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소로고

2018  APR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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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바다를 건널 때 잡는 밧줄과도 같습니다.

김재원의 마음 독서
신앙은 바다를 건널 때 잡는 밧줄과도 같습니다.99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

사람들은 고전에서 삶의 지혜를 얻는다. 쓰인지 수백 년 지난 책에도 인생의 교훈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오래 묵은 것일수록, 오랫동안 사랑 받아 온 것일수록 그 가치는 빛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역사도, 인간의 경험도 시간의 더께가 쌓이면서 그 가치도 함께 쌓여 왔을 것이다.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도 오래 살아온 어르신들을 현자라고 부른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백년을 살아오면서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연구해 온 철학자라면 그 생각의 깊이도 남다르지 않을까?
백년을 산다는 것은 더 이상 인류의 꿈이 아닌 현실이다. 1920년에 태어나 백년 가까이 살면서 대한민국 근현대 격동기를 함께해 온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여전히 정정하다. 건강 비결이 지금도 일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은 여전히 책을 읽고, 책을 쓰고, 혼자 외출하고, 두세 시간 강의도 거뜬해 보인다. 하나님은 그의 백년 인생을 어떻게 인도하셨을까? 신앙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고, 그가 바라본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최근에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라는 책을 낸 김형석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를 그분이 살고 있는 동네 교회 찻집에서 지금 만난다.

취재 김재원 정리 이승연 사진 한치문


교수님께서는 그동안 책을 많이 쓰셨는데요. 교수님께 책은 어떤 의미인가요?
내가 책을 쓰는 이유는 나의 생각, 사상, 신앙 등을 독자에게 전해 드리고, 독자들의 반응을 내가 받아서 내게도 도움이 되고 독자에게도 도움이 되어 서로 성숙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특별히 두 가지 목적이 있어요. 하나는 ‘나는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함입니다. 스스로 이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답게 살지 못해요. 여기서 ‘무엇을 위해서’라는 건 인생관이자 삶의 목적이죠. 인생에는 길도 많고 선택도 많아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가치관이죠. 나는 책을 통해 그걸 나누고 싶은 거예요. 또 하나의 목적은 치유입니다. 환자가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해도 의사의 눈으로 보면 문제가 있거든요. 우리 사회도 병이 있어요. 한국 사람들의 가치관과 인생관에 깔린 병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서 치유해야 합니다. 모든 국가에는 세 가지 책임이 있어요. 하나는 문맹이 없어야 해요. 기초교육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사실 문맹이 많은 사회는 아무리 좋은 종교가 들어가도 미신이 되고 말죠. 둘째는 절대 빈곤이 없어야 해요. 적어도 세 끼 밥을 못 먹는 사람은 없어야 합니다. 셋째는 병들었는데 치료 못 받는 사람이 없어야 해요. 인간 사회가 존재하기 위해서 이 셋은 국가가 책임져야 합니다. 예수님도 복음 전파가 목적이었지만, 먼저 병도 고치시고, 가난한 사람 배불리 먹이시고, 회당에서 가르치시잖아요. 그만큼 중요한 거지요. 우리 사회가 이 세 가지는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해도, 아직 우리 사고방식에 남아 있는 한국병이 무엇인지 발견해서 치유하는 것이 필요하죠. 책이 아무 것도 아닌 거 같지만, 그 문제를 해결해 주거든요. 물론 여러 경로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는데,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책을 통해서 도움을 주자, 그런 생각으로 책을 씁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이 책은 어떤 마음으로 쓰셨는지요?
이 책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먼저 내 인생과 신앙에 대해서 썼어요. 또 하나는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바라보는 한국교회의 모습이 어떠한지에 대해서 썼습니다. 자연스럽게 내 인생이야기가 들어 있죠. 나는 중학교 때까지는 교회에서 자랐어요. 불만은 없었어요. 내가 책도 좀 읽기 시작하고 좀 더 좋은 신앙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니까, 교회에서는 얻을 수가 없더군요. 목사님 설교가 늘 비슷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성경을 읽어보자 마음먹었죠. 그리고 기독교 관련 책도 많이 읽었어요. 그 당시 나로서는 부담되지만 철학 공부를 하게 되면서 신학 책도 읽고, 기독교 사상가 책도 읽고, 교회사 인물에 대한 책도 읽고 그랬어요. 나 나름대로 신앙을 키운 거죠. 그때는 다들 훌륭한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목사가 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아버지는 내가 목사가 되기보다는 신학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아버지가 책을 많이 읽으시다 보니 그런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도 그 꿈을 가지고 자란 거죠. 기독교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친구 중에 목사가 된 사람이 많은데, 내가 성경을 읽다 보니까 꼭 목사가 되어야 할까,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철학 공부를 하다 보니까 문제는 목사나 신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크리스천다운 크리스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먼저 크리스천다운 크리스천이 되고 나서 목사도 되고, 신학자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즈음에 같이 공부하던 불교학자 한 분이 저더러 이러는 거예요. “김 선생이 지금 하는 일을 쭉 하다가, 세월이 지나 한국교회에는 어떤 목사도 있었고, 어떤 신학자도 있었다고 할 때, 평신도 가운데도 이런 사람이 있었다, 하는 인물로 꼽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요. 그 말이 생각나요. 어떻게 살다보니까 신학 공부를 못 하고, 철학 교수로 있게 됐어요. 그래도 살면서 크리스천다운 평신도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계속 갖고 살았지요. 스님이 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는데, 신부나 목사가 쓴 책은 베스트셀러가 없는 건 왜 그럴까 생각해 보면, 목사나 신부는 교리 이야기를 하지만 스님은 인생을 이야기하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예수님은 인생을 이야기하셨지, 교리를 이야기하지 않았거든요. 나 같은 사람이 책을 쓰면 교리가 아니라 인생 이야기를 쓰는 거잖아요.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이 어떤 사람의 책을 읽으면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겠느냐, 할 때 오히려 나 같은 사람이 쓴 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신앙

