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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실절 설교 상식을 넘어서지 못하는 믿음-누가복음 24장 1~12절
초실절 설교 상식을 넘어서지 못하는 믿음
누가복음 24장 1~12절

김대조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겸임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영국 에버딘대학교(Th.M.), 런던바이블칼리지(Ph.D.)에서 설교학을 공부했다.

본문 연구.

유월절
유월절은 오순절(칠칠절), 장막절과 함께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 하나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구원의 사건에서 유래되었다(출 12장; 신 16:1~7).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백성의 지도자로 세우시고, 그를 애굽 왕 바로에게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 내셨다. 유월절은 바로 이러한 역사의 현장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랜 기간 동안 애굽의 압제하에 많은 억압과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다(출 1:8~14).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고통을 보시고 친히 개입하셨다(출 2:23~25). 하나님의 개입은 열 가지 재앙으로 나타나게 되고, 장자 재앙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던 날 밤 애굽인들은 모든 장자와 생축의 첫 새끼가 죽임을 당하는 재앙을 맞이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 재앙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흠 없는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고, 죽음의 천사는 그 피를 보고 그 집을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유월절은 ‘넘어가다’(Passover)라는 의미를 지닌 ‘페사흐’(xsp)로 불리게 되었다(출 12:27). 이것을 기념하여 구약의 유월절 의식은 1월 14일 저녁에 어린양을 잡고, 무교병을 먹으면서 지키는 절기가 되었다. 유월절은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장자의 죽음을 면하게 된 것에서 생겨난 절기다(출 12:21~30).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애굽 사건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구원과 해방의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날을 여호와의 절기와 영원한 규례로 삼아 자손 대대로 지킬 것을 명령하셨다(출 12:14, 27).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둘 장소인 성전에서 유월절을 지킬 것을 명령했다(신 16:2). 그렇지만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 절기를 잘 지키지 못했던 것 같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입성 하고서 유월절을 지킨 이후(수 5:10~11), 왕정 시대 히스기야(대하 30장)와 요시야 왕 때(왕하 23:21)1를 제외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을 지켰다는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 의식을 본격적으로 지키기 시작한 때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부터인 것 같다. 에스라서는 포로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이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중심으로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켰음을 보도한다(스 7장). 신구약 중간기 시대에 들어가면서 유월절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유월절 의식을 행하면서 모세 시대에 경험했던 민족적인 해방을 회상함과 동시에 앞으로 도래하게 될 메시아의 구원과 해방을 대망하게 되었다.
유월절 전날 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행하시며 유월절의 의미를 자신에게 적용하셨다(마 26:17~28). 유월절 어린양의 살과 피는 곧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에 대한 예표로 설명하신다. 구약의 유월절 의식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양의 고기를 먹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신약 시대에 유월절은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죽으신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예표하는 날이요,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체적으로 인류에게 나타나신 날로 이해될 수 있다(롬 5:8).

무교절
무교절(xtwcmh gx하그 하마초트)은 유월절 다음 날부터 일주일 동안 계속되는 절기로서 누룩이 들어 있지 않은 떡을 먹는 절기로 알려졌다(출 23:15). 유월절과 무교절은 연이어서 지켜지는 절기이기 때문에 8일간의 유월절이라고도 불린다.2 무교절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거주지에서 누룩은 엄격히 금지되었다(출 12:15, 18~20; 레 23:6; 신 16:3, 8).
이스라엘 백성이 누룩이 없는 떡을 먹는 것은,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이 밤중에 급히 애굽에서 나오느라 누룩을 넣은 떡을 만들 겨를이 없었음을 회상하기 위함이며(출 12:14-20), 둘째로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인의 신분으로 바뀐 것, 억압과 고통의 장소인 애굽을 떠난 출애굽의 기적을 잊지 않기 위함이었다. 무교절 기간 7일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은 매일 제물을 하나님께 올려 드려야 한다(레 23:8; 민 28:19~24).
무교절의 첫째 날과 마지막 날은 노동이 금지되었는데(레 23:7~8),3 이날에는 농사일과 장사를 중지하고 하나님 앞에 성회로 모이는 안식일로 지정되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무교절 기간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고 가정에서 누룩을 철저히 제거하는 풍습을 갖고 있었다. ‘누룩’은 성경에서 죄와 위선을 상징하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는다. 마태복음 16:6을 보면 예수님께서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신다. 또한 누가복음 12:1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외식’으로 표현한다. 물론 누룩이 천국 비유로 긍정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마 13:39), 무교절의 의미에서는 누룩은 ‘외식’뿐 아니라 죄가 누룩처럼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성도들을 가리켜서 ‘누룩 없는 자’라고 말한다(고전 5:7~8).4 바울은 성도들이 흠 없는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은 자로 누룩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말한다.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된 것처럼 무교절의 의미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무교절은 유월절 다음 날로 예수님은 니산월 15일 무교절, 즉 예비일에 무덤에 계셨다(막 15:42~43).5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무덤에 계셨지만 예수님의 죽은 몸이 무덤 가운데서도 부패되지 않을 것을 예언한 것이었다(시 16:10).

