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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DECEM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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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폭풍 걷히고 빛 비추리라

그가 섬기는 세상
거센 폭풍 걷히고 빛 비추리라APC 선수위원장 이정민

올해 초 평창 동계올림픽의 열기는 대단했다. 인기 종목인 스피드스케이팅과 쇼트트랙을 비롯해 생소한 종목인 컬링, 스켈레톤에 이르기까지 온 국민이 하나가 된 듯 보름 동안의 눈과 얼음의 축제를 반겼다. 그리고 이어진 동계패럴림픽(장애인올림픽)은 언제 불길이 타올랐나 싶을 만큼 싸늘한 무관심 속에서 치러졌다. 그곳에는 크로스컨트리 스키와 바이애슬론 7종목에 출전한 이정민 선수가 있었다.
이정민은 열 살 때 장애인이 되었다. 그 뒤 주님의 세밀하신 계획에 따라 스포츠 선수가 되고, 마침내 올해 아시아패럴림픽위원회(APC) 선수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장애인 체육인을 섬기며, 그들의 불편한 육신, 더 불편한 사회적 시선과 차별에 맞서 싸울 각오가 충분히 되었을 터다. 그의 각오를 들으러 낙엽이 절정으로 물든 연세대학교 교정으로 달려갔다.
취재 서진아 사진 정화영

 

 

 

언뜻 봐서는 건강해 보이는데, 어디가 어떻게 불편하신가요.
전신 마비 후유증으로 양쪽 발목의 근육이 심하게 약해져서 자유롭게 걷지 못해요. 지금은 보조기를 착용하고 걷습니다. 남들보다 금방 피로해지고 오래 걸으면 발목에 통증을 많이 느껴요.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더 심해집니다. 지금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싶은데 해가 갈수록 약해지는 게 느껴져서 건강을 위해 좀 더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열 살 때 병을 앓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들었는데, 기억나세요?
주일이었어요. 전날부터 몸이 으스스해서 교회에 못 갔어요. 좀 쉬었더니 괜찮은 것 같아서 친구들하고 자전거를 타려고 밖에 나갔는데 손에 힘이 안 들어가는 거예요. 페달을 밟고 자전거에 올라타려고 하는데 힘이 없어서 자전거를 놓쳤어요. 집에 와서 어머니께 몸이 이상하다 말하고 잤는데, 다음 날 아침 못 일어났어요.

무슨 병이었나요?
발병 후 병원 중환자실에서 두 달 정도 입원해 있으면서 여러 가지 검사를 했어요. 마지막에 길랭바레증후군이라는 판명을 받았는데, 말초신경에 염증이 발생하는 급성 마비성 질환이에요. 처음에는 전신 마비 상태였는데, 마치 달팽이가 기어가는 속도만큼 느리게 회복되어 1년 반 만에 전신이 회복되었어요. 그런데 양쪽 발목하고 손끝의 신경은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어요. 말초신경이 마비되다 보니까 자극적인 활동을 못 해서 손을 잘 떨고 손가락이 엄청 얇아요. 다행히 생활에 큰 불편은 없는데 발목을 움직일 수 없어서 보조기 없이는 걷는 것이 어렵습니다.


많이 힘드셨겠어요.
저보다는 부모님이 많이 힘드셨을 거예요. 저는 어려서 그냥 몸이 아픈 것에만 집중했지만, 어머니, 아버지는 두 분에게 죄가 있어 아들인 제가 그러한 고통을 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여 가슴을 치셨다고 해요. 저희 집이 엄청나게 잘사는 집도 아니고,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가정이었거든요. 왜 우리 가정에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해석하기 어려워 좌절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머니께
“이 아이를 사랑하느냐? 걱정하지 마라. 내가 더 사랑한다”고 말씀하셨대요.
그런 마음을 주시자 더 이상 우울해하지 않고 당당해지셨다고 해요. 어머니의 밝고 긍정적인 성품 때문인지 저도 몸은 불편했지만 쾌활하게 유년시절을 보낸 것 같아요.

학교생활은 어땠어요?
1년 반 동안 학교에 못 가서 유급했어요. 다시 학교에 갔을 때, 병원에 오랫동안 누워 있어서 살이 급격하게 찌고, 다리가 불편하니까 몸을 압박하는 쫄바지를 입고 있는 모습이 놀림 받기 딱 좋았죠. 그러나 밝은 성격 때문인지 크게 상처 안 받고 지낼 수 있었어요. 아이들이 놀려도 장애 때문에 놀린다고 생각 안 했던 것 같아요. 천진난만하다고 할까, 자존감이 높다고 할까. 그 이후부터 대학 때까지 죽 그렇게 지냈던 것 같아요.