교수님, 100년 가까이 살아오신 인생에서 신앙은 어떤 의미인가요?
난 열네 살 때, 내가 신앙을 가진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신앙을 넣어 주셨어요. 열네 살이 채워지는 크리스마스 때 나도 신앙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죠.
우리 크리스천 입장에서 보면  20세기 가장 큰 문제는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이 아니고, 공산주의 가치관과 기독교 가치관의 대결이에요. 우리 동포가 북한에 있지만, 북한 정권이 핵을 만들었다는 것은 기독교 역사적으로 가장 큰 죄악이에요. 문제는 그 과정에서 북한 정권이 북한 국민들을 다 버렸다는 거죠. 종교도 못 갖게 하고 말이죠. 그 역사적인 악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으면 우리 민족이 축복을 못 받아요. 히틀러의 만행을 기독교 국가인 독일이 책임을 못 졌거든요. 그런데 회개하니까 독일이 다시 살아났죠. 우리도 북한 정권은 용납해서는 안 되지만 북한 동포는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북핵 문제가 빨리 해결되어야 해요. 
아무튼, 나는 일제 강점도 겪었고, 전쟁도 겪었는데요. 그 어려운 시절을 지나면서 신앙이란 뭔가 생각해 보면 ‘밧줄’인 거 같아요. 옛날 내가 일본에서 유학을 했을 때, 부산에서 연락선을 타고 일본 시모노세키까지 갔거든요. 해협이라서 파도가 심해요. 내게 있어서 신앙은 부산에서 일본 시모노세키까지 연결된 밧줄과도 같은 겁니다. 내 인생은 여기서 출발해서 저기까지 가는 건데, 밧줄 없이는 도저히 못가요. 멀기도 할 뿐더러 파도도 치니까요. 그 밧줄이 있으니까 힘들면 매달리기도 하고, 모르는 길도 안내받고, 파도도 이겨낼 수 있거든요. 내게 신앙은 열네 살에 출발해서 99세까지 오는 동안에 세상 바다를 헤엄쳐서 갈 때 붙들고 있는 밧줄이에요.


