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저를 위해 수고 많이 하고 계십니다

people 2022년 01월호 하나님이 저를 위해 수고 많이 하고 계십니다 임동진

파도치는 인생이 재미있다고 하지만 파도 앞에서 인생은 늘 위태롭다. 큰 바위는 보고 피한다고 해도 작은 돌멩이에 늘 걸려 넘어지는 것이 인생길이다. 인생에 내리는 잦은 비는 맞고 버틴다고 해도 폭풍우라도 몰아치면 우산도 속수무책인 것이 사람의 연약함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돌봄의 손길이 필요하다. 갓난아기 시절을 벗어난다 해도 어린이, 청소년에게 어른의 돌봄은 필연적이다. 정작 성인이 된다고 해서 누군가의 돌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무리 독립적인 인생이라고 해도 타인의 돌봄은, 더 나아가서 절대자의 도우심은 그 누구에게도 선택이 아니다. 여기 자신의 인생은 하나님의 수고로움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고백하는 연기자이자 목회자가 있다. 청춘 이후의 삶은 배우로, 초로 이후의 삶은 목회자로 열심히 살아온 배우 임동진 목사의 인생을 지금 공감한다.
취재 김재원 정리 이승연 사진 한치문 

 

 


요즘 인생을 날씨나 계절로 비유해 주시면 어떨까요? 
세상 사람들은 이야기하죠. 인생은 사계절이라고요. 제 나이는 이제 늦가을입니다. 추수했다고 해도 저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요. 계획한 일도 많고요. 사람은 목적이 뚜렷하면 방법이 예민해져요. 잡다한 생각 없이 그 목적에 집중하죠. 늦게 시작한 목회를 마무리한 지도 벌써 6년이 넘었군요. 다시 연기자로 돌아와서 여전히 무대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이 참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인생의 시계가 늦가을에 머문 지 꽤 오래 됐네요. 앞으로도 한동안 늦가을에 머물 모양입니다. 하하.

 

또 다시 새해를 맞이하면서 그동안의 인생을 돌아보시면 어떤 느낌이 드시는지요?
현대사의 격변기에 태어나서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어요. 그때부터 가난과 싸우며
네 명의 동생을 책임져야 했지요. 어찌하다 보니 그토록 꿈꾸던 배우가 되어 세상의 이목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갑상선암 수술을 하고, 뇌경색으로 쓰러져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기사회생했죠. 그 감격에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가 되어 10년 가까이 교회를 섬기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다시 연기자로 돌아왔어요. 하나님은 한 번도 저를 그대로 두지 않으셨어요. 순간마다 제 인생에 깊이 개입하셔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드러내셨죠. 이제 와서 돌아보면 감사할 뿐입니다.  

어린 시절에 해방과 전쟁을 겪으면서 고생을 많이 하셨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에요. 해방되기 한 해 전에 함경남도 홍원에서 태어났어요. 태어나자마자 울지를 않았다고 하더군요. 엄마 고생시키며 힘들게 태어났는데, 하루가 되도록 울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으니까 외할아버지께서 저를 포대기에 감싸서 묻으려고 하셨던 모양이에요. 그때 길을 가던 작은 외할아버지가 제 얼굴을 보고 이 아이는 안 죽었다 하시면서 저를 데려가셨어요. 한의사이다 보니 산 생명을 알아보셨던 거지요. 그 날 밤이 되어서야 제가 켁켁 울면서 깨어났답니다. 하마터면 산 채로 묻힐 뻔했는데, 기적적으로 생명을 이어갔어요. 그러고 해방과 전쟁을 겪으면서 1·4후퇴 때 피난길에 오르고 나니 9살이 되었는데, 그때 어인 일인지 어머니가 세상을 등지셨어요. 장남으로 네 명의 동생을 돌봐야 하는 책임이 갑자기 주어졌지요. 모두가 힘들 때라고 하지만 가난과 싸우며 유독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어려움을 잘 극복하셨네요. 언제부터 배우의 꿈을 꾸셨나요?
목포에서 중학교를 다녔어요. 그때부터 배우가 되고 싶어 연극부 활동을 했죠. 남진 씨가 당시에 1년 후배였어요. 서라벌 고등학교에서도 연극부에서 활동했어요. 이정길 씨가 그때부터 친구였습니다. 1964년에 연극 <생명>으로 데뷔했고, 1969년에 TBC 탤런트가 됐어요. 1983년에 KBS 대하드라마 <개국>에서 태조 이성계를 맡아 알려졌고, 1987년 드라마 <토지>에서 용이 역을 맡아 첫 번째 KBS 연기대상을 받으면서 인기를 끌었죠. 하나님이 배우의 길을 허락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배우로서 누릴 축복을 많이 부어 주셨어요. 그 뒤로도 끊이지 않고 배역을 주셔서 참 감사했습니다. 특히 좋은 이미지의 배역을 많이 주셨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저를 좋은 사람으로 착각을 많이 하지요. 하하.

