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한 권의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글 밥·책 밥을 먹은 지도 제법 여러 해 지났고, 책을 읽는 일은 행복에 겨운 일이지만, 글을 쓰는 것은 언제나 피하고만 싶은 일이다. 주제가 무엇이든 글을 쓸 만한 내공을 갖추지 못했기에 그렇다. 글로 쓴 것만큼 온전한 삶을 살아 낼 수 없음에서 오는 간극도 크다. 읽는 만큼은 아니어도, 마음과 정성을 다해 쓴 글만큼이라도 삶으로 살아 내야 하건만, 삶의 괴리는 끝이 없다. 
2010년 타계한 고(故) 리영희 선생은 평생 단아하고 소박한 삶을 사셨다. 후학들에게 평생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상징하는 푯대로 사셨던 리영희 선생은, 또한 스스로 내뱉은 말들을 삶으로 살아 내기 위해 무던히 애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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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먼발치에서 혹은 책을 읽으며 사모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았지만, 선생은 언제나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그렇게 사셨다. 읽는 만큼, 쓴 만큼 살아 내는 일이 얼마나 엄중한 일인가를 그는 몸소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이에게도 삶에서 누린 유일한 사치가 하나 있었다. 사치라고 해서 대단한 그 무엇을 상상하지는 마시라. 노모를 모시느라 변변한 책상 하나 없이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 등 시대의 등불을 밝힌 책들을 초라한 밥상에서 써 내려간 선생이다. 그런 리영희 선생에게 오직 유일한 사치는 바로 좋은 만년필로 글을 쓰는 일이었다. 서강대 손호철 교수는 리영희 선생을 추모하며 선생의 가르침 하나를 자신의 책에 이렇게 썼다.
“글은 자신의 피로 쓰는 거야. 그러니 내가 직접 나의 피가 펜에 들어가는 것을 눈으로 보듯이 경건한 마음으로 잉크를 넣고 펜촉을 닦고, 잉크가 다 소모되면 내 피가 그만큼 나갔구나 생각하고 다시 경건한 마음으로 잉크를 넣고 해서 써야지.”
영혼이 없는, 대량 생산된 소모품인 볼펜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생명 없는 글을 쓰는 것에 다름 아니다. 컴퓨터가 일반화되지 않았던 때, 아니 컴퓨터의 존재 자체도 몰랐을 때였으니 당연히 필기구의 대명사 볼펜이 등장했을 터. 볼펜은 아니지만 키보드를 눌러 글을 쓰는 나는 지금, 무참하다. 사실 더 중요한 말은 볼펜이 아니라 “글은 자신의 피로 쓰는 거야”라는 일성이다. 한 자 한 자 마음과 정성, 아니 생명의 피를 흘리면서 써 내려간 리영희 선생의 글들은 한국 사회를 밝히는 하나의 등불이 되었다.
리영희 선생이 만년필을 고수했다면, 「남한산성」의 작가 김훈은 오로지 연필이 좋았다. 매일 아침이면 연필을 정성스레 깎는 일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굳이 연필을 고집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기계라면 질색이야. 기자 생활을 할 때 컴퓨터를 한 번 써 보려고 했는데 실패했어. 키보드를 치는 느낌이 싫더라고. 내가 연필을 고집하는 건, 맘에 안 들면 지우고 다시 쓸 수 있기 때문이야. 볼펜이나 만년필로 쓰면 지울 수가 없잖아. 나는 연필로 원고지를 꾹꾹 눌러 쓸 때의 느낌이 좋아.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그 힘 말이야.”
기실 연필은 핑계일 뿐이다. 그는 단어 하나, 때론 조사 하나를 위해 수개월의 시간을 연필을 깎으며 버텼다. 그렇게 “한국 문단의 벼락같은 축복”은 탄생했고, 지금도 많은 독자들이 그의 새 작품을 기다린다.
판타지의 고전인 「반지의 제왕」으로 유명한 J. J. 톨킨은 「반지의 제왕」과 「실마릴리온」을 연작으로 생각해 함께 출판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아서, 톨킨은 동시 출간이 불가능하다면 가까운 시일 안에 출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신화의 세계에 깊이 몰입해 있던 톨킨은 편집자에 의해 자신의 글이 장과 절이 나뉘거나, 심지어 단어 하나조차 바뀌는 것을 애달아했다. 톨킨이 지인에게 남긴 유명한 말은 바로 “그 작품은 내 생명의 피로 쓴 것이니”였다.
글을 쓰는 일뿐 아니라 그 뒷배가 되는 읽는 것 또한 성스러운 행위이다.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자이자 백과전서 「지봉유설」을 쓴 지봉 이수광은 “몸가짐이 검소하고 놀이와 사치를 싫어하며 44년간 벼슬하는 동안 출처와 언행에 티가 없는 인물”이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만 그랬을까. 아니다. 지봉 이수광은 남이 보지 않을 때도 검소한 몸가짐이었고, 놀이와 사치를 멀리했다. 그럴 시간이 있다면 한 장의 책을 더 읽는 게 그의 삶의 태도였다. 이수광의 시문집 「지봉집」의 한 구절은 이렇다.
“성현의 책이 내 벗이요. 내 마음이 엄한 스승이므로, 마음을 경건하고 독신하게 다스리는 것이 스승을 섬기는 일이다.”
이수광에게 책은 단지 책이 아니라 스승이었다. 책이 스승이었던 이를 하나 더 찾는다면, 이광주 인제대 명예 교수일 것이다. 오래된 「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권」에서 그는 ‘읽는다’는 일의 위대함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책이라는 오묘한 지(知)의 존재 양식을 통해 나의 삶에 눈을 뜨고 세계와 처음 만났다. 나에게 언어의 이미지가 쌓이고 뿜어져 나오는 그 공간은 나의 정념과 세계 인식의 타작(打作)의 장이다. 어디 그뿐일까. 어린 시절 책 읽는 시간 속에서 나는 ‘일탈’을 음모하고 꿈의 놀이를 즐겼다. 그것은 분명 ‘수태’(受胎)의 성별(聖別)된 시간이요 공간이었다.”
궁극의 세계는 통한다 했던가. 우상을 타파하는 이성을 평생 글과 삶으로 실천하며 사셨던 리영희 선생에게, 신화라는 미지의 세계를 탐구한 톨킨에게, 그리고 작가 김훈에게 글이란 생명의 피와 다르지 않았다. 읽는 이의 삶을 오롯이 보여 준 지봉 이수광에게, 이광주 교수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글이란 모름지기 삿된 것을 멀리하고 온 삶을 드려 써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 내야 한다.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 한 편의 글을 쓴다는 것은 사실상 삶을 내어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도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감히 리영희 선생의 발뒤꿈치도 따라갈 수 없는 잡문이나마 쓰지만, 두려운 마음으로, 비록 만년필은 아니지만 컴퓨터 자판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는다. 그리고 묻는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생명의 피로 쓰고 있는가. 

장동석은 출판평론가이다. 「빛과소금」 기자와 서평지 「출판저널」 편집장으로 일했으며, 현재 계간 「뉴필로소퍼」 편집장으로 있다. 저서로 「살아 있는 도서관」, 「금서의 재탄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