초실절
초실절은 유월절 후 이틀째 되는 날, 즉 무교절 다음 날인 니산월 16일에 드리는 절기다(레 23:9~14). 초실절은 보리 추수가 시작되는 시점에 수확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날이다. 따라서 초실절은 첫 이삭의 절기라고도 하며, 그 시기는 안식일 다음 날로 언급된다(레 23:11).6 초실절에 이스라엘 백성은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께 드려 요제로 감사의 제사를 드린다.
처음 난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듯, 성경에서도 처음 난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하나님은 농사를 지어서 얻는 모든 농산물의 첫 열매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선언하셨다(출 22:29; 23:19; 34:26; 신 18:4; 26:2; 민 15:20~21). 이스라엘 백성은 첫 열매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앞으로 있게 될 보리와 밀 추수에서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실 것을 소망했다. 따라서 초실절은 수확의 첫 열매(이삭)를 바쳐 봉헌하는 날이며 동시에 앞으로 있게 될 풍성한 수확을 기원하는 날이다.
초실절의 의미는 신약에 와서 부활의 첫 열매(이삭)이신 예수님과 연결된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자신이 유대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 제3일에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다(막 8:31).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함께하시고 그 다음 날 십자가 죽음을 당하셨다. 그리고 예언하신 대로 유월절이 지난 안식일 다음 날(마 28:1),7 곧 첫 이삭 절기인 초실절에 부활하셨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20(“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초실절의 성취로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프란시스(Francis)가 말한 대로 초실절은 바로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예약된 시간”이었다.8 바울은 또한 장차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에 대한 부활을 말한다(고전 15:23).9 첫 열매가 맺히면 그 다음 열매들이 맺히게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자들이 때가 되면 부활하게 될 것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초실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동일한 부활의 약속을 바라보게 하는 절기다. 이것이 바로 초실절이 우리에게 선포하는 메시지다.


1.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왕하 23:22).
2. K. Howard & M. J. Rosenthal, The Feasts of the Lord (Thomas Nelson, 1997), 65.
3. “그 첫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너희는 이레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일곱째 날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레 23:7~8).
4.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고전 5:7~8).
5. “이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막 15:42~43).
6.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레 23:11).
7.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마 28:1).
8. William W. Francis, Celebrate the Feasts of the Lord (Salvation Army Natl. Pubns., 1998), 46~47.
9.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 15:23~24).


