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가시, 그 신묘한 뜻은?

issue 2021년 04월호 육체의 가시, 그 신묘한 뜻은? 글 차정식

태생적 조건의 불리함과 유리함

‘공정’이 우리 시대 최대의 화두가 되고 있다. 기회의 균등을 포함하여 누구나 이 땅에서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이념이 시대정신으로 우뚝한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유복한 환경이 자녀들에게 학력까지 대물림하여 공정이 점점 더 불가능해지는 듯한 불우한 현실에 대한 탄식 어린 자포자기의 추세도 우리 사회의 청년층을 중심으로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다. 생김새가 다양하듯 누구나 남들과 똑같은 환경에서 태어나 자라고 기계적으로 고른 역량으로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그것이 꼭 바람직한 것인지도 불투명하다. 이와 같은 태생적 조건의 불리함과 유리함이 우리 시대에 양극화의 인간 세상을 만드는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문제적인 상황이 존재한다. 그것은 태어나면서 신체적, 정신적 조건이 이른바 건강한 ‘정상인’의 상태와 너무 다르게 각종 중증 장애를 갖고 태어나 평탄한 사회생활이 아예 불가능한 삶이다. 그것은 그 당사자뿐 아니라 그 당사자를 낳고 키워야 하는 부모를 비롯해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루 형언하기 어려운 형극의 짐과 같다. 창조주 하나님이 사랑의 신이고 전능하신 주님이라면, 이런 불우한 생명을 왜 이 땅에 내신 걸까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물론 정당화의 논리도 따라붙는다. 하나님은 이런 불편한 생명도 정상적인 생명과 다를 바 없이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원론적인 답변이 예비되어 있다. 아니면 예수님의 답변처럼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불우한 장애를 안고 태어난 것이라고 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경우는 태어나면서부터 볼 수 없던 그 사람을 즉각 치유하여 그 눈을 건강하게 회복시켜 주는 기적의 사건과 함께 정당화할 수 있지만, 유사한 상황에 처한 대부분의 시각장애인들 또는 중증 장애인들은 그런 기적의 은총과 거리가 먼 상태로 평생을 그늘 속에 살 것을 강요당하지 않는가. 물론 이러한 상황은 반드시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살면서 각종 사건, 사고를 통해 몸이나 정신에 치명적인 장애를 입어 가시처럼 날카로운 고통 가운데 일생의 시간을 감내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과 육체의 가시

이와 같이 우리가 불운이나 불행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생래적인 고통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그 신정론적 변증의 한계를 넘어 우리는 이런 삶의 조건 속에 어떻게 그 고통스런 현실을 견디면서 빛을 발견할 수 있는 걸까. 아쉽게도 성경은 이와 같은 인간의 특수한 실존적인 고통과 관련하여 ‘왜’를 묻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체로 불친절하다. 다만 그것에 매이지 말고 그것을 초월하는 어떤 은총의 경지를 영성의 차원에서 체험적으로 들려줄 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 바울이 나누는 ‘육체의 가시’에 대한 간증이다. 바울이 이 간증을 나누는 것은 그의 사도직이 고린도교회의 어떤 교인들에 의해 불신받던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하는 맥락에서였다. 바울은 ‘사탄의 사자’로 인식한 어떤 육신의 지속적인 고통이 견디기 어려워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 제거해 주시길 간구했지만 그가 응답받은 말씀인즉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로써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자신을 통해 나타난 터라 이로 인해 자만해지지 않도록 경계의 증표로 자신의 육체에 가시를 준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해 받아들인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자신의 약함 가운데 그리스도의 강한 능력이 머무는 역설적인 이치를 깨달아 오히려 그 불리한 가시의 고통을 감사의 조건으로 전복시켜 버린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담긴 진리를 그는 이와 같이 자신의 고통스런 몸으로 체득한 셈이다.

