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때로 같은 언어를 꿈꾼다

issue 2023년 05월호 우리는 때로 같은 언어를 꿈꾼다 글 장다나

바딤 피얼먼 감독의 <페르시아어 수업>은 각본가 볼프강 콜하세가 실화를 바탕으로 썼던 「언어의 발명」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이 영화는 페르시아어 수업이 진행되는 모습 혹은 독일군의 평범한 일상의 묘사가 주가 되기 때문에, 그 표현 방식이 비교적 담담하고 정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끔찍한 만행과 참상 같은 비극을 최소화할 뿐, 그 이면에는 죽음의 일상성과 인간적으로까지 보이는 독일군의 모습 등 전쟁이 가진 비이성의 얼굴을 웃는 낯으로 그린, 회색빛의 광기가 서려 있다.

스산해 보이는 기차선로 위를 위태롭게 걷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그의 이름은 ‘질’. 하지만 극 중 그의 이름은 그리 중요치 않다. 그를 둘러싼 끊이지 않은 의혹, 바로 그가 유대인인지 아니면 그의 주장대로 페르시아인인지 정확한 정체를 알아내는 것만이 그의 존재를 가치 있게 할 뿐이다. 그렇다. 지금 이곳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2년, 프랑스의 한 나치 강제 수용소이다. 스위스로 도망치려다 독일군에게 붙잡힌 질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페르시아인이라고 주장한다. 배고픈 한 남자에게 샌드위치 반쪽을 주고 받은 페르시아어 책을 독일군 앞에 내밀면서 말이다. 한편 같은 수용소의 주방을 책임지고 있는 독일 장교 코흐. 놀랍게도 그는 지금 페르시아인을 찾고 있는 중이다. 전쟁이 끝나면 동생이 사는 테헤란으로 가서 식당을 여는 것이 그의 유일한 꿈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쟁이 끝나기 전 반드시 페르시아어를 배워야 한다. 유대인들을 잡아들이는 데 혈안이 된 두 독일 병사는 질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면서도 상으로 받을 고기 통조림을 떠올리며 그를 코흐에게 데려간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들은 지독하게 질을 괴롭힌다. 코와 얼굴, 냄새, 심지어 뒤통수까지 유대인이 맞다고 여기면서 말이다. 그들에게 끊임없는 폭력을 당하는 끔찍한 일상이지만 그래도 삶을 유지하기 위해 페르시아인임을 주장해야 했던 질의 흔들리는 눈빛과 공허한 표정. 영화를 보는 내내 한동안 그의 얼굴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질은 페르시아어 책 첫 페이지에 쓰여 있는 ‘레자’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이 이름은 샌드위치와 책을 바꿨던 남자, 그 남자가 살던 페르시아인 집주인의 아들 이름이다. 순간의 생명이라도 연장하고자 거짓말을 한 질은 결국 불행 중 다행으로 코흐에게 페르시아어를 가르쳐 주기로 하고, 언제까지일지 모르는 조금은 긴 삶의 시간을 보장받는다. 이제 질이 해야 하는 것은 단 하나, 페르시아어 수업이다. 그것도 그가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가짜’ 페르시아어로 말이다.

우리의 언어란 무엇일까? 복잡하면서도 너무 뻔한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같은 언어를 쓴다는 것 혹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타인의 메시지를 파악하고 정보의 공유화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소통 체계가 언어라고 할 때, 여기서 말하는 언어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할 것 같다. 극 중 독일군들이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함께 노래하는 장면은 이런 언어에 대한 생각을 이어 나가기에 매우 인상적인 장면으로 기억된다. 서로 어긋난 애정 관계, 뒷담화, 질투와 거짓 행동으로 엮여 있는 이들이지만, 같은 언어로 그들이 목소리를 모을 때 유일하게 공감과 화합을 이루는 순간이 된다. 물론 언어는 그 언어가 직접적으로 의미화하는 것들보다 언어와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빈 공간, 즉 그 행간이 언어의 진정한 속내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같은 언어를 쓰더라도 그 행간을 잘 파악하는 것은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에 등장하는 ‘다른 언어’이다. 극 중 등장하는 주요 세 언어는 독일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질의 가짜 페르시아어인데 각 언어들은 그 언어 고유의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소통할 수 없다. 주목할 만한 건 독일어와 프랑스어가 서로에게 부여하는 행간이다. 각 언어는 독일군과 유대인, 전쟁과 희생이라는 대치적인 의미화 과정을 거친다.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로써의 언어와 폭력을 몸에 쓰는 언어로 파생되며 비극의 극단으로 치닫는 두 언어의 행간. 그런데 영화 속에는 이 두 언어의 충돌 너머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언어, 다시 말하면 그 행간을 벗어난 어떤 곳이 존재한다. 그곳에는 질의 가짜 페르시아어가 있다.

