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만으로도 아픔이 나을 수 있어요

people 2019년 05월호 공감만으로도 아픔이 나을 수 있어요 한원주

백 세 인생이 낯설지 않은 요즘 사람들의 관심은 과연 몇 살까지 일할 수 있을까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은퇴 이후의 삶을 걱정하는 이 시대에 90살이 넘어서도 진료 현장에 있는 의사가 있다. 90대 현역의 삶은 건강과 능력이 동시에 충족되어야 하는 축복이다. 경기 남양주시 매그너스요양병원 내과 과장 한원주 박사는 1926년 경남 진주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올곧은 교육을 받고 의사가 됐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의료 현장에 있던 그녀는 50대 이후 30년을 무료 진료 병원에서 봉사했다. 노년기에도 10년 넘게 외로운 환자들을 위해 공감과 치유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한원주 박사를 그녀의 진료실에서 지금 공감한다.
취재 김재원 정리 이승연 사진 한치문

94세이신데, 참 고우시네요. 일이 힘들지는 않으세요?  즐겁죠. 90이 넘었는데도 일할 수 있어서 감사해요. 나를 아직도 어딘가에서 필요로 하니 참 기쁩니다. 요양병원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못 살잖아요. 외롭고, 나이는 점점 들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우울감이 있어요. 이들과 즐거운 이야기도 나누고,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이 참 고마워요. 저보고 은퇴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여기서 힘 다할 때까지 일하다가 하나님 부르시면 그때 갈 겁니다. 하하.

말씀만 들어도 좋습니다. 그래도 90대이신데 건강은 괜찮으신지요?  물론 병은 있어요. 고혈압이 있고, 콩팥도 좋지 않아요. 위장도 그리 좋지는 않아요. 스스로 처방해서 대여섯 가지 약을 먹고 있어요. 그래도 조절할 수 있어서 다행이죠. 제 나이에 이만하면 건강한 것 아닌가요?

그럼요. 건강해 보이세요. 지난 93년 인생 돌아보실 때, 어떤 생각이 드세요?   감개무량하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나이 드니까 아버지,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나요. 두 분 덕분에 그 엄혹한 시기에 태어났는데도 이렇게 살고 있는 거죠. 두 분이 본을 제대로 보여주셨거든요. 두 분은 1900년대 초, 개화된 분위기에서 성장하셨어요. 예수님 믿고 두 분 다 학교 선생님을 하셨죠. 한 동네에서 교회를 같이 다니면서 알게 되셨대요. 삼일운동도 같이 참여하셨어요. 특히 아버지는 진주 지역 주모자 여섯 분 중의 한 사람이었죠. 아버지는 일찍이 독립유공자로서 대우를 받으셨는데, 어머니는 여러 번 신청했는데도 안 되다가 지난해 포상을 받으셨어요.

다행입니다. 두 분이 독립운동 하셨으면 고생을 많이 하셨겠어요.  아버지, 어머니 모두 삼일운동 후에 옥살이를 하셨어요. 당시 형무소가 초만원이어서 좁은 방에 30명이 함께 있었는데, 번갈아 가면서 15명은 서 있고, 나머지는 옆으로 누워 칼잠을 자고 그랬대요. 여성 감옥소는 사정이 더 안 좋아서 어머니가 더 일찍 나오셨죠. 어머니는 출옥 이후 ‘독립애국부인회’에서 일하셨어요. 자금 모아서 상해 임시 정부에 보내는 일을 서울 본부와 같이 진행했는데, 일본 고등계 경찰에게 발각돼서 또 옥살이를 하셨죠. 어머니는 미션스쿨 선생님이셨는데, 출옥 이후 복직이 됐어요. 미션스쿨에서는 독립 운동한 것을 상관 안 했으니까요. 아버지는 출옥하고 몸이 약해지셔서 복직을 못 했어요. 그래도 두 분이 결혼은 해야겠다 싶어서, 4월에 아버지가 출옥하고 12월에 결혼을 하셨대요. 1920년 12월 28일이었죠. 외할아버지가 복음을 일찍 들으셨어요. 그래서 상투 자르고, 머리를 끊고, 예수를 믿기 시작했어요. 여자도 공부를 시켜야 한다며 우리 어머니를 어릴 때부터 공부를 시켰죠. 결혼하고 난 이후에도 아버지가 몸이 안 좋아서, 어머니가 생활을 유지하셨어요. 월급이 20원이었대요. 10원으로 식구들 먹고 살고, 10원으로 아버지를 의사 공부까지 시켰어요.