그러다 자신의 상황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있었나요?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첫 직장에 들어갔어요. 제조업 회사였는데 언어폭력이 심했어요. 욕은 기본이고 인격적으로 하대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제가 다리가 불편해서 행동이 조금 굼뜨면 “아이씨, 그 다리 잘라버리던지” 하면서 함부로 이야기했어요. 그때부터 장애로 인해서 내가 욕먹고 손가락질받는구나, 무시당하고 비웃음당하는구나, 나를 안쓰럽게 보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제야 학창 시절에 받던 놀림이 장애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된 거죠. 그걸 깨닫고부터 자존감은 바닥으로 추락했어요. 삶이 피폐해지더군요. 그러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시작했어요. 내가 부족하니까 무조건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게 된 거죠.


그 상황을 어떻게 극복했나요?
운전을 하고 가는데 어머니가 보내주신 CD가 눈에 띄기에 틀었어요. 브라운아이즈소울의 〈폭풍 속의 주〉라는 곡이었는데, 해가 떨어지는 시점에 차를 몰며 그 곡을 듣는데 제 얘기 같은 거예요. 한 시간을 울었어요. 아름다운 사인이나 응답을 받은 게 아니라, 미친 듯이 하나님께 욕을 한 것 같아요. “왜 우리 집 안에 이런 시련을 주시고 왜 나에게 이런 장애를 주시느냐”고 소리쳤어요. 내가 장애인으로서 바닥을 치는 것이 그분의 계획이라 해도 저는 그렇게 안 살고 싶다고 발버둥 쳤던 것 같아요. 그 당시 저는 정말 세련되고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었거든요. 그 이후 체계적으로 퇴사 준비를 했어요.

그래서 새로운 직장을 찾았나요?
돈을 많이 버는 폼나고 세련된 직장으로 가자 마음먹었어요. 한국으로 돌아와서 영국계 금융 회사에 들어갔어요. 원하던 대로 연봉도 많고 번듯한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회사였어요. 제가 바라던 세련되고 남부럽지 않은 삶을 얻었다는 생각에 자존감이 회복되고 차츰 안정을 찾아가는 듯했어요. 그런데 비즈니스 목적으로 골프를 치러 갔는데 다리가 약해서 스윙조차 안 되었어요. 차츰 그런 자리에 제가 빠지게 되었어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야구를 하러 갔는데 그것도 안 되고, 테니스를 치러 갔는데 그것도 안 되었어요.

어렵게 찾은 안정적 삶에 만족이 안 되던가요?
제가 회사생활을 굉장히 열심히 했거든요. 출근 시간이 8시인데 6시 30분에 가고 퇴근 후에도 늦게까지 남아 있고…. 너무 허탈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아마 어려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무한도전-조정 편〉을 보게 되었어요. 앉아서 운동하는 거요. ‘아, 저거라면 할 수 있겠다’ 싶어서 보자마자 미사리로 달려갔어요. 마침 무한도전에 나왔던 김지호 코치가 있었어요. 제가 체험해 보고 싶다고 했더니 허락해 주어서 로잉 머신을 탔어요. 제가 머신을 타는 모습을 보더니 김지호 코치가 장애가 있느냐 묻기에 장애 3급이라고 했더니 국가대표 해볼 의향 없냐고 하더라고요. 이 정도 수준이면 장애인올림픽에 국가대표로 나갈 수 있겠다고요.

그 제안을 받아들였나요?
저는 기껏해야 헬스장에서 운동한 게 전부인데, 국가대표를 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고민해 보겠다고 하고 돌아왔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어요. 결국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정했어요. 회사 대표님도 반대하시고, 당연히 부모님도 반대하셨어요. 아버지는 넉 달 동안 저랑 말도 안 하셨어요. 직장을 그만두고 협회에 갔더니 1년 중에 합숙을 90일밖에 안 한다고 하더라고요. 나머지 시간은 알아서 연습하래요. 그러니까 협회 지원금이 딱 90일만 나오는 거였어요.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었어요. 게다가 올림픽이랑 패럴림픽(장애인올림픽)은 인식 자체가 다르더라고요. 운동복 하나도 제대로 지원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받은 퇴직금이랑 적금 깬 걸로 충당했죠. 

