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WE, 일어나다!

people 2020년 02월호 위, WE, 일어나다! 박위

휠체어를 탄 그가 만개한 웃음꽃을 보이며 외친다.
“우리 모두에게 기적을, 위라클!” ‘we’와 ‘miracle’의 합성어.
그러나 나는 ‘we’를 박위의 ‘위’로 읽는다.
그는 존재 자체로 기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가 YouTube 채널  〈위라클〉을 운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척추 손상에 따른 하반신이 마비되었지만, 두 바퀴를 이용해 가고 싶은 곳 어디든 간다.
강원도 험준 고령을 넘고, 오사카에서 낭만적인 온천욕을, 괌에서 환상적인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바비큐 파티를 즐긴다. 운전을 하고, 영상을 촬영하고, 강연을 하고, 간증을 한다.
그의 일상의 시간은 사고 전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다.
아니 더욱 역동적으로 흘러 감동의 포말을 일으키고 있는지도. 그도 그럴 것이 휠체어를 탄 사람들은 혼자서는 ‘못 갈 거다’ ‘못 할 거다’라는 편견을 그는 ‘도장 깨기’ 하듯 하나하나 깨트리고 있다.
성탄절을 하루 앞둔 날, 바람이 일 적마다 찬 기운이 코끝을 얼얼하게 했다. 용산구에 위치한 박위의 집으로 들어서니 엔티크한 가구들이 눈에 띄었다. 아름답게 낡은 식탁과 찻장 그리고 작은 단상, 촛대, 시계…, 하나하나 배치된 사물들이 클래식한 분위기를 연출했고, 큰 창으로 스며든 오후의 농익은 햇빛은 사물들을 더욱 부드럽게 만들었다. 집 안 곳곳을 눈으로 바르고 있는 나에게 박위는 어머니의 솜씨라며 과하지 않은 미소를 보였다. 거실 한쪽 벽면, 마치 작은 스튜디오 세트장을 연상케 하는 공간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조금은 여유로운 환경 속에서 반듯하게 성장해 가는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래서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그가 장애를 입게 된 이유가….

 


휠체어에는 왜 앉게 된 건가요?
제 나이 스물여덟이었으니까, 2014년이었죠. 글로벌 패션 회사에서 인턴 과정을 마치고, 정직원으로 채용되었어요.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내 인생이 이렇게 풀리는 건가…. 친구들과 축하 파티를 열었어요. 술을 마셨는데 필름이 끊겼어요. 눈을 뜨니 중환자실이었죠. 정신을 잃은 하루 반나절 동안 수술까지 다 진행이 된 상태였어요. 낙상 사고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물론, 저는 기억이 없어요. 경추 6, 7번이 손상되었고, 7번은 완전히 끊어졌어요. 의사의 말이 기억이 나네요. “당신은 영원히 걷지도, 손가락을 사용하지도 못할 겁니다.” 말 그대로 전신 마비가 된 거였죠.


사고 당시 느꼈던 감정이 궁금합니다.
정신이 없었으니까. 사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어요.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죠. 하나님이 일으켜 주시겠지, 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비교적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을 직시하고 적응해야 하잖아요. 감정의 변화는 없었나요?
덤덤함은 계속 유지가 되었어요.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어요. 지루할 틈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저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오신 분들이 참 많았거든요. 병원 환자들과도 친해져서 오히려 즐겁게 지낼 수 있었어요.


그래도 가족들이 받았을 충격이 컸을 거 같아요.
특히 아버지가 굉장히 힘들어하셨어요. 땅을 기어 다니실 정도로 눈물을 쏟으셨대요. 오히려 어머니는 강인하셨고요. 어머니는 당시 제 상태를 사진과 영상으로 촬영하셨어요. 기록으로 남겨놔야 한다고 생각하셨다나. 하하. 물론 어머니도 이후 계속 저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셨지만…. 중환자실에 입원한 지 사흘 정도 지났을 때, 아버지가 제 손을 꼭 잡고 말씀하시더군요. “위야. 네가 믿는 하나님, 나도 믿어보겠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생각했죠. 와, 내가 전신 마비된 것보다 아버지가 하나님 믿겠다고 시인한 것이 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빠지지 않고 새벽 예배에 나가셨어요. 하나님께서 부모님과 많은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2주 후에 손가락을 까딱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되었어요. 6개월 동안 꾸준히 재활 훈련을 받아서 지금처럼 휠체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죠.


하나님께 어떤 기도를 드리셨나요?
병원에 기도실이 있었어요. 매일 밤, 그곳을 찾았어요. 기도 제목은 하나였어요. ‘하나님 저 일으켜 주세요.’ 그러던 어느 날, 뇌가 손상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학생이 있는데, 그 아이 어머니가 저에게 오더니 이런 말을 하시더군요. “우리 아들이 너만큼만 회복되면 좋겠다.” 얼마나 절망적이었으면 전신 마비인 나에게…. 이후 기도를 하는데 같은 병동에 있던 한 사람 한 사람이 떠올랐어요. 내 입술에서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닌 그분들을 위한 기도가 나오는 거예요. 눈물이 쏟아졌어요. 주님의 음성이 마음에서 들렸어요. “위야. 너처럼 아픔이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렴.”
퇴원하고 재활에 전념했어요. 수련회에서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들의 뜨거운 마음 덕분에 중보 기도가 무언지 알게 되었어요. 사실, 다치기 전 저는요. “하나님 세상이 주는 쾌락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세상 반, 신앙 반, 그러니까 회색 크리스천이 되겠습니다. 나중에 나이 들면 하나님께 가겠습니다”라고 기도하던 사람이었어요. 그랬던 제가 다치고 난 뒤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된 거죠.