그래서 그 이후에 아버지는 의사로 사셨군요. 자녀는 몇이나 두셨나요?  딸만 여섯이었죠. 제가 셋째였어요. 그때만 해도 여자아이들 공부 안 시킬 때였거든요. 여섯을 다 공부시키셨어요. 우리 어릴 때 사람들이 “저 집 딸은 저렇게 공부를 시키니 누가 며느리 삼겠는가” 그랬어요. 이모가 서울에서 고등학교 선생님을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우리 큰언니부터 서울에서 공부를 했죠. 큰언니는 무용을 하고 싶어 했는데, 아버지가 의사 되라고 하셔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에 다녔어요. 저도 제 의지는 아니었지만 부모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따라갔고요. 큰언니가 2회고, 제가 7회죠. 지금 생각하면 참 감사한 일이죠.

의과대학 다니실 때 해방이 됐겠군요. 결혼은 어떻게 하신 건가요?   일본에서 철학을 공부하던 친척 오빠가 해방이 되면서 나왔어요. 그 집에 가끔 놀러 가서 저도 책을 좋아한 터라 오빠에게 철학 이야기를 듣고 그랬어요. 어느 날 의과대학 다니던 오빠 친구가 와 있더라고요. 몇 번 만나다 보니 책도 좋아하고 이야기가 통하더라고요. 3년 사귀다가 결혼을 한 거죠. 그때가 1949년 12월이에요.

그러면 신혼의 단꿈도 없이 6개월 만에 전쟁이 났겠군요.   그래서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나대로 잡혀갔어요. 저는 야전병원에 끌려가서 일을 했죠. 어느 밤에 마당에 다 모아놓고, “이제 다 북으로 갑니다” 그러더군요. 못 갈 사람 손들라고 해서 손들었어요. 왜 못가냐고 그래서 “나는 임신 중이다” 그랬어요. 사실 몰랐지만 그렇게 말했죠. 임신 초기라서 나도 힘든데, 다른 사람에게도 폐가 되니 따라갈 수 없다고 했죠. 기다리라고 하고 다른 사람들을 먼저 보내기에, 뒷걸음질 쳐서 수위아저씨 집으로 도망갔어요. 그때만 해도 의사한테는 보급품이 왔었는데, 늘 담배가 들어 있어서 그걸 수위아저씨께 드리고 과자도 나눠 먹고 그러다가 친해졌거든요. 그 집에 숨어 있다가 뒷문으로 도망쳤죠. 집에 와서 지내는데 남편도 우여곡절 끝에 도망을 나왔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이 여러모로 사람을 보내서 도우셨어요. 

그야말로 기사회생이네요. 남편께서도 의학을 공부하셨나 봐요.  의과대학을 다녔는데 나중에 의사가 싫다고 물리학으로 바꿨어요. 의대 그만두면 집에서 학비를 안 주겠다고 하니까 아르바이트하면서 고학을 했어요. 그러다가 국비 연수로 미국에서 공부할 기회가 있었죠. 마치고 들어왔다가 나중에 다시 시카고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하고 메릴랜드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죠.

남편께서도 결혼 전부터 예수님을 믿으셨어요?  아니요. 저를 만나면서 같이 교회에 가게 됐는데, 남편은 공부하고 나는 의사로 바쁘니까 독실한 크리스천이라고 할 만큼 신앙생활을 하지는 못했어요. 교회 가는 건 좋아했어요. 우리 집은 할머니 때인 1909년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했어요. 우리 아버지 8살 때였어요. 서당을 다 마치고 나서, 공부를 더 시켜야 하는데 갈 곳이 없으니까, 할머니가 교회 주일학교 데리고 가서 공부 좀 시켜 달라고 한 거예요. 그때 교회가 미션스쿨을 같이 하고 있었으니까 예수 믿어서 미션스쿨을 들어가게 된 거죠. 어머니도 외할아버지 덕분에 미션스쿨을 다녔고요. 제가 3대째 믿는 거고, 제 증손자까지 하면 6대째 믿는 가정이죠.