인생

교수님이 살아오신 100년 인생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와 함께한 격변의 인생입니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시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조금 철학적인 이야기를 하면, 모든 인간은 궁금증을 갖고 살아요. 내 인생은 결정지어진 운명인가? 아니면 내 자유인가? 이 질문이거든요. 역사적으로 보면 답은 없습니다만 인도 사람의 업이라는 카르마는 운명론이고, 동양도 원인과 결과의 운명론이죠. 서양의 그리스도 철학도 운명론이지요. 독일 철학자 니체의 할아버지는 목사고, 아버지도 목사였어요. 할머니는 목사 딸이고, 어머니도 목사 딸이었죠. 니체는 크리스천 가정에서 자라서 무신론자가 되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마지막으로 믿은 게 운명이에요. 니체는 자연 질서나 운명에 맞서야 개인의 운명으로 돌아간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운명이라는 큰 울타리 속에서 자유를 찾아가는 것이 인생인데,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유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잘 알아요. 죽음 자체가 한계이니까. 그렇다면 운명도 자유도 아니란 말이죠.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인생이 섭리입니다. 우리가 북한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고, 인간에게 맡기면 전쟁 가능성도 있지만, 하나님 사랑의 섭리라면 해결되기 때문이죠. 신앙은 바로 섭리를 믿는 겁니다. 나는 6·25전쟁 때 중학교 교사였어요. 피난 가 있으면서 목사님 안 계신 교회를 세우기도 했어요. 목사는 아니었지만 교인들하고 행복하게 지냈어요. 그러다 학교로 다시 돌아오면서 교회를 떠나게 됐죠. 그때는 온 민족이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전쟁으로 인해 피난 가 있다가 돌아오게 되니까 내 삶도 당연히 변화가 있었죠. 그 당시 바닷가에서 기도하다가 떠오른 생각이 지게꾼이에요. 당시 서울역에 내리면 지게꾼들이 쭉 서 있어요. 피난 갔다 돌아온 사람들이 보따리를 지게꾼에게 맡기고 목적지를 말하거든요. 지게꾼에게는 자기 목적지가 없어요. 짐을 골라 싣는 것도 아니죠. 주인이 주는 대로, 말하는 대로 가는 거예요. 나도 지게꾼처럼 새 출발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해방 직후에도, 전쟁 직후에도 내 인생이, 우리 민족이 달라지지 않으면 희망이 없었어요. 그때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나는 거죠.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도 모르게 대학으로 갔어요. 내가 연세대학교 갈 때, 내 마음의 기도가 뭔고 하니, 주님 포도밭에 가서 머슴으로 섬기겠다고, 내 명예와 권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 머슴으로 살겠다고 했죠. 나는 학장도, 총장도 못하고 살았는데, 이제 와서 보니 연세대학교에 누가 있었는가 할 때 내가 손에 꼽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일은 주님이 맡겨 주신 거다, 신앙은 섭리를 믿는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죠. 내가 철학 공부를 하며 학자다운 학자로 살자 마음을 먹고 나서 내 마음에 자리 잡은 가치관이 뭔가 하고 보니 성실하다는 거예요. 그 자세를 잃어버리면 학자도 안 되고 예술가도 안 되고, 남는 게 없어요. 성실하게 살아야 해요. 성실한 사람은 악마도 유혹하지 못하고, 성실한 사람은 하나님도 버리지 못한다는 말이 있어요. 중세에 그런 말이 나왔다는 건 당시 기독교 사회 속에서도 성실한 사람 찾기가 힘들었다는 이야기죠. 성실한 사람은 첫째 조건이 겸손하다는 겁니다. 가끔 예수님보다도 당당한 목사님들 보면 안타깝게 느껴져요. 또 하나는 경건이에요. 우리에게는 그게 신앙이거든요. 내가 책에서 가장 많이 말하는 것이 뭐냐면, 율법에서 벗어나는 게 예수님의 교훈이고, 교리에서 벗어나는 게 종교개혁이라는 거죠. 교회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을 교리로 받아들이지, 진리로는 받아들이지 못해요.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내 인생관이 되고 가치관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이 내 인생관이 되고 가치관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바로 신앙이에요. 지금 돌아보면 역사적으로 힘들었어도 이런 성실, 경건 같은 신앙심이 나를 지켰고, 하나님의 섭리가 내 삶을 인도하신 겁니다.

