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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M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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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한센병 환자 치료에 헌신한 여수 애양원 선교사

그가 섬기는 세상
평생을 한센병 환자 치료에 헌신한 여수 애양원 선교사스탠리 토플

지난달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대웅제약에서 제정한 석천나눔상의 첫 번째 수상자를 시상하는 자리였다. ‘사회 각 분야에서 현저한 업적을 이룬 사람으로서 사회에 귀감이 되는 훌륭한 분’을 치하하는 석천나눔상의 첫 번째 영예는, 23년간 여수 애양원(지금의 여수애양병원)에서 한센병과 소아마비 환자를 돌보는 일에 헌신한 스탠리 토플 박사에게 돌아갔다. 현재 스탠리 토플은 호남 지방을 거점으로 선교했던 미국 남장로교 은퇴선교사들이 모여 사는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한적한 시골 마을 블랙마운틴에서 살고 있다. 기쁨과 은혜의 자리를 빛내기 위해 한국에서 함께 선교사로 헌신한 아내와 네 딸이 동행했다. 오랜만에 한국을 찾은
토플 박사를 만나 수상 소감을 들어보았다.
취재 서진아 사진 정화영 사진 제공 애양원


낯설고 척박한 땅 한국을 찾아

미국 시카고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스탠리 토플은 에머리대학교 의과대학 재학 시절 한센병의 세계 권위자였던 로버트 지코크레인 박사를 만나 한센병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의대를 졸업할 무렵 한국 애양원에 의료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말을 전해 듣고 선교를 하기로 결단한다. 1959년 한국의 한센병 환자 돌봄과 수많은 영혼들의 구원을 바라며 낯선 땅으로 향했다. 그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당시는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한국의 상황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열악하고 척박했다. 토플이 처음 애양원에 왔을 때는 의료시설은 물론이고 수도, 전기시설조차 갖춰지지 않았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에 의지해 수술을 해야 할 정도였다. 환자들의 상태는 더욱 참혹해, 한센병으로 인한 정신질환과 안과질환, 감각 소실과 약물 남용 등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목도하며 토플은 질병 치료에 대한 의지를 더욱 확고하게 다졌고, 새로운 수술법과 치료법을 연구 개발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1960년에는 의료 선교를 위해 노르웨이에서 온 소아과 전문의 안 마리 토플과 결혼했다. 그녀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난방, 전기, 수도시설이 모두 열악했지만, 함께 지내던 한센병 환자들과 의료 봉사자들의 마음이 너무 따뜻해서 견딜 수 있었어요. 사랑과 감사를 경험한 소중한 시간이었지요.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애양원 제10대 원장이 되다

스탠리 토플은 손양원 목사의 뒤를 이어 1960, 70년대에 애양원 10대 원장을 지냈다.
미국에서 후원을 받아 애양원 내 현대식 병원을 지어 입원 치료를 시작했으며, 미국과 인도에서 새로운 수술법을 배워 와 국내 한센병 환자 치료에 도입했다. 또한 이동진료반을 운영해 한센병 환자뿐 아니라, 일반피부과 진료를 함께해 한센병 환자와 일반 환자의 융화에 힘썼다.
당시 소아마비 환자가 넘쳐나는 현실을 안타까워해 한센병 전문 병원인 애양원에서 소아마비 환자들의 수술과 재활치료를 실시했다. 애양원은 소아마비를 수술하는 유일한 병원으로 알려졌고, 전국에서 소아마비로 고생하는 이들이 몰려들었다. 의수와 의족, 보조기를 도입해 중증 환자들이 살아갈 의지와 희망을 찾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애양원을 위해 헌신한 분으로 손양원 목사를 많이 떠올리지만, 애양원 환자들에게는 손양원 목사 이상으로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 토플 박사이다. 치료를 넘어선 헌신과 사랑, 국적과 출신을 뛰어넘은 진실된 마음이 소외되고 병약한 이들의 마음을 녹인 것이다.
시상식이 한창인 행사장에서 어린 시절 토플 박사에게 소아마비 치료를 받고 새로운 삶을 얻게 되었다는 한 분을 만났다.
“9살 나이에 소아마비라는 이유로 차별 당하고 놀림 당할 때 토플 박사님을 만났습니다. 어린 제 눈에 박사님은 너무 신기했어요. 외국인인 데다가 나에게 소아마비라고 손가락질도 하지 않고 나를 고쳐주었으니 말이에요. 사춘기를 지나면서 토플 박사님이 왜 한국 땅에 와서 대가없이 그런 일을 하는지 궁금했고, 나 역시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는 결국 의사가 되었고 필리핀과 네팔에서 선교사로 섬겼습니다. 박사님의 진정한 섬김이 한 아이를 살렸고
한 명의 선교사를 만들어낸 거죠. 분명 또 다른 곳에도 저 같은 열매들이 많이 맺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스탠리 토플의 한국 이름은 도성래

토플의 헌신은 질병 치료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한센병 완치 환자들의 자활을 위해 양장, 봉재 등을 가르치는 직업학교를 세웠다. 또한 한센병 완치자들이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를 수 있도록 애양원 공제조합이 소유한 땅을 무상으로 나누었다. 이때 독립한 환자들이 마을을 이루었는데, 토플의 한국 이름 ‘도성래’를 따서 마을 이름을 ‘도성마을’이라고 붙였다.
토플은 한센인을 바라보는 세상의 편견에도 맞서 싸웠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한센인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자 했으며, 한센병이 치료 가능한 질병임을 전파하기 위해 강연에 나섰다. 애양원 최초로 한센병 환자와 일반 환자의 통합진료를 시도하는 등 한센인의 권익과 인격 보호에도 힘을 기울였다.
애양원 환자들이 전부 완치되자, 이제 한센병 치료는 한국 의사들에게 맡기겠다며 미련 없이 자리를 내려놓았다. 토플은 23년의 한국 생활을 마무리하고 1982년 새로운 선교지를 찾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 50세였다.
이후 20여 년간 케냐, 소말리아, 탄자니아, 콩고 등에서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일을 해오다 70대의 나이에 은퇴하고 블랙마운틴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낳은 4명의 딸은 한국에서의 기억을 간직한 채 하나님의 자녀로 잘 성장했다. 그중 한 명은 부모의 꿈을 이어받아 북한 선교에 헌신하고 있다.
토플 선교사에게 수상 소감을 물었다.
“한국은 인생의 가장 좋은 시기에 가장 많은 것들을 이룬 곳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열정적으로 일했고, 의사로서 뿌리를 내리게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받은 게 많은데 또 이렇게 귀한 상을 주시니 더없이 기쁘고 영광스럽습니다.”
섬김과 나눔이 결핍된 지금 세상에 대해 당부의 말도 덧붙였다.
“남을 보살핀다는 것은 본인의 시간, 가진 것 또는 열정을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더 많은 분들이 ‘돌봄’과 ‘긍휼’의 횃불을 들고 걸어가 주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를 낯선 땅에서 불태운 이름 없는 선교사들. 그들의 헌신으로 지금 우리는 병으로부터 자유한 것인지 모른다. 그들의 결단으로 지금 우리는 부흥한 한국교회에서 편안히 예배드릴 수 있는지 모른다.
대가도 칭찬도 바라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랑을 실천한 그들의 걸음을 우리가 따라가면 좋겠다.

토플 박사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역시 한국에 오실 건가요?”
“몇 번이라도! (Every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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