대단하네요. 남편이 미국에서 공부하실 때는 어떻게 하셨어요?  그때 저보고 들어오라고 해서 애들 셋을 친정에 맡기고 따라갔어요. 1959년이었죠. 여기서는 산부인과를 했는데, 미국에서 수련의 과정을 다시 밟아서 내과 전문의 자격을 따고 원호병원에서 일했어요. 아이들 두고 떠날 때 고민을 많이 했어요. 큰딸이 초등학교 1학년, 둘째 딸이 유치원, 막내아들이 세 살이었거든요. 가슴이 아팠죠. 돌아오니까 막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더라고요. 1959년에 미국에 갔었는데, 그때만 해도 같이 갈 수가 없었고, 애들 위해서 결국 둘 다 일을 접고 들어왔죠. 저도 병원에서 많이 붙잡았는데 어쩔 수 없었죠. 아직도 애들한테는 많이 미안해요. 그래도 그때 미국에서 내과를 했기 때문에 무료 진료도 그렇고, 지금까지 일할 수 있는 거죠. 하나님의 섭리라고 할까요? 그러고는 남편은 물리학자로, 저는 병원을 개업해서 안정적으로 살았어요.

그때 갑자기 순탄한 인생에서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난 거군요.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왜 그렇게 됐는지는 우리도 몰라요. 그때는 원인을 밝힐 수도 없었죠.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럭저럭 30년을 함께 살았는데, 갑자기 가니까, 돈이고 뭐고 다 귀찮더라고요. 기도밖에 할 수가 없었어요. 하나님한테 매달릴 수밖에 없었죠. 그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너 지금껏 누구보다 잘 먹고 잘살고 편하게 지냈는데, 울고불고하는 건 무슨 일인가. 이제 네 주변도 좀 돌아봐라.’ 정신이 번쩍 들었죠. 아버지께서 그 어려운 시절에도 무료 진료를 참 많이 하셨어요. 그때는 무료 진료하는 의사가 없었어요. 아버지는 있는 재산 다 털어서 고아원 두 개를 세우셨죠. 나도 아버지가 무의촌에서 진료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료 진료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때까지 실천을 못 했던 거죠. 

남편 떠나시고 인생이 바뀐 셈이네요.  병원 정리하고 여기저기 알아보던 중에 뜻있는 분들도 만나고 하다가 ‘기독의사회’ 선생님들하고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회’를 조직했어요. 의료인, 목회자, 사회복지사, 사업가, 평신도가 협력해서 의료선교병원을 세워서 무료 진료를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도시 빈민 대상으로 소규모로 시작했어요. 수술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위해서는 수술비 모금도 했어요. 그런데 막상 치료해 놓으니까 먹고 살길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사회복지사들이 자립하도록 도왔죠. 병은 의사가 고치고, 일은 사회복지사가 찾아주고, 마음은 목사님들이 복음으로 치유해 준 거죠. ‘전인치유진료소’가 만들어진 거예요. 도시 빈민 갱생을 위한 바람직한 모델로 해외 학회에 소개도 되었는데, 독일선교부에서 관심을 보였어요. 독일에서 3년 동안 도움을 받아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죠.

개인 병원 계속하셨으면 돈 많이 버셨을 텐데 힘들 때는 후회하지 않으셨어요?  후회할 틈도 없었어요. 사실 무료 진료소라고 하니까 그때만 해도 사람들이 별 볼 일 없는 의사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미국에서 일하다 왔고, 박사학위도 받았고, 전문의 자격증이 2개나 있다고 소문이 나니까 사람들이 많이 오더라고요. 얼마나 바쁘게 일했는지 몰라요. 어려운 사람 도와줘서 회복되고, 또 고맙단 인사 듣는 것이 좋더라고요. 그때 쌓은 정으로 아직도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어요. 머리 자를 때는 지금도 그 동네 미장원을 가요. 사실 개업했을 때 돈을 좀 벌었어요. 그런데도 무료 진료가 훨씬 행복하더군요. 우리 아버지가 이래서 무료 진료를 하셨구나 생각했죠. 남편 떠나고 53살에 시작해서 83살까지 무료 진료에 푹 빠져 지냈어요.

83살에 무료 진료 사역에서 은퇴하셨으면 그냥 쉬시지 그러셨어요?  83살에 나 혼자 살자니까 따분하기도 하고, 배운 게 있는데 안 써먹기도 그렇고 해서 일을 찾았죠. 사실 미국에서 공부하랴, 병원 일하랴, 그래서 자식들 뒷바라지를 제대로 못 했어요.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키웠고, 크고 나서는 저희들이 알아서 잘 했거든요. 엄마 노릇도 제대로 못 했는데 나를 모시라고는 못 하죠. 그때 마침 동서가 요양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이곳을 추천하더라고요.