 

 


교회

교수님께서는 요즘 교회를 어떤 마음으로 보시나요?
교회를 걱정해서 하는 말입니다만 크리스천들은 나도 모르게 두 가지 잘못을 저지르고 있어요. 하나는 이중적인 신앙이에요. 이중적인 사람은 세상이 믿지를 않아요. 그런데 나도 그래요. 예를 들어, 교회 설교하러 갈 때는 기도하고 가고, 바깥 사회 강의하러 갈 때는 그냥 준비한 대로 가면 되는 줄 알았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내가 이렇게 잘못 살았고, 교회가 나에게 잘못 가르쳤구나 생각했어요. 오히려 예수님의 뜻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는데 말이죠. 교회 안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한 가지 잣대를 가지고 살아요. 그런데 우리는 항상 두 가지를 갖고 살잖아요. 삶과 신앙에 다른 잣대를 적용하다 보니 이중적이 될 수밖에 없죠. 또 하나의 잘못은 기독교 안에 편 가르기가 너무 많아요. 특히 한국교회 안에는 가득 찼죠. 예수님이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편 가르기 하지 말라는 거거든요. 편 가르는 것은 상대편을 적으로 만드는 거예요. 남을 원수로 만들면 안 됩니다. 최근 미국에서 청소년들에게 설문 조사를 했어요. 왜 교회를 떠나느냐고 물었더니, 교회가 잘못을 너무 많이 해서 교회에 가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우리 집안에도 마음은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교회는 못 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교회에 가보면 사람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가지고 싸운다고 하더군요.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거죠. 성경을 이해 못한 거고요. 성경은 원래 구약이 있고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 신약이 있는데, 구약의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에요. 구약 율법을 보면 의로운 사람이 구원 받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걸 뒤집거든요. 바울 선생도 로마서신에서 율법은 너희 죄를 알게 해 주는 거고, 사랑과 믿음 없이는 구원 못 받는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정의만 가지고 살려고 하지, 사랑을 놓친 거예요. 정의의 하나님은 구약이고, 사랑의 하나님은 신약인데, 사랑이 정의보다 귀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신앙의 기본 조건인데, 그게 없어요. 나도 정의 편이었거든요. 정의로운 인생은 부끄러움도 없고, 하나님도 정의를 제일 좋아하시는 줄 알았어요. 내가 인생을 많이 겪고 나서 눈물도 흘려보고 고통도 겪고 보니까, 정의는 사랑으로 들어가는 현관이란 걸 알았어요. 교회는 지금 그 현관에 머물고 있는지도 몰라요.

 

 