하루빨리 가짜 페르시아어를 만들어야 하는 질은 막연하게 만들기에만 급급하다 보니 스스로 만든 언어조차 잊어버리게 되는 난감한 상황을 맞이한다. 매일매일 단어를 만들며 목숨을 이어가던 질은 코흐가 시킨 명단 정리 일을 하게 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그 명단은 다름 아닌 수용소에 들어온 유대인들의 명단이다. 질은 명단의 이름을 변형시켜 규칙을 만들고 거기에 뜻을 붙여 단어를 만들기 시작한다. 처음엔 단순명사 위주였던 가짜 페르시아어는 명단 속 죽음을 앞둔 유대인들의 모습과 오버랩 되며 슬픔, 배고픔, 이해, 희망 같은 질의 서글픈 심상을 담은 2,840개의 단어로 진화하기 시작한다. 이 가짜 페르시아어의 놀라운 점은 내적 친밀감을 형성하며 속내를 알 수 없던 코흐에게 진심의 순간을 선사했다는 점이다. 그는 처음 내뱉은 페르시아어를 통해 테헤란에 가고자 하는 스스로의 마음을 되새겨 보기도 하고 짤막한 시를 써 질에게 들려주기도 한다. 가짜 페르시아어는 어느 순간 독일어와 프랑스어, 즉 그들을 둘러싸던 언어들의 대립과 이념의 속성을 파괴하고 예술과 낭만의 자리로 그들을 이끌어 낸다. 어쩌면 그들은 배척과 소통 불가의 언어들을 벗어나 공감과 평화를 나누는 진심 어린 언어를 함께 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한때 소통의 언어였던 두 사람만의 가짜 페르시아어는 전쟁이 끝나갈 무렵 놀랍게도 다른 언어의 형질로 바뀌게 된다. 영화의 후반부, 연합군의 공격을 대비해 수용소는 모든 증거 자료를 불에 태우고 유대인들을 이전시키려 한다. 이런 상황에서 수용소를 함께 빠져나온 질과 코흐는 각자의 길로 떠나게 되는데 이때부터 가짜 페르시아어는 소통의 부재와 진실 폭로의 기재라는 전혀 다른 행간을 동시에 품기 시작한다. 테헤란으로 가기 위해 가짜 벨기에 여권을 만든 코흐. 그의 가짜 페르시아어는 도리어 주변의 의심을 사게 되고 그의 정체가 들통 나는 비극을 초래한다. 페르시아어를 할 줄 안다고 울부짖는 그의 언어는 낯선 땅 뜻 모를 음성이 되어 공허하게 사라진다.

- 당신이 수용소에 있는 동안 몇 명의 유대인이 그곳을 거쳐 갔나요?
- 2,500명에서 3,000명 정도입니다. 그들의 이름을 적어 놓은 장부가 있으니 확인해 보세요.
- 장부는 없습니다. 나치가 패전 직전에 다 불태워버렸어요.

질은 유대인들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분명 비극이 자행된 그곳에 수많은 존재가 있었음을 그는 기억한다. 가짜 페르시아어를 만들며 하루에도 수십 번은 보았던 유대인들의 얼굴과 이름 그리고 죽음이 서린 비극의 정서까지. 이윽고 질은 자신이 만든 언어 속 스며 있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둘 정확히 끄집어내기 시작한다. 더 이상 가짜 페르시아어가 아닌, 역사의 비극 속에 사라지고 지워진 수많은 존재들을 현실로 소환하는 존재에 대한 기록, 그 자체가 되는 순간이 된다.

소소한 이야기이지만, 몇 년 전 짧은 기간 동안 일본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은 적이 있다. 모두의 축하 속에서도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명백히 언어 때문이었다. 일본어도 영어도 반 토막밖에 안 되는 늘지 않는 언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무슨 용기로 다녀왔는지 아직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엉성하기 그지없는 내 논문을 훑어보던 노교수는 지긋한 눈으로 나를 주시하며 말했다.
“다나는 이렇게나 언어가 안 되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온 겁니까?”
그날 밤 자존심에 울며불며 교수에게 장문의 메일을 보내고는 한참을 더 울다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난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를 어떤 언어를 유창하게 사용하며 친구들에게 교수 험담을 하고 있었다. 한참을 신나하다가 문득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라고 생각한 순간, 오히려 친구들이 나에게 모르는 언어로 질문하기 시작했고 당혹감을 느낀 순간 잠에서 깼다. 생각해 보면 그날 내가 꿈속에서 신났던 이유는 자유로운 언어 구사가 아닌 내 속상한 마음과 힘든 심경에 대한 공감이라는, 언어의 보이지 않는 행간 때문이지 않았을까.
우리의 ‘진심’이라는 언어는 때로 같은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장다나는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상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 외래교수, 영화진흥위원회 객원 연구원으로 영화 교육 및 비평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 영화제와 모두를 위한 기독교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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