83살에 새 직장을 구하실 때만 해도 94세까지 일하실 거라고 상상도 못 하셨죠?  한 몇 년 하겠나 싶었어요. 사실 83살에 일하겠다고 하니까, 여기 이사장님도 선뜻 결정을 못 했어요. 저 보겠다고 제가 일하는 병원에 찾아왔더라고요. 환자가 잔뜩 앉아 있고, 내가 컴퓨터로 일하고 하니까, 당장 일하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돈은 많이 안 줘도 되니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게 해 달라고요. 일할 수 없게 되면 요양병원에서 하나님 부르실 때까지 환자로 있게 해 달라고 했죠. 흔쾌히 허락하더군요.

병원 사람들도 많이 놀랐겠어요. 83세 의사 할머니가 오셨으니까요.  처음에는 감독기관에서 감찰도 나왔었어요. 내가 진료하는 것 보더니 아무 말도 못 하더군요. 컴퓨터도 척척 사용하니까요. 사실 처음에 여기 오니까 컴퓨터로 처방을 안 하고, 손으로 쓰더라고요. 무료 진료소도 다 전자차트를 썼거든요. 제가 건의해서 시스템을 다 전산화해서 더 편해졌죠. 주중에 닷새는 병원에서 먹고 자고, 금요일 오후에 집으로 갔다가 주일 예배드리고 오후에 들어와요. 주말마다 버스, 전철 네 번씩 갈아타고 다니는데 그때가 그렇게 좋아요. 세상 구경이 재밌잖아요. 말 시키는 사람들하고 이야기도 나누고요. 애들은 지금도 그만하라고 해요. 걱정된다고, 내가 많이 늙었다고 하죠. 하지만 지금 안 하면 또 뭐해요. 사실 무료 진료를 계속하고 싶었는데, 여건이 안 되더라고요. 지금도 주말에 여의사회 봉사하는 데 있으면 따라가고 그래요. 휴가 때는 의료 선교하러 갑니다. 재밌어요. 중국은 12년을 갔어요. 몽골은 2년째 가고 있고, 방글라데시, 필리핀, 태국, 캄보디아도 갔었죠. 그건 또 더 즐거운 일이에요.

2017년에는 한 의료재단에서 주는 성천상까지 받으셨어요. 상금 1억 원을 다 기부하셨다면서요?  그건 뭐, 다 나눠줬어요. 저는 이제 필요 없어요. 하하.

참 대단하십니다. 환자들 돌볼 때는 어떤 마음이세요?   환자들이 내 형제, 내 육신, 내 자식, 내 친한 친구다, 이런 생각을 하죠. 사실 다 하나님의 피조물, 하나님의 자녀잖아요. 그건 외국에 가도 같은 마음이에요. 백 년 전에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병원을 세웠어요. 그들은 예수님처럼 가르치고, 설교하고, 치유했죠. 나는 90년 전에 병원에 다녔어요. 서양 사람들이 와서 진료하던 시절에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예수를 믿었어요. 가르침을 받고 설교를 듣고 치료를 받은 거죠. 그리고 또 그렇게 사셨어요. 그래서 우리 집안이 지금까지 신앙으로 이어져 왔어요. 1909년부터 2019년까지 6대째 크리스천이고, 집안에 믿지 않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저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환자를 돌보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그대로 해요. 이야기 들어주고, 공감해 주고, 사랑해 주죠. 그분들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거죠. 사실 공감만 해 줘도 아픈 게 나을 수 있어요.

요양병원 한 바퀴 회진하시면 매일 수십 명의 환자를 만나시는 거잖아요.  나는 나이가 들어서 이제 환자를 30명 정도 맡고 있어요. 환자들하고 만날 때마다 이야기를 많이 해요. 어떤 때는 노래도 같이하고요. 집안 사정을 제가 다 알아요. 요양병원 안에서 치매 덜 걸린 사람들을 대상으로 ‘청록회’를 만들었어요. 거기서 수요일마다 치매 예방 상식도 가르치고, 몸 관리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가르치고, 새로 나온 정보도 전해 주고 그래요. 아주 좋아해요. 저도 좋고요. 

참 행복한 삶을 살고 계시네요. 부럽습니다. 끝으로 「빛과소금」 독자들에게 성찰할 수 있는 질문 하나 해 주세요.  당신은 신앙생활 하면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돕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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