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은 용서에 이르기 위한 도구

people 2019년 04월호 공감은 용서에 이르기 위한 도구 안경선 목사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 일제 강점기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1902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해, 1926년부터 전도사로 일하면서 밀양에 수산교회, 울산에 방어진교회, 남창교회, 부산에 남부동민교회, 양산에 원동교회 등을 개척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손불’이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불같이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는 평양신학교를 거쳐 윌슨 박사가 한센병 환우들을 위해 세운 애양원교회 전도사로 부임합니다.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일제로부터 종신형을 선고받아 5년간 옥고를 치릅니다. 그는 1948년 10월, 여수·순천사건에서 두 아들이 순교하는 참상을 겪습니다. 그 후 자신의 아들 둘을 가해한 청년 안재선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합니다. 결국 그는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일에 인민군에게 끌려가다가 순교합니다. 그 이름 손양원 목사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로 용서의 열매를 남겼습니다. 양아들 안재선은 1979년, 아들에게 ‘신학교에 가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안재선의 아들 안경선 목사는 지금 함안에 있는 손양원 목사 순교 기념관을 지키고 있습니다. 안경선 목사의 인생과 지금 공감합니다.
취재 김재원 정리 이승연 사진 정화영

‘손양원기념관’ 관장으로 계시다고요?  네. 손 목사님 고향인 경남 함안군 칠원읍에 기념관이 있어요. 연간 3만 5천 명이 다녀가죠. 인근에 주기철 목사님 기념관이 있어서 하루 성지순례 일정으로 많이들 찾아오십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가르침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남아 있으니까요.   손양원 목사님이 남기신 뜻은 저항, 희생, 용서이지요. 나라 사랑의 마음으로 일제 탄압 앞에서 저항했던 마음, 또 자신을 희생해서 한센인들을 섬겼던 희생의 마음, 아울러 온 국민이 알고 있는 용서의 마음까지 한국교회가 마음에 새겨야 할 정신입니다.

사실 이런 인터뷰가 불편하시지 않을까 싶어서 망설여지기도 했습니다.  누구나 인생에서 지워지지 않는 사건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저 역시 상처는 평생 가겠죠. 더군다나 손양원 목사님 하면, 모든 한국교회가 다 아는 분이니까요. 2010년에 간곡한 부탁을 받고 일반 매체와 인터뷰를 했는데, 제목을 있는 그대로 뽑으셨더라고요. 그때는 많이 힘들었죠. 지금까지도 손양원 목사님에 대해 이야기하면 가해자인 제 아버지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잖아요. 단순한 가해자라고 해도 불편한데, 손양원 목사님께 가해한 거니까, 저는 그 부분에서 평생 자유로울 수가 없겠죠. 그래도 제게 맡겨진 사명이라는 마음으로 인터뷰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훨씬 편합니다.

어린 시절, 아들 안경선에게 아버지 안재선은 어떤 분이었나요?  엄격한 아버지셨어요. 그때는 이해 못 했지만 그런 상황이다 보니 아들을 좀 엄하게 키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나 봐요. 그때 아버지들은 또 다들 그러셨고요.

아버지와 가장 기억나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평상시 데면데면한 사이였어요. 제 아들이 고1인데, 저도 아들과 대화를 자유롭게 못 합니다. 저와 아버지도 그랬어요. 제가 고3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요. 임종 직전에 아버지 손잡고 찬송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불러드렸어요. 그러고 나서 아버지가 저에게 신학교 가라고 말씀하시고 어머니와 동생들 부탁하시더니 운명하셨어요. 그때를 잊을 수가 없어요.

깜짝 놀라셨겠네요. 그때까지는 아버지 사연을 모르셨나 봐요?  몰랐어요. 그러니까 의아했죠. 왜 신학교를 가라고 하셨을까.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생전 안 하시던 말씀을 하시니까요. 그때 장례식장에 손 목사님 가족들이 오셨어요. 제게 안용준 목사님이 쓰신 「사랑의 원자탄」 책을 주고 가시더군요. 장례 다 치르고 제 방 책상 위에 있던 「사랑의 원자탄」을 읽기 시작했어요. 몇 장 넘기지도 않았는데, 여수·순천 사건이 나오고, 아버지 이름 석 자가 나오더라고요. 그때 알았죠.