 

하나님은 언제, 어떻게 만나셨을까요?
아내를 만난 것이 축복의 시작이었어요. 제 인생은 아내가 없었더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먼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뜨겁게 만났던 아내가 저를 위해 기도를 많이 했어요. 자연스럽게 아내를 따라 교회에 나가면서 교회가 원하는 삶의 모습을 따라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배우 의식이 강했던 거죠. 모범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하면서도 순간적으로 인간적인 모습이 튀어나왔어요. 대본을 보다가 역할이 흡족하지 않으면 화를 내기도 했고요. 방송국에서도 후배든 선배든 경우가 아니다 싶으면 부딪히고 그랬죠. 교회 장로 직분을 갖고도 그랬으니 하나님이 얼마나 속상하셨을까요? 새벽기도부터 시작해서 하루 종일 열심히 살아도 새롭게 거듭나지 못하고 과거 습관을 그대로 달고 사니 답답하셨을 거예요. 당시 이재철 목사님이 사역하시던 ‘주님의교회’를 다녔는데요. 목사님도 제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물론 장로로서 직분을 회피한 적은 없어요. IMF 때 노숙인 돌봄 사역도 했죠. 바쁜 탤런트가 교회 일도 열심이라는 칭찬이 참 달콤했어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변화된 삶보다는 타인의 인정을 먹고 사는 배우의 생리를 따른 거죠. 저의 열심인 모습에 사람들은 속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안 속으셨겠죠. 결국 저의 내면을 아시는 하나님이 그대로 놔두지 않으셨어요.


크게 편찮으셨던 이야기를 하시려는 거군요. 그때 많이 놀라고 힘드셨죠? 
2000년 5월 5일에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어요. 그러고는 괜찮아져서 무리했던 모양이에요. 2001년 8월에 미국 애틀랜타를 사흘 만에 다녀왔거든요. 그리고 팬 사인회 참석하고, 강원도에서 열린 장로 수련회도 참석했어요. 나를 채우기 위해서 열심히 한 거죠. 얼마나 미련한 겁니까? 절제 없는 생활을 한 거니까요. 이재철 목사님이 집에 찾아오셔서 일을 줄이라고 당부하실 정도였죠. 아니다 다를까 뇌경색이 와서 쓰러졌어요. 병원에서는 사흘 안에 죽는다고 했어요. 그런데 사흘 만에 의식이 돌아온 거예요. 심지어 의사와 대화를 하니까 의사가 기적이라고 놀라더군요. 기적 외에는 설명이 안 된다고 하면서 말이지요. 그러더니 아내를 데리고 나가서 한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아내 표정을 살피는데 좋지 않았어요. 의사가 평생 휠체어 타야 한다고 했다면서 눈물을 흘리더군요. 의식이 돌아온 건 기적이지만 운동 기능은 상실했던 거죠. 제가 아직도 소뇌가 30%밖에 기능을 못 해요. 그만큼 심각했어요.

 

