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를 돌봄 사역의 도구로 부르셨습니다

people 2020년 11월호 하나님은 우리를 돌봄 사역의 도구로 부르셨습니다 이성미


태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첫 사명은 무엇일까?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시던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 땅에 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사명을 주셨다. 다스림, 바로 돌봄 사역의 시작이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누군가의 돌봄을 필요로 한다.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에 누군가의 돌봄은 극대화된다. 누군가의 돌봄으로 존재하는 나는 또 누군가를 늘 돌보며 살아야 한다. 주변 사람들의 인생 멘토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는 개그우먼 이성미 집사를 지금 공감한다.
취재 김재원 정리 이승연 사진 한치문

요즘 삶을 날씨나 계절에 비유해 주시겠습니까? 블루라는 빛깔이 떠오르네요. 요즘 제 삶은 파란 가을 하늘이에요. 이 나이가 되니까 인생이 여유로워져요. 이제는 아이들도 제 일 알아서 할 만큼 컸으니까요. 어떻게든 인생은 흘러간다고 생각하니까 편안해요.

일과 가정과 신앙에서 느끼시는 행복감, 혹은 만족도를 동그라미, 세모, 가위로 표시해 주시면 어떨까요? 일단 가정은 동그라미와 세모 사이. 여전히 지지고 볶고, 힘든 일도 있지만 많이 좋아졌기 때문에 동그라미에 가까운 완만한 삼각형이에요. 신앙은 여전히 몸부림치고 있어요. 완성되는 신앙은 없겠죠. 그래서 동그라미가 되기 위해 애쓰는 삼각형이에요. 일은 삼각형이에요. 제가 하고 싶은 수준이 있는데, 나이가 드니까 채워지질 않아요. 인정해야 할 건 인정해야 하잖아요. 이제 예순두 살이에요. 할머니가 되는 친구들 보면서, 이런 나이구나, 생각은 하지만 아직 마음으로는 여전히 뛰어놀고 싶어요.

집사님의 60 평생을 살펴볼게요. 어린 시절은 어떠셨어요? 외동딸로 사랑받고 자랐어요. 태어나서 백일 만에 생모가 떠나시고 새엄마가 오셨어요. 저를 정말 사랑으로 잘 키워 주셔서 새엄마인 줄도 모르고 자랐어요. 오히려 아이들이 말해 줘서 알았을 정도에요. 그런데 열세 살 때 새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때부터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았어요. 청소년기는 정말 힘들었어요. 수시로 자살을 생각했고 심지어 선생님이 저를 잘 지켜보라고 아버지께 말할 정도였어요. 아버지를 원망할 수는 없었어요. 저를 정말 사랑하셨거든요. 아버지도 인생이 안 풀린 건데 제가 누굴 탓하겠어요. 생모도 오죽했으면 떠났을까 싶어요. 사랑은 충분히 받았지만 외로웠어요. 그래서 후배들에게 아이 많이 낳으라고 해요. 일이 생겼을 때 의논 상대가 없다는 것이 힘들었어요. 동생이나 언니, 오빠가 있었다면 서로 힘이 될 텐데 생각하면서 혼자 이겨내야 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아이를 열 명은 낳아야지 했는데, 셋밖에 못 낳아서 억울할 뿐이에요. 하하.

우울한 청소년기를 보내셨는데 그래도 개그맨이 되셨어요? 대학에 가서 우연히 친구 따라 ‘개그콘테스트’에 나갔어요. 경제적으로 어려우니까 상금을 타서 학비에 보태려고 했죠. 김은우 씨와 같이했는데 상을 탔어요. 그 후로 PD들이 잘 봐 주셔서 여기저기 방송을 많이 했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덤벼들었는데, 잘한다고 하니까 좋더라고요. 아이디어를 직접 짜야 하는데, PD가 저의 끼를 뽑아 준 거죠.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정말 잘하게 됐어요. 그때 알았어요. 칭찬이 나를 이렇게 흥분시키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구나. 칭찬을 한 번도 받지 못하다가 칭찬을 받으니까 좋더라고요. 일이 재미있었어요.

우울한 청소년기를 보내고 외로웠으면 개그 스토리 짜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요. 슬픔과 웃음은 같이 가잖아요. 저도 제가 개그맨 된다는 것을 생각도 못했는데 친구가 재능을 끄집어내 줘서 얼떨결에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거죠. 개그 스토리 짜기 위해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하면 될까?’라고 스토리를 써서 가면 PD가 잘했다고 하니까, 그런 순간들이 삶의 원동력이 되었어요. 지나고 보면 하나님의 섭리였겠죠.