한참 민감한 시기에 혼자 겪었어야 할 충격이 컸겠어요.  그때 다시 지독한 사춘기를 앓았죠. 그전까지는 왜 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을까가 늘 불만이었어요. 용돈 한 번 제대로 탄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다가 책을 읽는데, 아버지가 손 목사님 두 아들을 가해한 장면에서 큰 충격을 받았죠. 그때는 지독한 반공교육을 받고 자랐거든요. 그런데 아버지가 그 일에 앞장섰다는 것, 또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손양원 목사님 두 아들에게 가해했다는 사실이 엄청난 충격이었어요. 정체성 인식에 대한 혼란이 엄청났습니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니까요.

그래도 바로 신학교를 가셨네요.   유언은 유언이니까요. 신학교에서도 ‘나는 과연 주의 종이 될 자격이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어요. 심지어 살기 싫어졌어요. 2년 동안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할 정도였죠. 내 스스로 목숨 끊기는 무서웠고요. 그렇게 2년 동안 몸 관리를 못하니까 급성 폐렴이 왔어요. 폐와 관련된 질환은 거의 다 앓았어요. 약도 안 먹고 병원에도 안 가고 치료를 거부했어요. 하나님 뜻이라면 기적적으로 고쳐주실 것이고, 뜻이 없으면 이대로 하나님께서 내 생명 거두어 가실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깨어 보니까 병원 중환자실이었습니다. 그때 폐 한쪽을 절제했죠.

그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신 건가요?  병상에서 회복되는 중에 주일에 종소리가 들리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나더군요. 하나님이 마음속에서 질문을 하셨어요. ‘그렇게 아버지 이야기가 수치스러우냐?’ 제가 다시 되물었어요. ‘손양원 목사님은 온 나라가 다 아는 목사님인데,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 과정에서 너를 불렀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긍정적인 상황에서 부르는 사람이 있고 부정적인 상황에서 부르는 사람도 있는데, 부르는 이는 내가 아니더냐?’ 그래서 ‘맞습니다.’ 그랬죠. ‘너는 그 사건 속에서 불렀으니 아무 염려하지 마라. 다른 사람이 뭐라 해도 나는 너를 뭐라고 안 하니 부끄러워하지 말고 부르심에 응답하라.’ 그 음성을 듣고 난 후에 나도 모르게 아버지를 용서하고 내 정체성도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그 후에 일반 목회를 하실 때는 굳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죠?  처음에는 그러려고 하지 않았어요. 저도 흔히 말하는 성공한 목회자가 되고 싶었어요. 능력을 받으면 나도 성공한 목회를 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 기도원 다니고, 교회 성장 세미나도 열심히 다니면서 개척교회 목회를 했죠. 뜻대로 안 되더군요. 결국 다 내려놓고 청빙받아 간 곳에서 목회를 하는데, 교회에 갈등이 있었어요. 저는 중립을 지키고 있었는데, 「국민일보」에 제 이야기가 실린 거예요. 그때 한쪽 장로님이 제가 북의 지령을 받아 목회를 했다고 내용증명을 보내왔어요. 그때 충격을 받으면서 결국 마음 아래 가라앉아 있던 것들이 또 올라오더라고요. 여러 가지 문제가 겹치면서 결국 사임을 하고, 어머니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때는 정말 막막하셨겠네요.  사역을 멈췄어요. 생활고를 겪다가 대리운전도 하고 그랬죠. 나중에 작은 교회에서 청빙이 와서 다시 목회를 시작했는데요. 그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교인들은 40~50명 정도 되었는데 싸우지도 않고 예배 시간에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한다는 것이 큰 은혜더라고요. 그즈음에 일반 매체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죠. 거듭 거절을 했는데도 온갖 방법으로 설득을 해서 결국 어쩔 수 없이 승낙했어요.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는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일정이 잡혀 여수 애양원에 가게 되었어요. 그때 처음 그곳에서 수요예배 설교를 하게 됐죠. 그때만 해도 애양원에서는 제 존재를 몰랐습니다. 예배 전에 기도하고 있는데, 기도가 잘 안 되더군요. 마음이 복잡하니까요. 평소에 잘 부르지 않던 ‘거기 너 있었는가’ 찬송을 부르는데, ‘너 거기 있었는가, 두 아들 주검 앞에 놓여 있을 때, 거기 있었는가.’, 그런 음성이 들리더라고요. 견딜 수가 없어서 나가려고 했어요. 그때 주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받으시며 기도하셨던 것처럼 손 목사님이 두 아들 주검 앞에서 기도하시는 환상이 보였어요. 저도 괴로워서 몸부림치고 있는데, 예배 인도하시던 목사님이 “안재선의 아들, 안경선이 목사가 돼서 왔습니다”라고 하셔서 단상에 섰어요. 말이 안 나오더군요. 10분 동안 울기만 했어요. 교인들도 당황했겠죠. 그런데 여기저기서 울기 시작하는 거예요. 다 같이 울고 난 후 설교를 했는데,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처음으로 손 목사님과 두 아들, 삼부자 묘소에 갔어요. 사실, 너무 늦게 찾아뵌 거죠. 처음으로 헌화했더니, 그때 손 목사님 목소리가 마음속에서 들렸어요. ‘네가 재선이 아들이냐?’, ‘네, 제가 아들입니다.’, ‘네가 목사가 되어서 내 앞에 찾아왔구나. 참 어렵게 돌고 돌아서 여기까지 왔구나. 내가 너를 환영한다. 그 목소리가 끝나니까 양쪽 삼촌들 목소리가 들리면서 환영해 주셨어요. 하나님께서 이사야 40장 1절 말씀을 주시더군요.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 백성들을 위로하리라.’ 그 말씀이 ‘손양원 목사님 이름으로 내 백성을 위로하리라’라고 들렸습니다.

