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얼마 전에 정든 집을 떠났다. 4살 때 이 집으로 이사를 와서 35년을 살았다. 이 집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직장 생활을 하고, 연애를 시작하고, 아픈 이별도 경험했다. 이 집에서 오빠는 학교를 졸업하고 선생님이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어린 삼 남매가 잘 성장하기까지 추억과 역사가 담겨 있는 이 집은 언제나 따뜻한 양지가 되어 우리 가족에게 행복한 보금자리를 만들어주었다.

특히 남향이라 햇볕이 잘 들어와서 사계절 내내 빨래가 잘 마른다고 엄마가 참 좋아하셨다. 아버지의 실직과 나의 투병 생활로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엄마는 매일 아침 정성스레 뜨스한 쌀밥을 지어 이 집의 부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얼마 전, 우리 가족은 새로운 집으로 이사했다. 새로운 집은 살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새 집 주변은 내게는 모든 것이 친숙하다. 몸이 불편한 내가 낯선 환경에서 잘 적응할 수 없기 때문에 이전 집에서 가까운 곳에 새로운 둥지를 마련한 것이다. 이는 나를 향한 엄마의 깊은 마음이었다. 어느 정도 이삿짐이 정리되고 엄마가 외출하던 날, 나는 언니와 단 둘이서 점심을 먹었다.

“보리야, 단풍이 빨갛게, 노랗게, 아주 예쁘게 물들었어!”
언니가 말했다.
“이 집에서 그게 보여?”
나는 의아한 듯 놀라 되물었다.
“그럼! 베란다 앞 쪽으로 바로 공원이 있어서 풍경이 좋아. 여기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한눈에 느낄 수 있을 거 같아. 그래서 엄마랑 이 집으로 결정한 거야.”

나는 이사를 오고 한 달여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도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엄마는 이사를 한 후 하루 서너 번씩 세탁기를 돌리고, 베란다에 빨래를 널면서도 한 번도 내게 이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엄마는 오늘도 베란다 앞에서 눈을 꼭 감아버린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은 엄마도 외면하고, 내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엄마도 무시해 버린다. 이 세상이 가져다주는 어떠한 아름다움도 우리 엄마에게는 그저 슬픔이고, 이 세상이 가져다주는 어떠한 즐거움도 우리 엄마에게는 그저 아픔인 것이다. 나와 공감하고 공유할 수 없는 어떤 것도 우리 엄마에게는 가치 없고, 무의미한 일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이런 것들은 불편한 마음을 더욱 부추길 뿐이다. 길을 걷다가도, 버스를 타다가도,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도, 엄마는 내 생각만 하면 마음을 추스를 사이도 없이 눈에서 눈물을 후드득 쏟는다. 딸자식 병 수발 9년 째, 엄마에게는 이제 감정이라는 것도 없어 보인다. 목구멍까지 터져 나오는 기쁨의 탄성도, 슬픔으로 목이 메는 고통의 탄식도, 내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삼켜버린다.

새 집으로 이사를 오고 하루 이틀은 가족들의 도움을 받으며 지냈다. 서서히 적응을 하고, 이제는 어느 정도 혼자서 걸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빈번히 실수를 한다. 어느새 팔과 다리에는 상처가 하나둘씩 늘어가고, 나는 엄마 모르게 약을 바르는 날들이 많아졌다. 하루는 아침을 먹고, 화장실에 가는데 또다시 완전히 방향 감각을 잃어버렸다.

“엄마, 지금 여기가 어디야?”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던 엄마는 황급히 달려와 얼른 나를 부축했다. 엄마와 살갗이 닿으니 서늘했던 마음이 금세 따뜻해졌다. 지금 이 사랑 하나만으로도 내 마음은 붉게, 노랗게 물들어간다. 예쁜 우리 엄마에게 이제는 꽃길만 걷게 해주고 싶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K보리는 우연히 먹게 된 항생제 부작용으로 ‘스티븐 존슨 증후군’에 걸렸다. 피부 전체가 벗겨지고, 장기가 심하게 손상되고, 손발톱이 빠졌다. 수 십 차례 수술을 해서 병은 나았지만 시력을 상실했다. 저서로는 「일곱 번째 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