그러면 하나님은 언제 만나신 건가요? 결정적인 인생의 슬럼프가 있었어요. 돈은 벌리고 일도 잘 되는데, 아버지가 재혼을 하시면서 딸 넷이 들어왔어요. 저까지 다섯이 된 거죠. 이제는 내가 죽어도 아버지가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겠구나 싶더라고요. 그때가 서른이었어요. 그래서 결정했죠. 죽겠다고.

이미 코미디언으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데, 오히려 가정에서 외로움을 느끼셨네요. 다 누렸다는 생각이 들면서, 삶의 의욕이 없어지더라고요. 일이 재미없어지고. 돈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어요. 아마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사랑이 제게는 큰 의미였나 봐요. 아버지에게 새로운 가족이 생기고, 힘든 일들이 연이어 생기면서 심한 우울증이 왔어요. 죽으면 편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집에서 한밤에 수면제 70알을 술과 같이 먹었어요. 그런데 4시간 만에 그냥 깨어난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이 깨우신 거죠. 하나님이 그날 제 인생의 역사를 쓰셨어요. 그렇게 눈을 뜨니 몸이 쇳덩이를 얹은 것처럼 천근만근 무거웠어요. 겨우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니 얼굴이 달덩어리가 된 거예요. 이제 어떡하지, 생각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나오셔서 저를 보더니 “너 약 먹었지?” 그러셔서 “네”라고 대답하니까 아버지가 저를 업고 병원으로 뛰었어요. 병원에서는 기적이라고 했어요. 그렇게 죽다 살아났는데, 세상은 난리가 난 거예요. ‘이성미가 약을 먹었다’, ‘아니다, 쇼를 한 거다’, 그런 기사들이 나오니까 더 죽고 싶더라고요. 그때 새엄마가 제게 새벽기도를 권하셨어요. 권사님이셨거든요. 그래서 저는 교회를 처음 간 게 새벽기도였어요. 그런데 기도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니까 그냥 앉아서 “하나님, 저 왔습니다.”, 둘째 날도 “하나님, 저 왔어요.” 그러면서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죠. 찬양을 할 줄 알겠어요? 기도를 할 줄 알겠어요?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은 채 그렇게 40일 새벽기도를 했는데, 그때 바로 방언을 받은 거예요.

새 신자가 은사를 받으셨군요. 깜짝 놀라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그러셨겠네요. 새 신자가 방언을 받았으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때 성령 체험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보니 성경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분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하나님의 음성을 구별해야겠더라고요. 그래서 임미숙 씨, 이경애 씨랑 성경 공부를 시작했어요. 말씀의 진수를 깨닫게 됐죠. 제가 감사하게 생각하는 건 그때 말씀을 통해 신앙의 방향을 잘 잡은 거예요. 그때부터 하나님이 저의 아버지가 되시고, 저의 인생을 서서히 바꾸어 가셨어요.

그러면 그즈음에 결혼을 결심하게 되신 건가요? 네. 남편이 적극적으로 나왔어요. 저와 남편의 상황이 많이 달랐기 때문에 저는 망설였죠. 제가 힘든 일을 많이 겪은 터라 부모님 허락을 먼저 받아와라 했더니 감사하게도 허락을 받아오더라고요. 그렇게 나오는데 제가 어떻게 마다하겠어요. 그때는 정말 고마웠어요. 하하. 적어도 그때는 너무 고마운 남자였어요. 결혼해서 살아보니까 그 사람의 장점이 단점이 되더라고요. 참 간사하죠. 지금은 그런 남자였지, 하고 생각해요. 하하.

세 아이의 엄마로 행복한 가정을 꾸리셨는데 캐나다 행을 결심하셨어요. 그 시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일할 의욕을 상실했어요. 아버지를 계속 모시고 살았었거든요. 집에 들어가면 아버지가 앉아 계신 것 같더라고요. 한국 땅에서 못 살겠다 싶었는데, 아들아이가 유학을 가고 싶다는 거예요. 생전 공부를 안 하던 녀석이 공부하겠다니까 “그러면 엄마가 뒷바라지해 줄게” 하고 일 다 접고 이민을 갔어요. 캐나다 밴쿠버에 살았는데요. 오히려 그때 7년이 오로지 하나님만 제대로 만날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하나님이 저를 온전히 따로 격리시켜서 치료해 주시는 그런 느낌이 들 정도였어요. 가장 힘들 때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지만 과거 습성이 살아 있는 곳에서는 온전한 신앙생활이 힘들었던 거죠. 따로 떨어져 있으니까 하나님이 제대로 보이더라고요.

