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책, 나의 책

issue 2017년 09월호 나와 책, 나의 책 빛과소금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한 해 동안 쏟아져 나오는 책은 수만 종에 다다를 것이다. 그러나 전국 서점에 깔리는 책들에 비해 한국인 평균 독서량은 그렇게 높지 않다. 1년에 10권 안팎에서 왔다 갔다 하는데, 2016년 한 해 동안 한국인이 읽은 평균 독서량은 8.7권이었다.

어찌 되었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과 연을 맺으며 살아간다. 많이 읽는 사람이든, 적게 읽는 사람이든. 아니, 책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평생 살면서 단 한 권의 책은 손에 들고 보았을 것이다. 당장 주위를 둘러보라. 길바닥에 서 있지 않는 이상, 주변에 누렇게 색 바랜 낡은 책 한 권은 눈에 띌 터이니. 냄비라도 들춰보라. 혹시 아는가. 받침대로 사용된 하드커버 책을 발견할지도. 너무도 쉽게 손이 닿을 수 있는 자리에 책은 언제나 있다. 외면하지 않는다면, 책은 우리 인생길에 기꺼이 동행할 것이다.

이번 호 「빛과소금」에서는 사람마다 책과 맺게 된 인연, 그 스토리를 정리했다. 각 사람의 인생 지각판에 지진을 일으킨 ‘인생 책’ 한 권을 소개했다. 16인을 선정했는데, 직업도 나이도 독서 취향도 제각각이다. 그들의 북 스토리! 지금 들어보시라.

 

 

 

장경식
25년 이상 백과사전을 만들어온 편집자.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소설 등단

​

나와 책 돌이켜보면 기억의 저 끝에 책이 있다. 술꾼인 아버지 덕에 유년의 기억은 답십리의 비포장 골목길처럼 질척하고 어두웠는데, 옆집에서 계몽사 판 동화 전집을 한 권씩 빌려 읽고 나면 골목 사이로 하늘이 보였다. 헌책방에서 거의 매일 별책 부록판 세계문학과 「문학사상」 과월호와 표지가 예뻤던 동화문고를 사들이면서 활자, 지질과 같은 책의 물성에도 눈길이 미쳤을 즈음 이 인연이 심상치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 예감은 적중했고 책은 평생을 함께하는 업이 되었다.

 

나의 책 내 유년기를 끝낸 책이 카뮈의 「이방인」이었다면, 나를 어른으로 만든 책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다. 「이방인」은 내 안에 들어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었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나의 바깥에 무엇들이 있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250년 역사 속에는 책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 허허실실까지도 들어 있었다. 나는 이 책을 만들면서 삶의 절반을 보냈다. 감사할 일이다.

 

 


김준영
청년들과 함께 미래를 발굴하는 ‘나의미래공작소’ 대표

 

나와 책 나에게 책이란, 독서란 무엇일까? 어떤 의미일까? 이 질문을 적어놓고 한동안 생각했다. 항상 젊은이들에게 독서가 중요하니 책을 가까이하라고 조언했지만 정작 나에게 책은 무엇인지 정리해 본 적은 없는 듯하다. 때론 너무 중요하나 당연한 것에 대해 의미나 가치를 생각해 보거나 정리해 보지 않고 무심코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고민 끝에 의미를 정리해 보니 책은 나에게 스승이자 친구다. 나는 학교 공부보다는 책을 통해 세상을 알아가고 필요한 지식을 얻어왔다. 독학이라는 용어를 쓰곤 하지만, 수많은 책을 통해 그리고 저자들과의 만남과 그들의 가르침으로 성숙해져 왔고 부족하나마 지금의 일들을 감당하고 있으니, 이것이 혼자만의 힘이나 노력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지식뿐 아니라 쉼과 위로가 필요할 때도 내겐 늘 책이 일정 부분 감당해 주고 있다.

 

나의 책 내가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제일 좋아하는 것?”류의 질문이다. 어떻게 수많은 스승과 친구들 중 최고의 한 명만을 고를 수 있겠는가? 내게 영향을 끼친 책은 너무도 많고 그 또한 다양하다. 그러다 결국엔 내가 두고두고 곱씹으며 꺼내어 보는 책들을 추리기로 했다. 그중 내 머리와 마음에 남아 가장 큰 여운을 주었던 책은 바로 마이클 카드가 쓴 「동행」이다. 진정한 스승과 제자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살아가신 그 삶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읽을 때마다 나의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성찰하며 미래를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은 평생 곁에 두고 동행할 스승이자 친구이다.

 

 

이희정
파리3대학에서 영화미학과 민중예술을 공부하는 대학원생

​

나와 책 어느새 삼십 세가 되어 인생을 돌아보니 책과 나의 관계에는 분명한 전환점이 있었다.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평화로운 시기에 살았다면 나는 화려한 문체나 단순히 묘사 위주의 책을 썼을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나도 세상이 평화로운 줄 알던 때에는 글 자체에 대한 아름다움과 사적인 감상을 즐기는 데 치우친 독서를 주로 했다. 그러나 부조리라는 것을 인식하고 나의 시대정신이 급변하면서부터, 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으로 관심이 옮겨 갔다. 오늘날 글이라는 것은 ‘결국에는 무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위 가장 유용한 권력이나 자본에 비해, 글은 무능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무능하기에, 그 유능하고 유용한 것들에 대해 말하고 파헤칠 자격을 갖는 것일지도 모른다. 삼십 세가 된 지금, 그런 책들은 무능함을 역이용하여 나로 하여금 보다 깨어있게 하는, 함께 무능하기를 소망하게 하는 중요한 공범 관계에 있다.


나의 책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파솔리니는 밤 산책을 하던 중 우연히 만난 반딧불의 향연을 보며 민중을 떠올린다. 권력이 쏘아대는 강한 빛을 피해 어둠 속을 다니며 산발적으로 자기 빛을 내는 반딧불과 같은 존재들. 나는 그러한 반딧불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을 공부한다. 그런 이미지들은 주로 희미하고 파편적이다. 어렵게, 몰래 만들어지는 탓이다. 그럼에도 잔존한 그 가난한 이미지들이, 때로는 백 년이 넘게 흘러서, 우리에게 전달되어 자아내는 효과는 아주 넓고 깊다. 그곳에는 잘 기획되고 의도된 이미지들의 홍수 속에서 찾아보기 힘든, 날것의 인간성이 담겨 있다. 나 또한 강한 빛에 편승하기보다는, 희미하지만 자기 빛을 내며 같은 존재들과 마주치기를 끊임없이 소망하는 반딧불로 살고 싶다.

​

​

​

​

issue의 다른 기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