설교문

서로 질문을 한번 해봅시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약 15년 전,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공부한, 당시 감리교신학대학 학장이었던 변선환 교수는 기독교만 유일한 구원의 교리가 있다는 것은 틀렸으며(천동설처럼),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여 교계의 파문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소위 ‘종교 다원주의’를 표방한 것입니다. 이런 분이 부활을 믿을까요?
이런 자유주의 학자들의 주장으로 인해 예수님의 부활을 둘러싸고 많은 논쟁을 벌였습니다. 일부 신학자들은 ‘예수는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살아났다’고 봅니다. 실제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부활을 일종의 신앙인의 신념으로 봅니다.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으로 일어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념이 오늘날 사회의 정의로 나타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그럴듯하지요), 안 보이는 천국보다 보이는 현실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 사회 정의가 우선이다’ 등등을 주장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성경의 모든 신화적인, 초자연적 요소들(오병이어, 물 위 걷기, 나사로의 살아남 등)을 제거해야 현대인이 성경을 믿을 거라면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 않는 모든 것이 신앙의 걸림돌’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 외에도 ‘여자들과 제자들이 본 무덤은 다른 무덤이었다, 제자들이 훔쳐 갔다, 허깨비를 보았다는 환상설, 제자들이 꾸며 냈다는 날조설 …’ 등의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논리와 상식을 가지고 접근하지요.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상식과 이성으로 연구하고 분석해서 부활을 정확히 이해하고 부활 신앙을 체험하고 경험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닌 제자들은 어떠했을까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구약 시대 출애굽의 유월절 후 이틀째 되는 날, ‘초실절’이라 불리는 부활절에 우리가 가진 믿음은 어떤 수준의 믿음인지를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 진단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믿음은 어떤 믿음인지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 각자에게 이 시간 깨닫게 해 주시고 이 부활 주일에 꼭 필요한 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부활을 만난 제자들의 반응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신 후 사흘째 되던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을 때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옮겨져 있었고,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두 천사가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알려 주면서 갈릴리 계실 때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라고 말해 줍니다. 마침내 여인들은 예수님이 이전에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을 열한 사도와 모든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그런데 의외의 반응이 나옵니다. 너무 좋아하고 기뻐해야 할 사람들인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눅 24:11)에서 보듯이 “허탄한 듯이 들려”라고 표현됩니다. 이 의미는 의학 용어로 ‘들뜨거나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의 지껄임’, 영어로는 ‘허튼소리’(nonsense)처럼 들렸다는 말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제자들은 3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고 이미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눅 9:2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눅 18:32~33). 그럼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손과 발을 보여 주셨을 때조차도 제자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눅 24:41).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보다 자신들의 상식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배운 말씀과 신앙보다 현실이 그들의 마음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도 소위 좀 믿음이 더 있다고 하는 수제자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12절을보면 그나마 베드로는 일어나 급히 달려 무덤에 가서 확인을 합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있던 곳에는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만 남아 있을 뿐, 무덤이 비어 있었고 그는 이를 어찌된 일인가 이상해하면서 돌아가는 장면입니다. 조금 달랐지만 그 역시도 상식을 완전히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도마는 무엇이라 합니까? “…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 지극히 상식적인 믿음입니다. 보고 이해되어야 믿는 믿음입니다.

부활을 보는 우리의 반응
우리는 어떠합니까? 혹시라도 누가복음 24:11에 나타나는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처럼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정말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영원한 천국으로 갈 것을 믿습니까? 영광 가운데 부활할 것을 믿습니까? 혹시 막연하지 않습니까? 부활, 그런 것은 잘 모르겠고 그저 마음의 평안을 위해, 교양 정도로 생각하시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요. 은연중에라도 성경에 나오는 ‘오병이어, 물 위를 걷는 예수님, 죽은 나사로의 살리심’ 같은 초자연적인 사건은 넘겨 버리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부분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생활은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의 생각에 갇혀 사는 신앙인의 모습은 아닙니까? 기독교 신앙에 부활이 없다면 불교, 이슬람과 같은 도덕적인 종교일 뿐입니다.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살다 알 수 없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앙의 결론을 분명히 내립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 15:14).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이 없다면 모든 것은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생활이 힘든 이유가 무엇일까요? 부활에 대한 분명한 소망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녀도 부활에 대한 분명한 그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구속이며,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이다’란 생각에 머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늘 십자가, 헌신, 희생, 인내와 같은 단어들에 자신들을 머물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 다시 오실 날이 너무 아득해 보이는 반면에, 현실이 너무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이 너무 좋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상식선에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십자가의 삶, 희생, 헌신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의 삶에 희생과 헌신의 부분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과정이지 결론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이 헌신이, 희생이, 십자가가 전부라면 얼마나 불쌍할까요. 교회에 드린 수많은 시간들, 남들처럼 마음껏 놀아 보지도 못하고 얼마나 억울합니까. 바울도 그렇게 말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저는 ‘균형’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자주 사용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균형이 무엇일까요? 예수님도 믿고 세상도 누리는 것일까요? 세상이 인정할 만큼만 신앙생활하기입니까? 양다리 걸쳐 적절하게 대처하기입니까? 소위 ‘너무 깊이 빠지지 않기’, 상식적인 신앙생활이 균형일까요?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는 중립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느냐 마느냐’입니다. 부활은 상식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상식의 종교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성과 논리의 인정을 받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사실 기독교는 점잖은 종교가 아닙니다. 초대 교회 때 사람들이 다 미쳤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행 26:24)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소위 ‘미친’ 모습이 신앙인입니다. ‘부활’을 어떻게 믿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죽었다가 살아납니까? 그러나 부활을 믿고 살아가는 멋진 신앙인들이 우리 주위에 많습니다.