한국교회

그러면 한국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 이 나라의 큰 문제가 교회가 커지면서 교회주의에 빠졌다는 겁니다. 교회 자체가 목적이고 교회가 끝이거든요. 그건 아니에요. 교회는 기독교 공동체의 대표고요. 크리스천이 모이면 다 공동체예요. 거기에 예수님의 정신이 있으면 생명이 있는 거고, 예수님의 정신이 없으면 생명이 없는 거죠. 그러면 예수님의 정신은 뭐냐? 그건 바로 교리가 진리가 되는 것이고, 정의가 사랑으로 바뀌는 것이고, 교권이 인권으로 바뀌는 거예요. 나도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교권이 아니고 인권이라고 말하면 목사님들이 이해를 못 하셔요. 인간의 존엄성, 양심의 존귀성,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걸 몰라요.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는데,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는데도 그걸 몰라요. 그만큼 그릇이 작다는 얘기죠. 내가 보기에는 어떤 때는 우리 목사님들의 그릇이 사회 지도자들의 그릇보다 작을 때가 있어요. 도산 안창호 선생, 고당 조만식 선생은 평신도이지만 국가와 민족에 대한 그릇이 크니까 존경받죠. 성경을 보면 다 아는 거지만 예수님이 교회는 베드로에게 맡겼고, 신학은 바울에게 맡겼고, 사회생활은 요한에게 맡겼거든요. 바울 선생은 구약의 노예가 되었던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신앙을 가지면서 완전히 예수님의 생각과 같아졌어요. 그래서 율법과 계명은 네 잘못을 가르쳐 주지만 구원을 이루게 하지는 못한다, 예수님의 사랑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했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이야기한 겁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우리가 계속 따르고 있고요. 그런 점에서 볼 때 교회가 분열이 되고 화합을 못하고 있는 이유는 같은 뿌리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봐요. 기독교는 크게 보면 예수님의 뜻과 교훈으로 이뤄진 세계 인류 역사의 가장 큰 나무인데, 천주교 가지도 있고, 개신교 가지도 있고, 여러 열매를 맺은 거죠. 그런데 나무뿌리는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잊고 사는 거예요. 큰 나무의 뿌리가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면 이렇게 서로 싸우는 건 말도 안 되는 겁니다. 힘을 합해서 일할 줄 모르면 큰 나뭇가지로서의 자격이 없는 거죠. 요즘 가난한 교회 목사님들이나 은퇴하신 목사님들의 생활비를 단일 교회들은 책임지지 못하거든요. 그런 건 교단에서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생활비가 부족한 목사님은 교단에서 도와줘야 해요. 또 큰 교회들이 기도원 따로 짓지 말고, 교단에서 지역별로 하나 짓고, 교회 모두가 사용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사람들 도와줄 때는 마음껏 도와줘야 하는 거죠. 일본과 캐나다는 기독교가 하나예요. 천주교나 성공회는 따로 있지만 개신교는 무조건 캐나다 기독교예요. 일본 기독교도 마찬가지고요. 그만큼 신앙 수준이 올라간 겁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도 자꾸 나누고 또 나누잖아요. 요즘 신천지 문제가 자꾸 생기는데요. 일본에는 그렇게 신이 많아도 사이비 종교가 기독교에서 나오는 경우가 없어요. 진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죠. 우리나라도 천주교에서는 사이비가 안 나와요. 개신교에서 주로 나와요. 이건 아주 심하게 말하면 목사님들이 교리를 제 멋대로 해석해서 그래요. 교리는 교회를 위한 기본 틀이고, 신앙은 그 위에 있는 거거든요. 진리는 그와 더불어 있는 거고요. 목사님들이 교리를 마음대로 해석하고, 교단별로 교리가 다르다 보니까, 이단 교주들이 나도 할 수 있겠네, 하는 겁니다. 결국 한국교회는 기본으로 돌아가서 진리 위에 올바로 서고, 어려운 사람 돕고, 교인들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사랑으로 도와야 해요. 교회가 우선이 아니라 사람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거죠. 예수님도 이 땅에서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삶은 뭘까요?
관계의 차원을 높이는 겁니다. 공자도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자고 했는데, 처음에는 그 단계로 올라가고, 거기서 우리는 예수님 믿는 신앙으로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자는 거죠. 신앙이 없으면 못 올라가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세워져야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게 되고 그래야 선하고 아름다운 삶도 살 수 있는 거죠.

 

 


끝으로 「빛과소금」 독자들이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질문 하나 해 주시겠습니까?
두 가지 질문인데요. 하나는 ‘오늘도 나 자신을 살피면서 살고 있습니까?’ 또 하나는 ‘오늘 나는 사회를 위해서 무엇을 하며 살 것입니까?’ 이 두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으면 좋겠어요. 나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피고, 사회가 나한테 요구하는 것이 뭔지 책임감을 가지라는 거죠. 하나만 더 하면 ‘기독교가 우리 민족의 희망일 수 있습니까?’ 이 물음은 꼭 생각해 봐야 합니다. 기독교에는 사회적 사명이 있어요. 기독교가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면 교회는 아무리 커도 결국 버림받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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