그때부터는 손 목사님 손자로 살아오신 거네요.   그때부터 하나님이 더 이상 숨지 말고 떳떳하게 살게 하시는구나 싶었죠. 그 뒤로 희한하게 여러 교회에서 간증하는 길이 열리더라고요. 2013년에는 KBS에서 다큐멘터리 출연 요청이 왔어요. TV는 또 다른 문제다 싶어서 고민을 했는데, 하나님 주신 말씀 덕분에 꼼짝없이 요청에 응했죠. 성탄 특집 다큐멘터리에 잠깐 나왔어요. 그 뒤로 영화로 제작되는 과정에서, 담당 피디 요청으로 미국까지 갔어요. 한국에서 사역하시던 선교사님들이 노후에 모여 살고 있는 블루마운틴에서 촬영을 했어요. 거기 가면 손 목사님의 흔적을 들을 수 있을 거라는 이유 때문이었죠. 거기서 하나님이 또 다른 부르심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윌슨의 하나님, 손양원 목사님의 하나님인데, 너도 그들처럼 한센인들을 섬겼으면 좋겠다, 그 사랑을 받아서 네가 이어갔으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때 저는 못 한다고 했어요. 감당할 수 없다고 했죠. 하루 종일 울었어요. 함께 간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로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그러시더라고요. ‘내가 너한테 단체를 세우라는 것이 아니다. 너 혼자 그냥 마음을 쏟으면 안 되겠느냐?’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그러면 하나님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결단했어요. 그 말을 들은 지인들도 도와주겠다고 나서서 ‘두 기둥 선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앞으로도 그러면 한센인 사역을 이어가시는 거군요.  영화가 개봉되고 나서 자연스럽게 아프리카 브룬디에 가게 됐어요. 후원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지금도 계속 기도하고 있고요. 결국 내년에 기념관 사역을 정리하고 아프리카 브룬디로 들어가 한센인 사역을 할 예정입니다. 지금은 건강을 위해 기도하고 있어요. 2년 전에 대장암 수술을 받고 항암 치료받으면서 회복 중에 있거든요. 생각나시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기도하겠습니다. 앞서 평생 짊어지고 살 상처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깊은 상처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요.  우리 사회가 크고 작은 사건이 많아지면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많이 생겼어요. 사실 부부간에도 서로 상처를 주고받잖아요. 그런데 용서라는 말을 너무 거창하게만 생각하다 보니 생활 속에서 잘 안 이뤄지는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 용서는 1인칭 용서, 2인칭 용서, 3인칭 용서가 있어요. 1인칭 용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용서받는 것이고, 2인칭 용서는 상대방을 용서하는 것이고, 3인칭 용서는 제3자가 어떤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이겠죠.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3인칭 용서에 대한 관심이 필요해요. 예를 들어 유명인이 잘못하면 그 사람은 사회적으로 매장되잖아요. 그 사람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할 경우,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는 열린 마음이 아쉬울 때가 있어요. 사실 십자가 앞에서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우리 모두 회개하고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하는 자세가 우선적으로 필요하죠. 또 십자가 앞에서 용서받은 자로서 상대방을 용서하는 결단도 필요하고요. 사회적으로 대중 앞에서 용서받는 사죄의 과정이 충분히 이루어진다면 사회가 포용할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올해 4월 16일은 세월호 5주기입니다. 이 사건은 온 국민에게 큰 상처가 되었잖아요. 유족들은 여전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고요. 일종의 사회적 애도가 필요한 사건이었죠.  반드시 남을 용서할 때는 나도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나도 용서받았으면 저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을 거란 전제는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여전히 아프고 힘든 유족들을 위해서라도 진실이 규명되어야 합니다. 진실이 드러나서 회개와 용서가 자연스럽게 이어지길 바랍니다. 진정한 사회적 애도는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국가적으로 여러 큰 사건, 사고들을 거치면서 여전히 상처로 남아 있지만 또 언젠가는 우리가 먼저 용서라는 단어를 꺼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하지만 그 상처를 생각하면 결코 섣불리 꺼낼 말은 아니겠지요.   용서는 참 쉽지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또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사역이겠죠. 용서한 뒤에도 상처는 남아 있을 수 있어요. 용서와는 별개로 상처에 대한 위로와 치유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 아픔과 상처에 공감할 때 진정한 용서도 가능하죠.

