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로 전개되는 대작 사이에 끼어 방영되었던 드라마 〈호텔 델루나〉가 비교적 선전을 하고 막을 내렸다.  삼도천이니 윤회니 하는 타종교적 세계관을 중심축으로 한 드라마를 소재로 진지한 묵상을 하자니 부적절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드라마 동영상 ‘짤’을 몇 개 보다 보니 나누고 싶은 ‘기독교적’ 관점이 있어 정주행을 했다. 내용에 대한 인정이라기보다는 상황 혹은 관계에 대한 묵상으로 여겨 주었으면 한다.  드라마를 보며 시청자들이 가장 안타깝게 생각했던 인물은 ‘청명’이었다. 고구려가 망한 뒤에 가솔을 이끌고 중국의 한 봉건영주 휘하에 들어간 아버지 덕분에 타국 공주의 호위대장으로 살고 있는 고구려 청년이다. 성이 ‘고’가 인 것을 보니 필시 고구려의 왕족이거나 높은 귀족 출신이었을 터. 젊은 혈기에 어찌 의협심이 없었을까? 고구려 유민들이 중국인들의 노예로 잡혀가거나 먹고 살기 위해 지나가는 상인을 터는 도적 떼로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도, 동족을 ‘탕진’ 대상으로 삼아야 했던 자신의 처지가 참으로 비참했을 일이다. 그러다 떠돌이 생활을 하는 도적 패거리의 두목 ‘만월’을 사랑하게 되면서 청명은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누이, 누이가 같이 가자고 하면 내가 죽을힘을 다해서 함께할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평소에 같은 고구려 유민 출신인 만월을 ‘누이’라 부르며 능글거리던 청명은, 만월이 새로운 나라(아마도 발해인 듯하다) 건설을 도모하는 곳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가벼운 어조에 담아 자신의 진심을 슬쩍 비춰 보았다. “우리가 같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 청명을 사랑했으나, 적국의 호위대장과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만월은 단호했다.

그리고 이후 ‘불가항력’적으로 벌어진 일들로 인해 만월은 한때 사랑했던 천명을 철저하게 증오하게 된다. 만월의 시점에서 보면 사연은 이렇다. 비록 거절은 했으나 마음까지 칼로 베듯 잘라 버릴 수는 없는 일, 하여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만나려고 달려간 자리에 공주와 군사들이 매복해 있었다. 같은 시간 청명은 만월이 가족처럼 여기는 도적 패거리를 다 잡아 들였고, 결국 만월은 남매처럼 지내던 ‘연우’가 교수형 당하는 모습을 피눈물로 지켜봐야만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잃고서 만월은 청명을 향해 소리쳤다.
“죽인다. 내가 너를 반드시 죽인다.” 미끼가 되어준 공(?)으로 겨우 목숨을 구한 만월은 이 모든 것이 천명의 배신으로 생겨난 일이라고 믿고 공주와 천명의 결혼식 날 복수를 감행했다. 그런데 공주를 죽이고 신부의 옷으로 얼굴을 가린 채 기다리던 만월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 손에 칼을 들고 처연하게 신방으로 들어오는 청명을 보며 혼란스러웠다. 최고의 무사인 청명은 만월의 칼을 서너 번 방어하기만 했지, 이미 목숨을 내어놓은 듯했다. 급기야 주저하는 만월의 칼을 맨손으로 잡고 스스로를 찔러 죽어버렸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렇게 쉽게는 안 되지, 넌 고통 받으면서 죽어야 해. 맨 나중에 죽어야 해. 내가 너의 사람들을 다 죽이는 모습을 보면서 아파하고 괴로워하다가 제일 마지막에 죽어야 해.” 이런 것이 ‘애증’이겠지. 사랑의 무게가 아직 덜어지지 않은 자리에 증오가 더해지니 복잡하고 버거운 감정은 폭발해 버렸다. 이런 만월을 보며 청명은 마지막 순간에 약속했다. “만월, 내 너를 가득 담아 지지 않는 달이 되어 지켜보마.”

“아악, 그래서 천삼백 년 동안 반딧불이 되어 만월이 곁을 지켰다고요?” 시청자들이 제일 안타까워하는 지점이다. 드라마 구성상 서브 남주는 본디 ‘짠내’ 나는 캐릭터이지만, ‘천삼백 년 반딧불’은 너무했다는 반응이다. 원념이 가득한 사람들이 저승으로 가기 전에 머문다는 ‘달의 객잔’ 주인이 된 만월, 이후 천삼백 년 동안 늙지도 죽지도 않으며 살아왔다는 데(이게 가능한지 여부는 드라마를 보며 진지하게 물을 사안은 아니지 싶다), 그 오랜 시간 청명은 말도 못 건네고 모습도 보이지 못한 채 반딧불이 되어 만월이 곁을 지켰다는 거다. 세상에, 죽어가면서 일방적으로 한 약속 하나 지키자고 천삼백 년을 그러고 버티다니!