또 한 번의 연단이 시작된 건가요?
완전 패닉에 빠졌지만 이미 바꿀 수도 없잖아요. 조정 연습하면서 남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까 고민하다가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스포츠 행정에 관심이 있어서 연세대 국제대학원에 진학했어요. 넉넉한 상황에서 하는 공부가 아니라 마음이 편치는 않았지만 그래도 2년 반을 버텼어요. 그러다가 조정은 겨울에 훈련을 할 수가 없어서 겨울 운동을 알아보던 차에 크로스컨트리 스키 캠프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물론 지원은 없었고요. 그래서 또 사비를 털어서 갔지요. 그때 골동품 좌식 스키를 타고 주야장천 훈련을 했어요. 그리고 전국동계체전에 나가서 금메달 3개를 땄어요. 엄청 좋았어요. 금메달 따면 포상금이 나오거든요. 1개당 1백만 원씩 3백만 원 하고, 우수 선수로 뽑혀 2백만 원을 더 받았어요. 없는 형편에 5백만 원이라니! 그때 생각하면 정말 감격 그 자체입니다. 하하.

이후 삶의 지표가 조금 달라졌겠군요.
전국동계체전은 크로스컨트리 스키, 바이애슬론 국가대표 선발전 및 실업팀 선수를 발굴하는 자리이기도 했어요. 저는 금메달을 따서 자동으로 국가대표에 포함되고 실업팀에도 들어가게 되었어요. 2년 반 만에 팀에 소속되어 영리적인 생활을 다시 찾았어요. 또 마침 평창 동계올림픽이 열리게 되어, 유례없는 지원을 받게 되었어요. 시기가 좋았죠. 조정은 1년에 90일 합숙이었는데, 스키는 합숙 기간이 250일이나 되었어요. 250일이면 돈 걱정 없이 운동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해서 국가대표로 평창 동계올림픽 크로스컨트리 스키와 바이애슬론 7종목에 전부 출전했고, 최고 성적은 바이애슬론에서 기록한 7위입니다.

와, 이야기의 결말이 해피엔딩이라 좋아요.
평창 동계올림픽을 마지막으로 6년여의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은퇴했어요. 지금은 공부를 이어서 하고 싶어서 연세대학교 스포츠응용산업학과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어요. 그리고 지난 9월에 열린 인도네시아 장애인아시아경기대회에서 APC 선수위원 후보로 누군가 저를 추천했나 봐요. 더 이상 장애인 체육에는 참여를 안 하고 학업에 집중하려고 했는데, 교수님도 추천을 해주셔서 나갔어요. 열심히 선거 운동해서 선거위원으로 선임되고, 더불어 선수위원장의 영광까지 안겨주셨어요.

APC는 어떤 기관이고, 어떤 임무를 맡으시나요?
정식 이름은 아시아패럴림픽위원회예요. APC는 하계 및 동계 아시아경기대회를 개최하여, 아시아 장애인 선수들에게 스포츠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장애인들이 전문적인 스포츠 지식을 연마할 수 있도록 돕는 기관입니다. 아시아는 다양한 인종, 언어, 종교가 공존하는 지역이에요. 불평등에 대한 부분도 아직 많이 남아 있고요. 그래서 소통이 어렵고 일의 진행도 느려요. 이번에 뽑힌 5명의 선수위원들은 모두 영어가 가능해서 소통이 훨씬 수월해요. 선수위원장으로서는 제가 최연소 기록인데, 다른 4명도 모두 젊은 분들이에요. 개혁적인 변화와 발전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임기가 끝나는 2022년까지 각국의 다양한 환경과 문화를 고려해 아시아 장애인 체육 발전을 위해 노력할 생각입니다.

지금 하시는 공부는 어떤 건가요?
당뇨병, 암, 고혈압, 고지혈증, 심장질환 같은 만성질환에 대해서 운동을 통해 병의 호전 효과를 입증하고, 또 그것과 관련해 예방이나 개선을 위한 운동 프로그램을 개발, 연구하는 것입니다. 장애 역시 만성질환이니까 운동이 필요합니다. 다른 질병과 마찬가지로 평생 가지고 가는 것이니까요. 

장애와 스포츠 경험을 어떻게 세상 가운데 펼치고 싶으신지요?
개발도상국에 있는 장애인들의 삶은 정말 처참해요.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장애인들은 가난과 종교적 이유 등으로 잔인하게 학대당하는 경우가 많아요. 가능하다면 그 나라의 장애인들을 위한 운동을 개발하여 지속 가능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보급하고 싶습니다. 또한 만성질환 환자분들의 상황과 마음을 잘 헤아려서 적합하고 유효한 운동을 처방하는 연구를 하고 싶습니다. 운동을 엘리트 수준이 아닌 생활체육의 수준으로 전폭적으로 늘렸으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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