미처 회복되기도 전에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으셨군요. 감당하기 힘들었겠어요.
그때부터 하나님과 줄다리기를 했어요.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듯 말이죠. 병원에서 소리소리 지르며 기도했어요. 왜 이러시냐고, 따지듯이 기도했어요. 감히 욥에 비견할 수 없지만 욥의 심정이 이해가 되더군요. 그때는 정말 욥의 심정으로 기도했어요. 내게 그릇된 부분이 많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배웠고, 구원도 알았고, 그 도를 지키며 열심히 살았는데, 머리털까지 세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차라리 저를 그냥 데려가시지, 왜 휠체어를 타게 하시냐고 막 따져 물었죠. 그리고는 의지로 이겨 보려 했나 봐요. 입원해 있는 24일 동안 무엇이든 제힘으로 하려고 했어요. 휠체어를 타지 않고 어떻게 해서라도 걸어 보려고 했어요. 벽 붙잡고 다니고, 보조 기구 잡고 걷고, 재활 훈련을 열심히 했죠. 퇴원하는 날, 재활센터에서 마지막 운동 처방을 받으러 가는 길에 딱 한 번 휠체어를 타 봤어요. 그렇게 편하더군요. 몸이 힘든데 휠체어를 타니까 너무 편한 거예요. 그때 느낀 게 ‘휠체어 안 타도 될 사람이 휠체어에 중독되면 평생 휠체어 타겠구나’ 싶더군요. 안 되겠더라고요. 재활센터에 가서 이 악물고 걸었죠. 그랬더니 담당 치료사가 운동 처방 필요 없다고 하더라고요. 머지않아 바로 작품에 복귀했어요. 다들 기적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이 하신 거죠. 

 

그 뒤로는 괜찮으셨던 거예요? 몸도, 신앙도 회복하셨어요?
그렇죠. 2년 정도 작품 활동하다가 나를 살리신 하나님을 증거하지 않고는 못 견디겠더라고요. 간증 집회 다니면서 신학 공부하라는 마음을 주셨어요. 그 이면에는 아내의 기도가 있었지요. 교회 다니게 해 달라고 기도하다가, 교회 다니니까 집사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집사 되니까 장로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살려 주니까 주의 종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거죠. 하하. 그 기도가 오늘의 저를 만들었어요. 결국 부르심을 받고 주의 종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제가 다니던 교회가 속한 장로회신학대학교 문을 두드렸어요. 그랬더니 나이 제한에 걸리더군요. 결국 지인의 추천을 받고 루터신학교에서 신학을 시작했죠.

 

부르심을 받고 선택한 길이라지만 나이 들어서 공부하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힘들었어요. 심지어 드라마 찍으면서 공부했거든요. 그러니 젊은 사람들하고 경쟁이 되겠어요.
근근이 학교 다니면서 수업 듣고, 시험 보고 그랬죠. 1년을 마치고 나니 도저히 못 하겠는 거예요.
1학년 2학기 마지막 시험 보고 와서 안 되겠다 싶어서 아내에게 이야기했어요. “나 도저히 못 하겠어요. 여기까지 온 것도 감사해요.” 그랬더니 “기도해 봅시다.” 그러고 마는 거예요. 그래서 이미 목사가 됐던 아들을 불러서 이야기했어요. “나 못하겠다. 신학이 이렇게 어려운지 몰랐다. 내가 공부하던 사람도 아니고, 대본만 끼고 살던 사람이라 힘들구나.” 아들 하는 말이 “누가 하라고 그랬는데요? 아버지 1등 못해서 그러시죠?” 그러더군요. 화가 나더라고요. 속마음을 들킨 기분이 들어서겠죠. “뭐라고? 목사는 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냐?” 하고 따졌어요. 그랬더니 아들이 내 손을 당겨 잡더니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아빠, 꼴등해도 하나님은 기뻐하셔요. 하나님은 등수를 따지지 않으세요. 이제 하나님이 주시는 혜택을 누리세요.” 그 말이 주의 음성으로 들렸어요. 다시 마음잡고 열심히 공부했죠. 졸업할 때 개근상 받았어요. 제가 드라마 하면서도 수업은 안 빠졌거든요. 말 그대로 기적이죠.