그 시간에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신 셈이네요. 네. 뿐만 아니라 엄마로도 거듭났어요. 사실 아이들과 지지고 볶고 많이 하면서 애들 때문에 속 많이 썩었어요. 하지만 저도 만만치 않았거든요. 화가 나면 아이들에게 못할 말을 참 많이 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거의 저주에 가까웠죠. 그러던 중에 하나님이 “네가 말한  그대로 아이들에게 해 줄까?” 하시는 거예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그때부터 이러면 안 되겠구나 싶어서 말을 바꾸기 시작했죠. 그러면서 가정이 변하기 시작했어요. 제가 변하니까 아들이 변하고, 오빠가 변한 모습 보면서 동생들도 따라서 행복해졌어요. 우리는 다 좋은데, 집이 편안해지니까 그제야 남편이 불쌍해 보이는 거예요. 한국에 들어와서 방문을 열었는데, 혼자 자고 있는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이더군요.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그때 한 연예인이 자살했어요. 너무 슬퍼서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죠. ‘한국으로 돌아가라’, ‘제가 가서 뭘 합니까? 저는 여기가 너무 좋습니다. 우리 아이들 귀하게 쓰임 받도록 잘 키우겠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계속 ‘아니다. 가야 한다.’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돌아오게 됐어요.

부르심을 받고 한국에 돌아와서 사역을 시작하신 셈이네요. 저는 그 후로 집사님께서 돌봄 사역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것 때문에 왔어요. 하나님이 연합하라고 하셨거든요. ‘곳곳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예배를 만들어라.’ 하용조 목사님께 생각을 말씀드렸더니, “나는 연예인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 정말 환영해요.”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온누리교회 ‘순영홀’에서 모이기 시작했죠. 사람이 많아지면서 ‘콘서트홀’로 옮겼고, 다시 ‘경찬홀’에서 모이기 시작했어요. 처음 경찬홀 문을 열었는데, 와, 너무 큰 거예요. ‘하나님 이 넓은 곳을 어떻게 다 채웁니까?’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너는 왜 자꾸 숫자에 연연하느냐, 한 사람이 세워지는 것에만 관심을 가져라” 그러시더군요. 그때부터 후배들과 성경 공부를 하게 됐죠. 한 달에 한 번씩 연합 예배 드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성경 공부를 해요. “하나님은 한 명의 예배자를 찾습니다. 그게 바로 당신입니다.” 이 표어가 그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이에요.

연예인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기 어려운 환경이잖아요. 무심코 교회를 찾아가는 것도 쉽지 않고, 그런 면에서 연예인 예배가 귀한 도구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동료 연예인을 전도하기에도 아주 좋은 기회죠. 힘들어 하는 후배들에게 “한 번 와 봐.” 말하기도 좋고요.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 연예인들도 체계적인 훈련을 받기는 힘들어요. 그래서 성경 공부도 좋은 기회가 되죠. 저희가 일 년이면 열두 분의 목사님을 모셔요. 우리는 전부 ‘우리 교회’에 갇혀 있잖아요. ‘우리 목사님’, ‘우리 교회’. 그런데 연예인 예배에서는 이런 목사님도 계시고 저런 목사님도 계시고, 다양한 목사님을 통해 말씀의 맛을 느낄 수 있어서 참 좋아요. ‘우리 목사님’이라는 한계를 뛰어 넘어서 내가 스스로 예배자로 설 수 있는 거죠. 그 문을 열고 나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연합이 힘들어요. 감사하게도 열두 분의 목사님이 지금도 꾸준하게 섬겨 주세요. 얼마 전 10년 감사 예배를 드렸어요.

