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꽃   illust 장정윤

회원이 백 명을 헤아리는 중고등부를 통틀어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은 셋뿐이었습니다. 셋은 늘 붙어 다니는 단짝들이었지만 생김새부터 됨됨이까지 딴판으로 달랐습니다. 예쁘기론 미경이 누나가 으뜸이었습니다. 낯빛이 희고 밝았습니다. 웃으면 고르고 흰 이가 다 드러났습니다. 누구에게나 다정해서 인기가 많았습니다. 누나의 일거수일투족은 항상 이슈가 됐습니다. 누나 역시 주인공 노릇이 싫지 않은 눈치였습니다.
경희 누나는 똑똑했습니다. 학기를 마칠 즈음이면 전교 1등을 했다느니, 이번엔 2등으로 떨어져서 많이 울었다는 따위의 얘기가 돌곤 했습니다. 입을 열면 ‘똑똑’이란 두 글자가 우수수 쏟아져 나왔습니다. 명쾌한 발음으로 앞뒤가 딱딱 맞아 누구도 거역하지 못할 논리를 폈습니다. 언제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는지 시에서부터 인체의 신비와 별자리까지 모르는 게 없었습니다. 사랑보다 존경을 받았다고 해야 할까요? 또래 형들은 감히 다가설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미경이 누나와 달리 경희 누나는 실력으로 주인공 자리를 쟁취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반면에 정숙이 누나는 조연급이었습니다. 조그만 몸집에 이목구미가 오목조목해서 귀여운 느낌이었지만 미경이 누나에 댈 바는 아니었습니다. 손꼽히는 상업고등학교에 다니는 걸 보면(시험을 봐서 학교에 들어가는 시절이었습니다) 시쳇말로 ‘견적’이 딱 나왔습니다. 공부는 제법 하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에 가기보다 취업을 서둘러야 하는 처지임에 틀림없었습니다. 더없이 성실해서 예배든 모임이든 빠지는 법이 없지만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여름 수련회가 열렸습니다. 새벽기도로 시작해서 오전, 오후 두 차례 집회와 성경공부, 기도회로 이어지는 3박 4일짜리 행사였습니다. 기대 종목은 하루 세 시간 물놀이가 전부였습니다. 요즘 같으면 참석자가 없어 시작도 못 해볼 모임이지만 그땐 참석률이 90퍼센트에 육박했습니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한 시간쯤 떨어진 시골 분교 운동장에 남학생용 하나, 여학생용 하나 커다란 텐트 둘을 쳤습니다. 학교를 끼고 도는 큰 냇가엔 가마솥이 걸렸습니다. 봉사하러 따라온 집사님 두 분이 밥을 짓고 국을 끓였습니다.
수련회장에서도 미경이 누나가 있는 곳은 언제나 복닥거렸습니다. 형들이 공주님 모시는 시종들처럼 따라다녔습니다. 물놀이 시간에는 유난했습니다. 요란한 물보라와 웃음이 터지는 자리엔 어김없이 누나가 있었습니다. 경희 누나는 동생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들어보지도 못한 작가와 가수들의 이름을 줄줄이 읊어대며 동생들의 마음을 홀리다시피 했습니다. 죄송스런 얘기지만 목사님이 인도하는 집회나 선생님들이 이끄는 성경공부 시간보다 누나와 함께하는 잡담 시간이 곱절은 흥미진진했습니다.
정숙이 누나요?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성경공부와 집회 시간에 앞도 뒤도 아닌 어중간한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물놀이 시간엔 냇가 큰 돌에 앉아 발을 적시는가 싶다가 금방 빠져나가 주방으로 갔습니다. 집사님들 틈에 한자리 차지하고 호박과 감자를 깎고 잘랐습니다. 텐트가 기울었단 소릴 듣고 달려가 보면 누나가 태연히 끊어진 줄을 잡고 있었습니다. 무르팍이라도 깨지든, 강단에 올릴 강사용 음료수가 필요하든, 안경을 잊어버렸든 우선 정숙이 누나를 찾았습니다. 그러면 십중팔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디에나 있는 누나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워낙 말수가 적고 나서길 싫어해서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까닭입니다.

저녁 집회가 끝나면 학생 임원들과 진행 팀 리더들이 모여 평가회를 열었습니다. 수련회 이틀째 되는 날 그 자리에서 미경이 누나와 경희 누나가 한판 붙었습니다. 대단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다음날 점심 메뉴가 카레라이스인데 식재료를 책임지기로 한 미경이 누나가 카레를 빠트리고 온 게 문제였습니다. 어차피 일이 그리되었으니 잘잘못 따질 게 아니라 식단을 바꾸자는 게 미경이 누나고,
한 번 정해진 메뉴를 이제와 바꾸기 어려우니 사달을 낸 책임자가 왕복 세 시간이나 걸리는 시내까지 걸어 나가서 카레를 구해 오라는 게 경희 누나입니다. 주인공끼리 마주쳤으니 소리가 요란했습니다. 실무적인 논쟁이 자존심 다툼으로 변해갈 무렵, 입 한 번 열지 않고 앉았던 정숙이 누나가 모기만 한 소리로 지나가듯 말했습니다. “내일 아침에 목사님이 특강하러 들어오시니까 서울서 사다 달라고 하자. 전화는 교장 선생님 댁에 있더라.” 긴 다툼은 그걸로 정리됐습니다. 그날 정숙이 누나를 다시 보았습니다. 조연인 줄 알았는데 실은 보이지 않는 주연이었습니다. 되짚어보니 누나가 엑스트라인 듯 주인공 노릇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해 겨울, 학생회 임원 선거에서 예상을 뒤엎고 정숙 누나가 부회장에 당선되는 걸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

경상북도 봉화의 소박한 지역 특산물 매장에 갔다가 안개꽃 씨앗을 만났습니다. 얼마나 반갑던지.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안개꽃은 장미처럼 단박에 눈길을 사로잡는 꽃은 아닙니다. 송이도 작고 색깔도 소박합니다. 고등학생 시절에 만났던 정숙이 누나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장미 꽃다발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누가 주인공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새빨간 장미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안개꽃 한 묶음 속에 들어앉아 있을 때가 아닐까 싶어서요.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빌 브라이트 CCC 총재, 그리고 그 둘을 길러낸 주일학교 교사 헨리에타 미어즈 여사 가운데 어느 한쪽을 주연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세월이 갈수록 자꾸 안개꽃을, 헨리에타 미어즈 여사를, 그리고 정숙이 누나를 공동 주연에 앉히고 싶은 마음이 짙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