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따듯합니다. 몸이 나른합니다. 졸음을 떨러 냇가로 내려갑니다. 인기척에 놀란 고라니가 덤불을 헤치고 냅다 내뺍니다. 산골 냇가는 다시 고즈넉해집니다. 골을 타고 드문드문 센 바람이 내려옵니다. 아직 차갑지만 쌀쌀하진 않습니다. 시내 가장자리까지 얼음은 다 풀렸습니다.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제법 커졌습니다. 군데군데 소가 진 자리마다 멸치만 한 물고기들이 재빨리 오갑니다. 점찍어둔 바윗돌에 앉아 생각합니다. ‘언제 저놈들 이름을 좀 알아봐야겠어.’

행복합니다.

대놓고 자랑질을 하자면, 뭐하나 부족한 게 없습니다. 프리랜서 노릇을 시작한 지 스무 해를 헤아리지만 단 한순간도 일이 끊이지 않습니다. 번역도 하고, 책도 내고, 잡지도 만들고, 취재하러 다니느라 늘 분주합니다. 떵떵거리진 못해도 그날그날 먹고사는 데는 한 점 모자람이 없습니다. 산골 외딴집이나마 마음 놓고 살 집이 있습니다. 봄이면 두릅이랑 취나물을 무제한 공짜로 거둘 수 있고 여름부터 가을까진 텃밭이 반찬을 책임집니다. 오밤중에 온 방안을 뛰어다녀도 누구 하나 눈치주지 않습니다.
몸은 건강합니다. 이십 리쯤은 쉬지 않고 걸을 수 있고 깊이 자고 쉽게 일어납니다. 텃밭을 가꾸고, 가지치기를 하고, 잔디를 깎을 힘이 있습니다. 일이 밀리면 하룻밤쯤은 거뜬하게 지새우고 외국 영화를 봐도 자막을 놓치지 않습니다. 알고 지낸 햇수가 삼십 년을 헤아리는 아내와는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웬만하면 다투지 않고 서로 수가 틀어져도 곧 풀어져 헤헤거립니다.
가까이 지내는 좋은 친구들도 여럿입니다. 특히 몇 해 전부터 함께 모여 말씀을 나누는 ‘별천지모임’은 생각할 때마다 흐뭇합니다. 지난해는 유난히 경사가 많았습니다. 기도하는 일마다 하나님은 줄줄이 결재 도장을 찍어주셨습니다. 아이들은 대학에 들어갔고, 처녀 총각들은 잇따라 결혼소식을 알려왔습니다. 골머리를 앓던 문제들이 해결되고 기도할 뿐 감히 기대하지 못했던 일들도 현실이 되었습니다. 모임은 풍성하고 나눔은 솔직합니다.

물론 만점은 아닙니다.

호젓한 시골 생활이 즐겁지만 겨울엔 5백 미터나 눈을 치우고 길을 내야 간신히 차가 오갈 수 있습니다. 10년 넘게 약으로 심장을 달래고 있고 눈에도 고장이 났습니다. 뜯어진 망막 한 귀퉁이를 고정시키는 치료를 받은 데 이어 곧 백내장 수술도 받아야 합니다. 별천지모임은 잘 굴러가지만 아직 어려서 제 뜻에 맞지 않으면 불뚝불뚝 성을 내는 식구가 있어서 그때마다 한바탕 소란을 겪어야 합니다. 쉴 새 없이 일하지만 부가가치가 높지 않아서 생활은 늘 빠듯합니다.
오랫동안 만들어 왔던 잡지 일도 앞날을 장담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하청 업체에 다시 일을 받는 재하청 업체 신분으로 잡지를 만들어 왔는데,
원청 업체와 하청 업체의 계약이 끝나는 바람에 앞날을 장담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동안 성실하게 일해 온 경력을 인정받아 원청 업체에 수주 제안서를 낼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게 그나마 위안입니다. 계약을 따내서 다시 일을 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실패하면 당분간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겁니다. 챙겨야 할 서류가 수두룩하고, 이것저것 머리를 써야 하고, 무슨 보증 보험에도 들어야 한답니다.
들리는 소리는 늘 불안합니다. 조그만 회사여서 불리할 거라고 합니다. 이제 갓 만들어진 회사에게 누가 일을 주겠느냐는 겁니다. 터무니없이 값을 후려칠 거란 소리도 있습니다. 그러니 최저가를 제안하는 게 어떠냐고 합니다. 그렇게 제 살을 깎아 일을 따내면 시장의 질서가 엉망이 될 게 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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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시 행복하거나
행복하기로 합니다.

갯버들이 피기 시작했으니 냇가의 풍경은 하루가 다르게 바뀔 겁니다. 귀룽나무부터 시작해서 온갖 나무에 물이 오르고 곧 푸른 잎이 돋을 겁니다. 이어서 현호색이나 꽃다지 따위가 땅에 덮일 테고요. 냇가의 잡풀들도
연둣빛 새 옷을 차려입고 나타날 겁니다. 그래서 버들강아지를 오종종 달고 있는 저 갯버들은 변화하는 세상의 신호탄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을 바꾸고 주도하며 이런저런 결정을 내리는 주체가 누구인가를 상기시키는 푯대이기도 합니다. 냇가의 모습이 바뀌고 세상의 빛깔이 달라지는 건 이편에서 무얼 심고, 비료를 주고, 물을 뿌려서가 아니라는 건 새삼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다시 행복하거나 행복하기로 합니다. 봄날 냇가 나들이의 결론입니다. 아담이랑 이브 선배가 쓸데없이 아무 과일이나 따먹는 바람에 만점짜리 세상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만하면 됐습니다. 언젠가 만사가 완벽해지는 그날이 오겠지만 지금은 이쯤으로 충분합니다.
그나저나 제안서는 어떻게 쓰려고 하느냐고요? 액수는 소신껏 적어내려고요. 일을 줄지 말지는 거래처에서 결정하겠지만,
그 일이 내게 꼭 필요한지 아닌지 결정하는 분은 따로 있으니까요.

나벽수는 전문 번역가이자 작가, 기자다.
「천로역정」, 「래디컬」, 「닉 부이치치의 허그」 , 「팀 켈러, 결혼을 말하다」 등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번역했으며,
「벽수 씨의 교회 원정기」, 「까칠한 벽수 씨, 목사에게 묻다」(공저)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