셨단다. 나중에 건물 구석에 놓인 보온도시락을 보고서야 어머니가 다녀가신 걸 알고 형은 가슴을 쳤다. “집에 갔더니 어머니가 늘 하는 잔소리를 안 하시더라고. 그러고 심지어 나보고 웃으시는 거야. 노친네가 날 보고 웃다니. 분명히 그 상황을 보신 게 분명해.” 그러며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형을 보며 마음이 무너졌다. 형도 가엾지만 자식이 남 앞에 무릎 꿇는 것을 보신 어머니의 상한 마음을 치유해야 했다. 그런데 이를 위한 동훈의 해결책이 그야말로 ‘어른’의 것이었다. 과일 바구니를 하나 들고 그 건물주를 찾아가기에, 설마 저걸 ‘선물’이라고 들이밀고 부탁을 하려나 했다. 그런데 웬걸, 건물주의 책상 위에 과일 바구니를 턱하니 올려놓고 동훈은 이렇게 말했다. 먹고살다 보면 치사한 일도 당하고 무릎도 꿇을 수 있다고. 자기도 그러며 산다고. 하지만 그래도 버틸 수 있는 이유는 가족은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형이 당신 앞에 무릎 꿇은 걸 보셨다고. 그건 동훈이 그에게 어떻게 해도 된다는 의미라고 경고하더니 작은 망치를 꺼내 들었다. 으악, 설마? 그러나 기우였다. 구조건축사인 동훈은 건물주의 사무실 벽을 두드리며 건축법을 어긴 부분을 하나씩 드러냈다. 이거 다 고소당하고 망하든지 아니면 어머니 집을 찾아가 사과하라고 선택을 종용했다. 답이야 뻔한 거 아닌가? 결국 그 건물주는 동훈이 준비한 과일 바구니를 들고 아주 공손하게 어머니와 형에게 사과했다.

동훈을 회사에서 제거할 수 있는 빌미를 잡고자 그의 휴대폰을 도청하던 지안이 이 모든 정황을 들어버렸다. 그리고 몇 년 전 자신의 상황이 떠올라 눈시울이 불거졌다. 말 못하는 할머니와 둘만 사는 지안에게 사채업자 ‘아저씨’가 폭력을 행사했던 일이었다. 맞는 것도 서러웠지만 할머니 앞이라서 더욱 아팠다. 어떻게든 동훈을 ‘보내버리려고’ 그에게 밀착 감시를 하던 지안은 이렇게 동훈의 ‘올곧은 어른스러움’을 목격하면서 어느덧 서서히 그를 챙기기 시작한다.
드라마 애청자들이 ‘나의 아저씨’가 아니라 ‘나의 아가씨’라고 웃는 이유이기도 하다. 성실하기만 하지 변칙도 꼼수도 모르는 동훈을,
나이만 어리지 세상 좀 살아본 지안이 이리저리 돕는 모습이 보여서다.
 
힘겹게 날숨을 쉬던 동훈의 숨소리가 멈추자
놀라서 뛰어가는 지안을 보며, 이 둘은 남녀 사이를 떠나,
젊은이 중년 나이 차이를 떠나, 인간애로 서로를 성장시키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개 중년의 아저씨가 스무 살 갓 넘은 아가씨를 응시할 때 어디를 볼까? 답하지 않아도 우리는 짐작을 한다. 그러나 지하철 안에서 지쳐 졸다가 우연히 지안의 뒷모습을 발견한 동훈이 응시한 지안의 몸 부분은 맨발이었다. 운동화 안에 처량하고 춥게 드러난 맨발. 아, 춥겠다. 양말 신을 정신도 없이 사는 건가? 여느 ‘아저씨’의 시선이 아니다. 지켜줄 어른이 없어, 혹은 닮고 싶은 어른이 없어, 너무 일찍 철이 든 지안에게 동훈은 그렇게 건강한 어른의 시선과 행동으로 지안에게 다가갈 것 같았다.

“착하다.” 할머니가 달구경을 하고 싶다는 말에
동네 마트에서 카트를 훔쳐 낑낑대며 할머니를 운반하는
지안을 도우며, 동훈은 그렇게 말했다.
“상처받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버려요.”
믿을 만한 어른, 자신을 지켜 주는 어른을 만난 적이 없어
너무 일찍 커버린 지안에게 동훈은
어른의 존재감을 줄 거 같은 예감이다.
어쩌면, 지안이 자라는 모습을 보며,
혹은 지안과 인간 대 인간의 연대감 속에서
동훈도 ‘꾸역꾸역’ 살던 자신의 일상이
조금은 달라지는 경험을 할지도 모르겠다.
주변에서 너무 빨리 어른의 세계를 알아버린 청춘들을 본다. 건강하고 성숙한 어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권모술수와 중상모략이 판치는 그런 세상을 배운다는 말이다. 도대체 어쩌려고 세상이 이리 가나 우려하는 목소리도 많이 들린다.

그럼에도,
결국 세상은 사람이 바꾸는 거다. 어른이 어른의 응시를 할 때,
어른의 행동을 할 때,
어른의 책임을 질 때,
자라나는 청춘은 마음을 열고 보살핌의 능력을 배울 거라고 믿는다.

혀를 끌끌 차며 젊은이들을 탓하기 이전에, 물어야 하겠다.
우리는 정말로 ‘어른’인가? 겨우겨우 버티며 살아가는 청춘을 응원하고 지지하고 격려하며, ‘착하다!’, ‘용하다!’, 말해 주고,
‘고기 먹어라.’, ‘좀 쉬어라.’ 숨통을 틔워 주는 그런 ‘어른’인가?
가정의 달 5월에,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를 보며 드는 생각이다. 

백소영은 이화여대와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사회윤리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강의로, 글쓰기로, 그리고 대중 특강으로 사람을 만나면서 삶을 배우고
삶에 관여하는 구체적인 신학을 하려고 노력하며 산다.
저서로 「드라마틱」, 「엄마 되기, 힐링과 킬링 사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