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들 녀석이 밥을 푸려다 그릇을 떨어뜨렸다. 저녁식사 준비로 바쁜 엄마 일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갸륵한 마음 씀씀이였으니 혼낼 일은 아니었다. 떨어뜨린 그릇도 멀쩡했고 아이 발등에 멍이 새겨지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대수롭지 않은 일에 문득 기시감이 느껴졌다. 잊고 있던 오래전 일이 떠올랐던 탓일 게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아버지는 불현듯 찾아온 뇌졸중으로 거동이 불편해졌고 갑작스러운 불행에 가족들은 모두 넋이 나가버렸다. 그즈음 어느 날 아버지가 힘겨운 입치레 끝에 물린 밥상을 들고 나오던 나는 어찌된 노릇인지 그만 손에서 상을 놓쳐버렸다. 마음이 깨지듯 와장창 소리와 함께 흩어진 식기들 사이로 하필이면 아버지의 흰 사기 밥그릇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그때 어머니 얼굴을 잊을 수 없다. 마치 아버지가 깨어진 듯, 가족의 미래가 조각으로 흩어진 듯, 어머니의 낯은 바로 그 흰 사기그릇 색으로 질려 있었던 것이다. 행여 아버지가 볼까 황급히 그릇 조각들을 치우는 어머니를 보며 내 가슴에는 깨진 밥그릇에 대한 비극적 정서가 새겨지고 말았다.
그릇. 물건이나 음식을 담는 물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그때 나는 알았다. 그릇은 단지 물건이나 음식만 담아내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는 것임을, 거기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가 깃들어 있음을.
사람들은 으레 그릇에 있는 것을 꺼내 취하고는 그 빈자리에 대신 다른 것을 놓아둔다. 어떤 이는 그릇 속을 탐했던 욕망을, 어떤 이는 삶에 대한 의지를, 어떤 이는 소모된 세월에 대한 회한을 남긴다. 하여 그릇에는 누군가의 입김이, 또 누군가의 체온이, 다른 누군가의 기억이 저장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 빈 그릇이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에피파니(Epiphany)라는 말이 있다. 일상에서 예기치 못한 깨달음과 조우할 때 쓰는 말이다. 기습적으로 밀려온 통찰, 현실에 암순응(暗順應)했던 영안이 번뜩 뜨이는 경험이 모두 에피파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물리법칙의 세계에서 신성은 일상이라는 그릇 속에 몸을 숨긴다. 그 일상이라는 표피의 보호색이 너무 익숙하고 감쪽같기 때문에 사람들 대부분은 그 너머 내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러다 문득, 어떤 계기로 일상이라는 그릇 속에서 펄떡이는 특별한 의미를 엿보게 될 때가 있는데,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영적인 희열과 더불어 한 뼘 더 성장하게 된다. 켈틱 기독교에서는 그 순간을 ‘얇은 곳’(thin place)라고 불렀다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에피파니라고 이름 붙였다.
에피파니는 주현절을 뜻하는 호칭이기도 하다. 자연계의 법칙을 한달음에 뛰어넘어 인간이라는 그릇에 담긴 채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그리고 그 어린 신성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은 박사들의 순례를 기념하는 절기이다. 생각해 보면 그들이 받쳐들고 온 예물도 어떤 그릇의 신세를 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날 그들이 꽁꽁 싸매어 온 그릇에는 값비싼 향유와 몰약이 채워져 있었겠지만 기실 그릇 속 더 내밀한 곳에는 예물보다 훨씬 귀한 경배의 염(念)이 자리 잡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주현절은 신성을 담아낸 큰 그릇과 그를 경배하는 여러 작은 그릇들을 기억하는 날이 된다.
그릇 안에 자리한 영적 함의들을 이야기하자니 꽤나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 우리 영혼의 촉수는 생각보다 예민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많은 것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날, 산산조각 난 아버지의 밥그릇에 어머니가 잠시나마 턱, 하고 무너져 내렸던 것은 그릇 안에 맹렬히 맴도는 생의 의지를 엿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밥그릇을 떨어뜨린 아들 녀석을 혼내는 대신 다독여줄 수 있었던 것도 엄마를 향한 아이의 호의가 그 안에 소복하게 쌓여 있음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시선을 조금만 따뜻하게 덥힌다면, 그릇의 속살을 슬그머니 넘겨다보는 일이 생각만큼 어렵지는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보통 생각이나 글이 이쯤 이르면 ‘지금 내 삶은 어떤 그릇이지?’ 라는 질문으로 넘어가게 마련이다. 이런 종류의 자기 질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익숙하고 유익한 성찰이지만 동시에 어떤 사람에게는 꽤나 낯간지러운 과정이기도 한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그렇다.
만일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떨까? 지금 당장 찬장 문을 열고 깨끗이 닦아 엎어 놓은 그릇 하나를 향해 소리 내어 이렇게 묻는 것이다.
“그릇에는 어떻게 해야 좋은 것을 담을 수 있지?”
그러면 그 그릇이 유약 바른 흰 피부를 반득이며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지금처럼 엎어 놓고는 나한테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걸?”
그래서 그 그릇 하나를 주둥이가 위로 올라가게 뒤집어 놓아둘라치면 그제야 숨통 트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해올 것이다.
“그래. 지금처럼 주둥이가 하늘로 열려야지. 좋은 건 다 위에서 내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눈도, 비도, 바람도, 심지어 따뜻한 국물도.”
그 말을 들은 우리는 그제야 그릇의 자태를 유심히 살필 것이다. 무엇이든 담고 있는 그릇은 하나같이 하늘을 향해 주둥이를 벌리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행여 위로 갈수록 넓어지는 주둥이를 가진 녀석들을 보게 되면 흡사 하늘을 향해 손을 벌리고 선 것과 같음도 알게 될 것이다. 하늘과 통할 때 비로소 담을 수 있는, 그릇은 천생(天生) 그릇임에 탄복하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 중 누군가가 그릇으로부터 그런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면, 위로 벌린 주둥이에 하늘빛이 거품처럼 보글거리는 걸 눈치챘다면, 그렇다면, 오늘 만나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유쾌하게 말을 건네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명백한 에피파니였다고.  

류성렬은 동화작가이자 인천 논현감리교회 교육목사다. 장편동화 「너나들이 마을」로 제4회 우리교육 어린이책 작가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저서로 「애루수 시대」, 「고따개비 마을의 비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