물론 바울이 여기서 은유적인 문구로 언급한 ‘육체의 가시’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 정확한 의미는 아직 오리무중이다. 전통적으로 이를 간질병이나 바울의 다메섹 체험을 감안하여 안질의 일종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 비교적 근래의 해석 중 흥미로운 것 하나는 이를 바울이 독신 남자로 사역하면서 자신의 의지로 주체하기 어려웠던 성적인 충동을 ‘육체의 가시’로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와 달리, 나는 이를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 바울이 언급한 자신의 몸에 지닌 ‘예수의 흔적’(stigma Ie⁻   sou)과 연계시켜 그가 선교 활동 중 얻었던 어떤 육체적 상처로 말미암아 생긴 만성적 통증의 일종으로 해석한 바 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의 맥락에서 그것이 ‘예수로 인한, 예수를 위한 상처의 흔적’, 곧 사람들의 눈에 띄는 가시적인 흉터로 본 것이다. 내 해석이 맞는다면 그것은 할례라는 생래적인 육체의 흔적과 대조적인 맥락에서 그것을 대체하는 어떤 후천적인 흔적, 곧 자신의 선교적 삶의 진정성에 비례하여 생긴 권위의 출처로서 전혀 다른 영성적 함의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상처의 신학적 인간학

상처의 문제를 오늘날 기독교 신학이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다룰 만큼 축적된 실력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신 상처를 감추거나 눙쳐 버리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 시대의 가장 고통스런 삶의 상처를 드러낸 이들은 교회 내부의 경건한 신자들이 아니었고 의로운 투사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이른바 ‘미투 캠페인’의 선봉에서 자신의 수치를 무릅쓰고 그 상처와 정면 대결하고자 앞장서서 오래전 가해자를 기억해 낸 연약한 생명들이었다.

그들은 그렇게라도 불의를 감춘 채 뻔뻔하게 살아오던 가해자들을 정의롭게 응징하고 싶었다. 그 이후 자신의 오래 묵은 상처와 화해하면서 치유의 길을 모색하고 가능하다면 용서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상처를 감추거나 눙치는 경우가 아니면 그 상처의 반동으로 애꿎은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상처를 입혀 보복하려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가 하면 그 상처를 진솔하게 노출하는 사람들조차 자기연민의 질곡에서 자맥질하기 일쑤다. 그러나 내 보기에 육체의 가시를 다루는 더 좋은 방법은 그 가시와 같은 어쩔 수 없는 상처의 고통을 승화하여 학문과 예술, 목회와 선교의 에너지로 치환하거나 ‘상처받은 치유자’로서 살아가는 길일 텐데, 그것은 만만치 않은 지난한 십자가의 길이다.
나에게도, 너에게도,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도 ‘육체의 가시’ 같은 고통스런 현실은 두루 존재한다. 이는 원하지 않아도 어느 날 불현듯 우리 삶에 찾아오는 십자가의 짐과 같은 것이다. 다만 경중의 차이, 장단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중에서 가장 어려운 게 평생을 숙명처럼 짐 지고 살아야 할 육체의 가시일 텐데, 나는 이들이 울부짖듯이 던지는 ‘왜 하필 나만 이렇게?’라는 질문에 딱 부러진 정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다만 살면서 내 몸으로 겪어 낸 크고 작은 육체의 가시 같은 고통 가운데 내가 배운 것은 연민의 힘과 연대의 희망 같은 것이다. 심하게 아프면 우리는 그 약함 가운데 가난해지고 겸허해진다. 그때 우리는 말이 착해지고 거친 심성도 다독여지면서 비로소 하나님을 바라볼 심령의 여백을 갖게 된다.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죽어가는 모든 생명을 품는 연민의 힘이 그 자리에서 샘솟는다. 그런 영혼들이 합세할 때 이 세상은 가장 작고 연약한 생명을 가장 귀하게 대접할 수 있는 연대의 희망을 키울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내 자신의 내면에 찌르는 육체의 가시와 다른 이들이 지닌 다양한 그 가시 같은 고통은 서로가 피조 생명으로 하나님 앞에서 연대하며 포용하는 ‘뜨거운 상징’으로 거듭날 수 있다.  

 

 


차정식은 서울대학교에서 국사학을 전공, 미국 맥코믹신학대학원(M.Div)에서 신학적 사고를 훈련한 뒤, 시카고대학교 신학부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한일장신대학교 신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신약성서의 환생 모티프와 그 신학적 변용」, 「신약의 뒷골목 풍경」,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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