청명의 사연을 알고 나니 그의 입장도 나름 어쩔 수 없었을 것 같다. 자신이 섬기던 봉건영주가 청명을 오해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만월의 도적 패와 가까이 어울리는 청명을 보며 그가 반란을 꾸미고 있다고 생각했단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패망한 나라의 왕족 출신 호위대장, 그가 가진 군사적 힘은 늘 경계의 대상이었을 터.
청명 하나 목숨을 내어놓는다고 해결될 사안이 아니었다. 자기 가족은 물론 성안에 사는 모든 고구려 유민들과 자신의 병사들도 다 목숨을 잃게 생겼다. 하여 청명을 사랑하는 공주의 제안대로 만월 패거리를 희생양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거다. “만월에게는 구구절절 변명 따위 말아. 그냥 넌 배신자로 살아. 그러면 만월인 살릴 수 있어.”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만월이 걱정만 하던 연우는 어쩌면 그녀의 기질을 잘 알기에 이런 제안을 했던 것이리라. 사연을 다 안다면 만월은 필시 자기 탓이라며 함께 죽는 선택을 할 터, 하지만 청명이 배신자라고 생각한다면 복수를 위해서라도 끝까지 살아남을 테니까. “연우와의 약속이었구나.” 만월도 나중에야(무려 천삼백 년 후에) 사연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의 약속이 모두 커버넌트가 아니라 프로미스라는 점이 나로서는 안타까웠다. 프로미스는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청명은 사랑과 미안함이 가득해서 그리 약속했을 터다. ‘너의 가득한 증오가 사라질 때까지 내가 곁에서 기다릴게.’ 배신자가 되라는 연우의 제안도 실은 일방적이었다. 청명은 그와의 약속도 지켰다. 하여 이래저래 약속을 잘 지킨 성실하고 불쌍한 청명에게 시청자의 애틋함이 몰렸나 보다. 하지만 ‘일방적’인 약속은 오히려 모두를 더 힘들게만 했다. 하나의 상황에 직면하여 쌍방이 함께 마주하고 마음을 모아 서로 합의한 약속, 즉 ‘커버넌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에서 커버넌트에 해당하는 일화는 만월이 무려 천삼백 년 만에 두 번째로 사랑하게 된 찬성과의 약속에서 드러난다. “연약한 구찬성!” 만월은 육신의 제한을 가진 인간인 찬성을 평소 이렇게 불렀다. 하긴, 순간 이동은 물론 각종 초자연적 힘을 구사하는 만월이 보기에 고작 스물 몇 해를 산 ‘인간’ 찬성이가 얼마나 하찮게 보였겠는가? 환생한 청명을 만나면 그를 죽이고 자기도 소멸하겠노라고, 벼르고 또 벼르던 만월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게 애착을 갖고 있지 않은 만월을 어느 누구보다 사랑한 찬성은 오히려 그 연약함을 다 던져 번번이 만월을 ‘소멸’의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냥 사라져 버리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내 존재를 지키려고 자신을 던지는 인간의 사랑, 그 사랑이 천삼백 년 만에 만월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했다. 결국 삶과 죽음의 시간을 인정하고 분노를 다 비운 마음에, 대신 사랑을 가득 채운 채 저승으로 떠나는 만월은 찬성을 마주 보고 약속한다. 얼마가 걸리든 돌아와서 꼭 마주하겠노라고. 찬성과의 사랑만큼은 꼭 기억하고 알아보겠노라고. 그건 찬성의 약속이기도 했다. 당신을 기억하기 위해서, 고통을 잊는 쉬운 선택지는 버린 채, 나도 지금 이 땅에서의 남은 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 내겠노라고. 둘이 마음을 맞추고 뜻을 다하여 함께한 약속, 나는 그것이 커버넌트, 즉 쌍방의 약속이라고 생각한다. 일방적으로 내 기준에서 선언해 버린, 그래서 어쩌면 너에게는 짐이 되고 올무가 될 수도 있을 프로미스와는 다른 약속이다.

“내가 곧 다시 올 것이다. 너희 중에 살아서 내가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늘로 올라가시며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예수님의 이 마지막 말씀은 프로미스일까? 커버넌트일까?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함께했고 하나님나라가 관계적 혁명임을 알았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 약속이 무엇인지 알아차렸을 거라고 믿는다. 예수님과 눈을 맞추고 마음을 맞추며 끄덕였을 것이다. 당신이 다시 오실 때까지, 연약하지만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 내겠어요. 연약한 인간의 삶이 결코 쉽지 않겠지만, 당신이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신 것들을 전하며, 지키며 그렇게 살아 내겠어요. 그러면서 기다리겠어요. 그래서 우리의 기다림은 짐이 아니라 설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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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영은 이화여대와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사회윤리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강의로, 글쓰기로, 그리고 대중 특강으로 사람을 만나면서 삶을 배우고 삶에 관여하는 구체적인 신학을 하려고 노력하며 산다. 저서로 「드라마틱」, 「엄마 되기, 힐링과 킬링 사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