그때 주변에서 신학 공부하시는 걸 다 아셨나요?
다 알았죠. 스케줄 일정을 조정해야 하니까요. 신학 공부한다고 하니까 곤란한 일이 많은 거예요. 목회하기 전 마지막으로 맡은 배역이 대하드라마 <대조영>의 양만춘 장군이에요. 사실 사극은 시작하기 전에 고사를 지내거든요. 그때도 감독이 고사를 지내겠다고 하기에 제가 찾아갔어요. “고사 지내면 나 이 작품 못 한다. 우리 예배드리자. 내가 다 준비 할게” 감독이 흔쾌히 허락하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감독의 아내가 권사였어요. 제가 예배 준비를 했죠. 신학교 다닐 때라 설교 준비도 하고, 케이크와 음료수도 준비하고, 예배 순서지도 직접 준비했어요. 첫 촬영을 문경에서 했는데요. 예배드리는데, 2백 명이 넘게 모였어요. 은혜 중에 잘 마쳤죠. 사실 고사를 지내는 이유가 무사고를 바라는 마음이거든요. 예배드리고 사고 나면 고사 안 지내서 그랬다고 할까 봐 은근히 걱정이 되었어요. 그런데 주연 배우가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났어요. 아주 크게 다쳤어요. 믿지 않는 후배였는데 나를 원망할까 봐 괜히 부담이 되더군요. 입원한 후배를 찾아갔는데, 그 후배가 보자마다 대뜸 이러는 거예요. “형님, 할렐루야. 감사해요. 형님이 예배 드려서 하나님이 이만큼 돌봐 주신 거예요. 감사해요. 형님.” 어찌나 감사하던지요. 하나님이 이런 분이셔요. 

 

신학교 마치고 교회를 개척하셨나요?
어렵게 신학교 마치고 집에서 교회를 시작했어요. 그 즈음에 한 대학교에서 예술 아카데미를 만들겠다고 해서 도왔었는데, 총장이 바뀌면서 백지화가 되었어요. 그때 처분해야 하는 설비 중에 접이식 의자가 있어서 제가 50개를 구해 왔죠. 그 의자를 집에 오밀조밀하게 펼쳐 놓고 시작했어요. 그렇게 ‘열린문교회’가 탄생했죠. 점점 많은 사람들이 오는데, “탤런트 임동진이 목사가 됐다며? 구경이나 해 보자”, 이런 마음으로 오는 사람들의 눈빛이 느껴졌어요. 그런데 그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우리 교우가 되었어요. 목회 참 재밌게 했어요. 행복했죠. 어르신들이 많으셔서 어머니, 아버지, 형님 모시듯이 했어요. 9년 7개월 목회하고 교단이 정한 나이에 교회를 떠났죠.

 

목회하면서도 다양한 활동을 하셨죠?
꽤 오래 전에 기독교 극단 <예맥>을 만들어서 꾸준히 활동했어요. 어떤 작품이든지 성경적인 장면을 집어넣어서 성극으로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사실 인생의 모든 사연들이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다 성극이에요. 아울러 CBS <새롭게 하소서>를 진행하면서 하나님이 다양한 간증을 듣게 하셨어요. 저마다의 인생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시간이었죠. 한 번은 신경외과 전문의로 일하시는 장로님이 나오셨어요. 제가 겪은 질병에 대한 간증을 들으시고, 한 번 병원으로 오라고 하셔서 진료 기록을 챙겨서 찾아갔어요. 한참을 보시더니 말씀이 없으신 거예요. 상황이 안 좋은가 싶어 내심 걱정이 돼서 제가 먼저 여쭈었죠. “박사님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 봐요?” 그랬더니 “목사님, 하나님이 목사님을 위해서 여러모로 수고 많이 하고 계시네요.” 이러시는 거예요. 눈물이 핑 돌았어요. 여러모로 부족한 아들 챙기시기 위해서 우리 하나님이 저 때문에 정말 수고 많으시구나 싶었죠. 어느 인생인들 돌봄이 필요 없겠어요? 하지만 저는 손이 많이 가는 인생을 살았거든요. 이렇게 부족한데, 쓰임 받고 있는 인생을 살고 있으니 그저 감사할 뿐이죠.

 

가족의 응원과 지원도 목사님께는 큰 힘이 되었을 거 같아요. 더욱이 자녀들이 아버지와 같은 직업으로 일하고 있다고요?
그러네요. 일단 아내가 부족한 남편 일으켜 세우려고 기도 많이 하고 애 많이 썼죠. 결국 저 공부 끝나고, 자신도 공부해서 지금 여러모로 가정 사역에 쓰임받고 있어요. 아내의 형제 중에 사모가 세 사람이에요. 막내 동서 부부는 이탈리아 피렌체 한인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죠. 동기간이 신앙으로 똘똘 뭉치다 보니 늘 기도로 연결되어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딸들은 배우로 자신들의 달란트로 쓰임받고 있고요. 아들은 원래 캐나다 밴쿠버에서 배 타고 한 시간 반 떨어진 밴쿠버 아일랜드에 있는 나나이모에서 원주민 사역을 했어요. 오랫동안 사역하다가 지금은 미국 시애틀 옆에 있는 타코마에서 이민 목회를 하고 있어요. 가끔 통화하면서 하나님 은혜로 잘 감당하고 있다는 소식 들을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가 저절로 나오죠. 딸들은 배우 후배지만, 아들은 목회자 선배예요. 제가 도움을 많이 받았죠.