그렇게 돌봄 사역의 도구로 쓰임 받으시다가 큰 고난을 겪기도 하셨어요.  어느 날 연락이 왔어요. ‘울랄라세션’의 임윤택이라는 친구가 암 투병을 하고 있는데, 예전에 교회를 다니다가 지금은 안 다닌다며 한 번 만나면 좋겠다고요. 그래서 만났어요. 너무 말랐더군요. 고인이 되신 김자옥 씨와 함께 만나고 집에 돌아와서 기도했어요. ‘하나님 저는 암이 안 걸려서 이 사람 마음을 모르겠습니다. 이 친구에게는 백일 된 아이도 있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면 나는 생명책에서 빼도 좋으니, 이 친구를 넣어 주십시오.’ 그런 기도를 처음 했어요. 그러고 나서 계속 연락하고 지냈는데, 아파보지 않아서 진정한 아픔을 모르겠더라고요. 그즈음에 TV 건강 프로그램 〈비타민〉에 출연해서 제가 암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암 선고를 받고 제일 먼저 윤택이에게 문자했어요. “윤택아, 내가 암이란다.” 반은 기쁘고, 반은 당황스러웠어요. 윤택이와 이야기를 한참 하면서, 아픈 게 이런 거라는 걸 알게 되니까 우리 사이가 끈끈해진 거예요. 암 수술할 때도 윤택이가 많이 도와줬죠. 그러다가 얼마 안 남은 윤택이가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싶다고 해서 함께 예배했어요. 정말 평안하게 세상을 뜨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걸 배웠어요. 우리는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낫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었구나, 이렇게 웃으면서 세상을 떠날 수 있다면 내 기도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그 친구를 통해 배웠어요. 정말 몸부림쳤었거든요. 워낙 젊고, 재능도 많고, 참 좋은 친구였어요. 세상을 일찍 떠나기에는 너무 아까웠고, 남겨질 아내와 아기를 보면 보낼 수가 없었어요. 붙들고 기도했는데, 윤택이가 떠나면서 하나님의 응답은 다를 수 있다는 걸 배우게 됐어요. 저도 지금은 아주 건강해요.

인생의 희노애락을 들어볼게요.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언제일까요? 아이를 낳았을 때에요. 이 작은 몸으로도 아이를 낳을 수 있구나. 하하. 생명을 낳는다는 건 또 다른 느낌이더라고요. 나와 비슷한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호흡을 하고, 내 젖을 먹고 점점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제일 행복했던 거 같아요. 세 아이 모두 제게 정말 소중하고 기쁜 순간이었어요. 남자가 아빠가 되는 체험하고는 완전히 달라요. 하하.

인생에서 가장 화나고 억울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내가 하지 않은 일을 내가 했다고 이야기하거나, 엉뚱한 소문에 휘말렸을 때죠. 세상에서 가장 비싼 세금이 유명세라고 하잖아요. 정말 억울했을 때 하나님이 저에게 참고 기다리라고 하셨어요. 참 힘들더라고요. 우리는 그걸 어떻게 해서든 직접 해명하고 풀려고 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직접 해결하신다는 마음을 주셨어요. ‘하나님이 하신다, 너는 가만히 있어 내가 여호와 됨을 알지어다.’ 그게 정말 힘들더라고요. 하나님은 그 일을 하시고, 정작 나는 기다리면서 나 자신과 싸워야 하는 거죠. 하나님이 그 일을 당장 내일 해 주시면 좋은데, 그게 아니잖아요. 언젠가 해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참고 기다리면서 삼키지만, 삼킨 게 울컥울컥 올라와요. 나와의 그런 싸움이 예전에는 일주일 갔다면 요즘은 이틀이면 그래도 편안해져요.

인생에서 가장 슬펐던 순간은 언제였을까요?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였어요. 내 버팀목이 빠져나갔는데, 그냥 눈에서 멀어지는 게 아니라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리면서 찬바람이 휑하고 불더라고요. 견딜 수가 없었어요. 내가 의지할 곳이 없구나, 그런 느낌이 들어서 무척 힘들었어요. 결국 그 자리를 하나님이 채워 주셨어요. 하나님이 진짜 아버지가 되셨죠.

가장 즐거운 순간은 언제였어요? 아이들이 찾을 때요. 여기서 말하는 아이들은 후배들이에요. 저는 후배들을 아이들이라고 하거든요. 우리 아이들이 찾을 때도 좋지만 후배들이 찾으면 정말 좋아요. 내가 필요하다고 누군가 이야기해 줄 때 제일 좋아요. 내가 살아 있는 걸 느끼게 해 주거든요. 무언가 도움을 줘서가 아니라 그냥 찾아주는 것만으로도 기뻐요. 제가 딱히 해 주는 것도 없어요. 그냥 듣는 거죠.

인생이 한 권의 책이라고 한다면 이성미라는 인생 책의 다음 챕터는 어떻게 될까요? 무언가 또 도전하지 않을까 싶어요. ‘도전으로 시작해서 도전으로 아름다운 죽음을 맛봤더라.’ 하나님이 제가 필요하다고 하시면 무엇이든 할 거예요. 사실 돌봄 사역이라고 하셨지만 저는 아이들을 잘 못 돌봐요. 저는 사랑이 없거든요. 아직도 내가 뭐라고 얘들이 나를 찾지 싶을 때가 많아요. 찾아 주는 것이 고마워서 더 잘 해 주고 싶을 뿐이죠. 제가 늘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 내게 사랑이 없다는 거예요. 그 사랑은 하나님이 채워 주셔야만 흘려보낼 수 있기 때문에 그게 아직도 숙제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히 도구로 부르셨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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