용서에 앞서 공감이라는 도구를 통해 서로 마음이 만나는 지점까지 가야 진정한 용서가 이뤄지겠네요. 그래도 용서가 있고 나면 열매가 생기잖아요.   손양원 목사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유산을 남기셨어요. 애양원교회가 손양원 목사님 이름으로 꽤 많은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손양원 목사님을 통해 도전받고 목회자가 되고, 상처받았다가 회복되었는데요. 이런 결과들이 다 열매죠. 대표적인 증인이 바로 저이기도 하고요. 지금도 손양원 목사님 기도처럼 수많은 열매가 맺히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우세요?  이제는 자유롭죠. 그런데도 역시 남들 앞에 손 목사님 이야기할 때는 조심스럽고, 거룩한 부담이 늘 있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 항상 예수님 다음으로 손 목사님 생각을 하게 되네요. ‘아, 손 목사님이라면 이때 어떻게 하셨을까?’라고 생각하죠. 손 목사님이 21세기에 사셨다면 어디에서 목회를 하셨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우리나라에서는 더 이상 한센인 사역이 어려우니까 한센인들이 있는 나라로 가시지 않았을까 싶어요. 손 목사님도 거기 가셨으리라 생각하면서 빚진 자의 심정으로 아프리카 브룬디로 가기로 결정하게 된 겁니다.

응원하겠습니다. 「빛과소금」 독자들에게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질문 하나 해주세요.   기념관에 있으면서 가장 바쁠 때가 봄이에요. 점심 먹을 시간도 없어요. 한 번은 지쳐서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하나님께서 ‘네가 믿는 하나님과 할아버지가 믿는 하나님이 같은 분이냐?’ 물으시더군요. 같은 분이라고 답하려니, 눈물이 쏟아졌어요. 목사 안수받은 지 30년이 지났어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설교를 했고, 기도를 했고, 말씀을 가르쳤겠어요. 나는 설교한 대로, 기도한 대로, 가르친 대로 살았을까 생각해 보면 못 살았더라고요.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은 당신들이 설교하신 대로, 기도하신 대로 사셨잖아요. 그래서 이런 질문드리고 싶어요. “당신이 믿는 예수님은 손양원 목사님이 믿는 예수님과 같은 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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