부활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
저는 부활의 믿음을 가진 분들을 보았습니다. 세상이 보면 ‘바보요, 어찌 보면 미친 모습’ 이지요.
몇 년 전 저에게 제자 훈련을 받은 한 집사님의 고백을 기억합니다. 열 달을 기다려 태어난 너무도 예쁘고 귀한 아들, 그러나 가슴 아프게도 태어나서 얼마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아기 앞에서 그의 가슴에서 터져 나온 것은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라는 찬송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집사님은 부탁했습니다. “목사님, 이 찬송을 하관 예배 때도 불러 주십시오.” 상식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이것이 바로 부활의 믿음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제 마음속에 한 사람이 늘 있습니다. 김준곤 목사님입니다. 목사님께 신희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나이 30세에 어느 날 다가온 위암 4기의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가냘프고 순하고 얼굴도 곱고 공부도 잘하고 마음과 성품도 너무 고운 딸이었습니다. 김 목사님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남편과 두 딸을 남기고 그 딸은 떠났습니다. 김 목사님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신희가 토할 때마다 나는 내 죄를 창자까지 토했고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주님과 신희를 번갈아 부르며 숨 쉬듯 기도했으나, 내 생애의 가장 애절한 기도는 무참히 거절당했다.”
그렇게 사랑하는 딸이 30세의 어느 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나던 날, 김 목사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간이 흐른다. 나는 언어도, 행동도, 존재조차도 정지된 어떤 제로점에 선 것이다(be nothing, do nothing, say nothing). 십자가상의 주님을 쳐다본다. 가시관 밑으로 피가 빗물처럼 줄줄 흐르고 있다. … 나의 언어, 행동, 생각, 존재조차 정지된 잃어버린 시간이었다. … 나는 주님이 섭섭했던 것이다. … 이윽고 내게는 한 기적이 일어났다. 깊고 깊은 존재의 밑바닥, 주님이 뚫어 버린 지하에서 지하수가 솟듯이 세미한 음성으로 한 찬송이 터지고 있었다. 찬송의 영이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분명 내 찬송이 아니다. 내 속의 성령이 내 대신 부른 찬송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살아 계셨다. 그때 그곳에도 나와 함께 나 위에 계셨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믿음입니다. 부활의 신앙입니다.
얼마 전, 우리 교회에 31세의 나이에 예기치 못한 암으로 죽음 앞에 선 한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두세 달이면 태어날 자신의 아기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점점 희미해져 가는 의식 앞에서 그 형제는 이렇게 힘을 다해 소리쳤습니다. “가서 전해 줘!, 가서 전해 줘!” 그리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무슨 의미였을까요. 그 형제와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제 마음에는 ‘목사님, 가서 전해 주세요.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고요.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요 …’라고 들렸습니다. 그가 분명하게 예수님을 붙잡고 부활을 믿은 형제였기에 그는 영원한 생명의 부활, 부활의 예수님을 세상에, 그리고 태어날 자신의 아들에게 전하고 싶었다고 확신합니다.
상식으로 이런 믿음이 가능할까요? 저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부활의 믿음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이지요. 상식에 머무는, 우리의 이성에 머무는 신앙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의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 속에 갇히시는 작은 분이 아닙니다. 이론과 지식적인 신앙은 삶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교회가 교회 되게 하지 못합니다. 상식은 헌신된 신앙인,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는 신앙인을 만들지 못합니다. 안타깝지만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없이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아침 누가복음 24:5~6을 통하여 성령의 음성을 들읍시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상식에 머무르지 맙시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생명인 종교입니다. 부활은 상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활은 지식이나 이론이 아닙니다. 상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 이상 상식에 머무르는 믿음 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상식을 넘어 부활의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선명해야 합니다. 상식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초자연적인 역사를 믿읍시다. 예수 부활, 나의 부활, 우리는 부활의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달라집니다. 능력이 됩니다. 힘이 됩니다. 할렐루야! 바울은 고린도전서 15:20에서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휘둘리는 한국 교회는 바울의 이 부활에 대한 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가 본질적인 생명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믿음, 구원의 조건에도 부활은 핵심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10:9). 진정한 구원을 얻는 믿음은 부활을 믿는 믿음입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가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왜요? 그 보화 때문입니다. 하늘의 영광, 부활의 소망이 분명한 성도는 현실에, 아픔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소망은 우리 삶의 모든 십자가를 능히 이겨 낼 힘을 줍니다. 십자가는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더 좋은 천국을 늘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믿으십시오. 내 인생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김대조 |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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