정말로 하나님을 원망한 적이 없나요?
술 마시다가 사고가 나서, 제 과오로 인해 다친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하나님을 원망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하나님,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라는 기도를 드린 적이 한 번도 없어요. 한 번의 실수로 인한 결과가 가혹하다고 느낄 때도 있었지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나님이 나를 쓰시고자 다치게 한 것이 절대 아니에요. 내 실수로 다친 거죠.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상황마저도 사용하세요. 그리고 다치기 전보다 지금 내 모습이 하나님이 사용하시기에 더 적합한 거 같아요. 왜냐하면 육체적으로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연약한 존재가 되었으니까요. 이 모습으로 일반 사람들과 비슷하게 살아가기만 해도 희망을 줄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시는 방법은 세상의 기준과 다르다는 확신이 생기더군요. YouTube를 하면서도 느껴요. 아, 이건 내가 하는 게 아니구나….


YouTube 채널 〈위라클〉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확신은 있었으나 구체적인 방법을 모르겠더군요. 그런데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깨지고 생각이 변화되는 것을 보았어요. 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계단 옆에 경사로를 만드는 등 직접 행동으로 옮기기도 하고. 이거다 싶었죠. 내 몸과 시간은 제한적이니 YouTube를 해야겠구나! 사람들에게 기도를 부탁했어요. 신기하게 2주도 안 되어서, 갑자기, 뜬금없이, 제주관광공사에서 모델로 섭외가 들어왔어요. 제주도 곳곳을 다니며 소개하는 힐링 영상을 찍게 된 거죠. 그게 첫 시작이었어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여행 영상도 많이 올리시던데, 뭐든지 과감하게 도전하시는 거 같아요.
다치기 전이나 후에도 저의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여행을 좋아했기 때문에 지금도 여행을 가는 것뿐이에요. 물론 몸이 불편하니 힘이 들긴 하죠.
장애를 입고 나서 주변을 보니 생각보다 장애인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분들이 밖에서 잘 안 보이잖아요. 특히 휠체어 탄 사람들을 버스나, 지하철에서 보기가 힘들어요. 왜? 차가운 시선 때문이죠. 저는 휠체어를 탄 사람도 똑같은 사람인 것을, 일상을 이어 나가야 하는 사람인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제 영상을 본 장애인들이 용기를 얻고 여행을 다녀왔다고 하더군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참, 뿌듯해요. 하하. 이제 스카이다이빙에도 도전할 계획이에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영상이 있나요?
영상 하나하나 공들여 만들어서 애정이 가득해요. 그래도 하나를 꼽는다면…, 교통안전공단에서 의뢰를 받아서 오스트리아의 한 학교를 방문하게 되었어요. 전교생 5백 명 중 25% 정도가 장애 학생이었는데 비장애 학생들과 아무런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지내더군요. 비장애 학생 부모들이 이 학교에 자녀들을 보내는 이유를 듣고 충격을 받았어요. 장애가 있는 아이들과 공존하면서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도와주는 방법을 배우길 바라기 때문이래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성숙해 있다 보니, 오스트리아에는 배리어 프리(barrier-free) 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어요. 사회 문화 자체가 장애를 특별하게 보지 않더군요.


장애인에 대한 우리나라 인식 수준은 어떤가요?
사회적 시선은 여전히 따뜻하지 못한 거 같아요. 특수학교를 설립한다고 하면 지역 주민들이 거세게 반대하잖아요. 지하철역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려고 하면 제 앞에 등산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어요. 산은 걸어서 오르는데 계단은 이용하지 않아요. 공항에 가면 장애인 주차 공간이 꽉 차 있어요. 장애인 스티커가 붙어 있지 않은 차량들이 상당히 많아요. 한국 사회는 정이 있잖아요. 장애인 인식 개선에 대해 배울 기회가 있다면, 또 장애인과의 직접적인 만남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지금보다 훨씬 성숙하게 변화될 거라고 믿어요.


2020년을 살고 있어요. 우리는 주어진 ‘오늘’을 살아가야 합니다.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도 삶을 이어가야 하고요. 힘이 되는 한 말씀 부탁드려요.
사고당하기 전에는 걷는 것, 혼자서 숟가락을 들고 밥 먹는 것, 혼자서 소변을 보는 것…, 일상생활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다친 후 이런 당연했던 일들이 불가능해졌을 때, 아, 이게 당연한 게 아니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지금 살고 있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기적이에요. 여러분들도 호흡하며 사는 것 자체가 기적인 것을 아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지금도 일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살아요. 못 일어나도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오케이 하시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어요. 80살, 90살, 아주 먼 훗날에 일어날 수도 있겠죠. 어렵더라도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과 절대 못 일어날 거야, 라고 단정 짓고 사는 것은 분명 그 내용이 다를 거라고 확신해요. 사는 동안 희망을 놓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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