 

이제 인생의 희로애락을 여쭙겠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언제일까요?
부모 마음으로는 자녀들이 잘 된 순간이 가장 기뻐요. 아이들이 자기 할 일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습은 부모로서 최고의 기쁨이죠. 개인의 신앙으로는 기도 응답이 실체로 나타날 때죠.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다는 기쁨은 체험하신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목회자로서는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올 때! 그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죠.

 

인생에서 가장 화가 나거나 억울했던 순간은 언제일까요?
말씀드린 대로 제 성장 과정이 조금 아픕니다. 어머니가 어린 저를 두고 세상을 등지셨어요. 그것이 가장 큰 아픔이었어요. 지금 이 나이에도 어머니를 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워요. 지금도 어머니가 늘 그립고요. 천국에는 가셨을까, 가셨으면 곧 만날 텐데, 그런 마음을 갖고 있죠. 사실 그리우면서도 어머니에 대한 분노도 있어요. 왜 나를 버리고 떠나셨을까?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안 계시다는 건 그야말로 큰 아픔이고 고난이죠. 그런 저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붙들어 주셔서 목사라는 이름까지 받게 되었네요.

 

인생에서 가장 슬펐던 순간은 언제였을까요?
부모님이 떠나셨을 때의 슬픔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테니 하나를 덧붙이면 사람들이 내 마음을 몰라줄 때 참 슬퍼요. 목회하면서도 의심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배우가 인기몰이 한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 소리 들으면 저의 진심을 몰라주는 것 같아서 슬프죠. 목회자로서는 제가 돌보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날 때 마음이 정말 무너져요. 내가 부족해서 저들이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는 정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그러다가 그분들이 다시 돌아오면 정말 다윗처럼 춤추게 되죠.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을 언제일까요?
목사가 목회를 하는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영혼 구원이죠. 구원은 영혼의 구속을 넘어 인생의 수렁에서의 구출과 어려운 이웃을 위한 구제도 포함하죠. 그런 혜택을 누리지 못했던 사람들이 구원의 반열에 서서 기뻐하며 변화된 모습을 볼 때 누리는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죠. 큰 어려움을 겪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사람들이 변화된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수고와 역사를 눈앞에서 느낍니다.

 

인생을 한 권의 책으로 비유한다면 목사님 인생 책의 다음 챕터는 어떻게 펼쳐질까요?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저는 아직 할 일이 많아요. 일단 주님 주신 달란트로 무대에 계속 설 겁니다. 또한 주님을 증거하는 사명을 받았으니 복음 전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을 거예요. 또 바람이 있다면 정연희 작가의 장편소설 <내 잔이 넘치나이다>를 영화로 만들고 싶어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27살에 세상을 떠난 실제 인물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인데요. 은혜가 큽니다. 이 작품뿐 아니라 크리스천 문화 콘텐츠가 대중에 확산되는 데 작은 도움이라도 되면 좋겠습니다.

 

저를 비롯한 「빛과소금」 독자들에게 인생을 성찰할 수 있는 질문 하나 해 주세요.
공교롭게 인터뷰가 있는 오늘 CGNTV에서 녹음을 하고 왔어요. 25년 동안 웨스트민스터교회에서 책임 목회를 하던 ‘R.T 캔달 ’목사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어요. “지금 죽는다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당신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내가 널 왜 천국으로 데려가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저도 사실 당황스러웠죠. 흔히 말하는 우리 집은 몇 대째 신앙인이고, 저는 이런 직분을 가지고 이런 사역을 했다는 말은 정답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날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내 죄를 짊어지시고 다 사해 주셨기 때문에 저는 천국에 갑니다. 하나님은 이런 답변을 기다리고 계세요. 저도 감히 이 질문을 여러분과 제 자신에게 하고 싶어요. “호흡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내가 왜 너를 천국에 데려가야 하느냐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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