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도 그랬는데

서랍을 정리하다 청년 시절 사진 한 묶음을 발견했다.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며 선교사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으면서 영화라는 전혀 다른 동네를 기웃거리던 한 청년이 사진 속에 있었다.
지금처럼 배가 나오기는커녕 54킬로그램도 채 안 되는 바싹 마른 몸을 가지고도 세상을 들어 올리려는 듯 의기양양한 기세가 사진을 채우고 있었다. 마침 어깨 너머로 사진을 들여다보신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옛말에 씨 도둑질은 못한다더니, 어쩌면 네 아들이랑 꼭 닮았다니!”
어머니의 눈에는 청년 시절의 내 얼굴과 중학교 3학년인 손자의 모습이 같아 보이는 모양이다. 항상 아들 사랑에 눈이 먼 어머니의 말은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하는 법. 나는 그 사진을 들고 아내에게 다가간다.
“여보, 이 사진 좀 보구려. 정말 병찬이하고 나하고 닮았어?”
“얼굴만 닮은 줄 알아요? 하는 짓도 똑같아요. 방에 물건 늘어놓는 거 하며. 어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이러다 본전도 못 찾겠다는 후회가 막 몰려오는 순간, 마음 한구석에는 왠지 흐뭇함과 더불어 갑자기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흐뭇한 마음은 어느덧 아들이 토실토실한 유년 시절을 벗고 비쩍 마른 몸이지만 키가 크고 무엇보다 내 얼굴을 갖고 이렇게 성장했다는 데서 오는 기특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집에서 키우는 화초가 자라나 꽃을 피우는 것만 봐도 마음이 좋은데, 하물며 15년을 키운 아들이 어느새 나의 모습을 하고 듬직하게 옆에 있으니, 지켜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오죽 좋겠는가!
그러나 나와 닮은 모습 속에서 아들 나이 때의 옛 시절 나의 모습을 떠올리면서도 나와 똑같은 행동을 하는 아들을 힐난(詰難)했던 것에 미안함 마음이 솟구쳤다.
중·고등학교 시절 나의 생활은 학교와 교회 그리고 영화였다. 돈이 없어서 영화관에 자주 가지는 못 했지만 TV에서 하는 <주말의 명화>와 <명화극장>을 빼놓지 않고 보는 ‘시네마 키드’가 바로 나였다. 심지어 내일 시험이 있는데도 전날 밤늦게까지 방영하는 <명화극장>을 보고, 또 채널을 돌려 당시 주한 미군들을 위한 방송이었던 AFKN에서 하는 최신 영화까지 섭렵한 다음에야 비로소 교과서를 잠시 보고 잠이 들곤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대학에 갈 수 있었던 건 공부를 잘해서나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시험 보는 요령이 좋아서일 뿐이란 생각을 감출 수 없다.
아들은 시험 보는 요령 빼놓고는 전부 날 닮아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온 이후 그 좋아하던 레고와 이별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컴퓨터 앞에서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어린 자녀를 둔 한국의 부모가 그렇듯이 게임과 웹툰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아이를 보는 부모 마음은 속이 타들어가기 마련이다. 특히 학교에서 보내온 시험 성적표를 확인하는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 상황에서 냉수 한 모금으로 화를 식히면서 조곤조곤 얘기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명색이 대학 교수고 거기다 학교에서 미디어와 문화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다른 집 부모와는 뭔가 달라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날 법도 한데, 시험 성적을 확인하는 그 순간에는 기독교 교육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아이를 다그치는 전형적인 입시형 부모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너, 중3 때 성적이 고등학교까지 그대로 이어진다는 거 알아? 아빠가 지난번에 컴퓨터 사용 시간 적으란 거 기억나? 컴퓨터 오래하면 전두엽이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아서 공부뿐만 아니라 옳은지 그른지 사리 분별도 못해요. 그리고 요즘 보니까 너 책상에 앉아 있을 때 만화만 열심히 그리고 있던데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너는 정말 상상력이 대단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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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한바탕 쏘아붙이고 거실로 나와 있으니 내가 야단쳤던 건 바로 옛날의 나였다. 나도 TV 앞에 죽치고 앉아 어머니에게 잔소리를 들으며 영화를 봤지만 글도 쓰고 새로운 세상에 대해서 알아가며 성장해 왔는데, 인터넷으로 웹툰을 보며 만화를 그리고 상상력을 키워가고 있을 아들의 세상을 너무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물밀듯 밀려왔다.
특히 밖에서는 그토록 자랑하던 아들이 아닌가! 한국의 입시 중심 교육이 아이들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빼앗아 간다며 일본 최초의 TV 만화 영화 <아톰>을 그린 데즈카 오사무((手塚 治)를 치켜세우던 내가 아니었던가! 데즈카 오사무는 원래 의사였지만 자신과 일본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의사를 포기하고 만화가의 길을 갔던 ‘일본 만화의 신’으로 불리는 사람이었다.
나는 아들에게 네가 얼마나 상상력이 좋은 아이였는지를 말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아들이 다섯 살 때 일이다. 아들하고 놀기로 약속한 시간, 때마침 중요한 전화가 걸려왔다. 중요하다고는 했지만 무슨 전화였는지 기억나지 않는 걸로 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들은 내 발 아래서 아빠가 놀아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지만 나는 귀찮다는 듯이 손사래 치며 아들을 내보내려 했다. 그 순간에 아들은 갑자기 바지를 내리고는 내 발밑에 오줌을 누기 시작했다. 천연덕스럽게 화장실도 아닌 공부방에서 아들은 실컷 오줌을 싸기 시작한 것이다. 그 황당함이란 잠시 할 말을 잊게 만들 정도였다.
“병찬아, 쉬를 하려면 화장실에 가서 해야지. 아빠 발밑에다 싸면 어떻게 해?”
“아빠가 전화 받고 있는 게 나무 같아서, 나무에 물 주려고 그랬지.”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고 말씀했지만, 나는 아들에게 그 말을 해줄 수가 없다. 그러나 병찬이는 정말 거룩하고 재미있는 상상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말을 꼭 해주고 싶다.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도록. 

강진구는 고신대 국제문화선교학과 교수이자 영화평론가이다. 대중 강연과 각종 미디어를 통한 문화 사역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감성 세대의 영화 읽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