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지는 데에는 조건이 없다고들 한다. ‘예뻐서’, ‘멋있어서’ 한눈에 반했다지만, 남이 보기엔 ‘콩깍지’인 경우가 다반사이다. ‘능력이 많아서’, ‘믿을 만해서’ 이런 조건들로 사랑하게 되었다고도 하는데 잘 모르겠다.
그것도 사랑인지. 실은 연애나 결혼이라는 ‘계약 관계’를 이행하기에 좋은 조건을 선택하는 합리성에 가깝다. 그러니 더욱 궁금해진다. 도대체 ‘사랑’이 뭘까? 사랑의 스펙트럼이야 부모의 사랑부터 인류애, 생명경외까지 그야말로 넓고도 무한하지만 오늘은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서만 좁혀서 묵상하려 한다. 드라마 <아는 와이프>가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아는 와이프>라. 드라마 제목이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렇지, 남편이 아내를 알지 못한다면 다른 누가 더 잘 알까? 성경에도 ‘안다’는 동사는 머리털 하나까지 속속들이 꿰고 있는 친밀하고 구체적인 앎을 뜻하는 말이다. 성적(性的) 친밀성도 포함한다. 그러니 남편과 아내만큼 서로를 잘 ‘아는’ 사이가 또 어디 있겠나? 그러나 또 따지고 보자면 남편과 아내만큼 서로를 모르는 사이도 드물다.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해서, 혹은 지친 일상을 가장 자주 접하는 사이라서 오해와 상처가 그 어느 사이보다 많고도 깊다. 드라마의 주인공 ‘주혁’과 ‘우진’도 그런 경우였다. 적당한 대학을 나오고 은행 대리로 지내는 주혁은 대한민국 30대 가장의 지극히 전형적인 모습이다. 전셋집 대출금 갚으랴, 두 아이들의 육아 비용에, 양가 어르신들 용돈에, 등골이 휘는 삶이라 직장에서 전쟁 같은 일상을 버티는 중이다. 유일한 휴식이라고는 퇴근 후 즐기는 게임 하나인데, 그마저도 아내 눈치에 옷방 구석에 숨어서 잠깐 즐길 뿐이다. 처음 드라마는 상당 부분 주혁의 입장에서 그려지고 있어서 아내 우진의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시청자들이라면 다분히 아내가 너무한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우진은 허겁지겁 퇴근하는 남편을 향해 손질하던 꽃게 다리를 던지고, 심지어 남편이 비상금을 모아 야심차게 장만한 게임기를 통째로 욕조에 담가 버렸다.

우진도 잘 안다. 자신은 이미 ‘분노조절장애자’라는 것을. 시도 때도 없이 속에서 열불이 나니까. 결혼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육두문자가 입에서 자연스레 나오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이미 손과 발은 폭력적 행동을 옮기고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우진의 이런 상황은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다. 남편 월급으로는 도무지 감당이 안 되는 생계형 지출에 우진은 피부 관리실에서 일을 하고 있다. 직장 일을 하며 두 아이를 돌보려니 손 하나가 아쉬운데, 남편은 아침에 자기 몸 하나 건사하고 나가는 것도 버거워한다. 물론 피치 못할 사정이 있겠지만, 어쩌다 부탁한 아이의 하원조차 믿고 맡길 수가 없다. 늘 펑크가 나니 결국 ‘미안해요’를 연발하며 뛰는 쪽은 우진이다. 게다가 우진은 치매인 친정엄마로 인해 심신이 더욱 고단한 삶이다. 남편에게 하소연을 하고 싶어도 늘 분주히 들고나는 남편은 언제나 ‘나중에’라고만 했다. 인내심 강하고 자존심은 더 강한 우진이었던 지라, 그저 꾹꾹 참고 버티다 이 지경이 온 거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드라마니까 가능한 설정이다. 아내가 너무 무섭고 싫은 주혁이 신세한탄을 하다가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500원짜리 동전 하나를 얻었다. 돌아가고 싶은 연도의 동전을 특정 톨게이트에 넣으면 된단다. 우진을 처음 만났던 2006년 동전을 선택한 주혁, 놀랍게도 그날 그 시간으로 돌아가 있었다. 성추행을 당하는 고등학생 우진을 돕다가 얽힌 인연이었다. 하여 그 상황이 반복되고 있음에도 애써 모른 척했다. 그러고 자고 깨니 다시 2018년, 모든 것이 바뀌어 있다. 아내는 주혁의 첫사랑이었던 ‘혜원’이다. 부잣집 외동딸이던 혜원 덕분에 주혁이 사는 집은 더 이상 작은 전세 아파트가 아니다. 이층짜리 단독주택, 게다가 넓은 거실엔 주혁 전용 게임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브라보! 이렇게 세상이 달라지다니. 그래, 이번 생은 꽃길만 걷는 거야~”

하지만 아뿔사, 달라진 것은 아내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선택으로 지인들의 삶이 다 달라져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전(?) 아내였던 우진이 싱글로 주혁과 같은 은행에서 근무한다는 사실! 불편함도 불편함이지만, 우진의 밝고 활기찬 모습이 낯설었다. 도무지 인생을 리셋하고 싶었을 만큼 끔찍했던 옛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결혼 전 우진은 저 모습이었다. 화만 내는 아내를 싫어했지만, 아내가 왜 저리 되었는지를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다. 아, 나는 우진을, 그녀의 상황을 너무나 모르고 있었구나.
장모님이 치매라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장인어른이 사고로 돌아가신 뒤에 우울증을 너무 심하게 앓아 그리 되셨다 한다. 후회가 되었다. 사는 게 바쁘다고 장인 기일에 한 번도 장모님 댁을 찾지 못했다. 그 모든 걸 혼자 감당했던 거구나. 비로소 우진의 고단함을 ‘알게’ 되었다.
사실, 이 드라마는 지극히 ‘아내-편향적’으로 구성되었다. 아내의 고단함을 몰랐던 남편이, 비로소 깨닫고 후회하고 다시 관계를 회복하려는 모습만 그려졌으니까. 하지만 남편의 고단함인들 만만했을까. 더구나 요즘 같은 업적 평가 위주의 경쟁 시스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극 중 주혁과 우진이 함께 일했던 은행과 같은 직업 환경은 사실 거의 없다. 대리가 급한 사정이 생겼다면서 근무 시간에 자리를 비우는데, ‘얼른 다녀와’ 하며 그 자리를 지켜주는 팀장이 어디 있으며, 직원 대신 자신을 경질하라고 나서는 지점장이 어디 있겠나. “문제는 직장 일만 담당하던 남편과 직장 일에 더하여 육아, 가사, 친정식구까지 돌본 아내의 무게가 다른 거잖아요?” 그리 따질 수도 있겠다. 맞다. ‘분량’으로 말하자면 우진의 몫이 너무 과했다. 드라마는, 몇 번의 동전 던지기 끝에 다시 남편과 아내가 된 두 사람의 변화된 아침을 보여 주면서 끝이 났다. 알람 소리에 함께 깨고 번갈아서 아이들을 챙기고 웃으며 출근하는 모습으로.

아, 그러니까 공평하게 일을 나누어 하고 짐을 골고루 지면 되는 것일까? 단순히 고단한 일의 문제였다면 가사도우미나 친정엄마 찬스가 해결책일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사랑의 ‘환경’이지 ‘조건’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진과 주혁이 깨달은 사랑의 조건은 무엇일까? “알면 사랑한다.” 통섭을 주장하는 어느 학자가 그리 말했었다. 하지만 적어도 사랑에 관한 한 우리는 반대라고 생각했다.
사랑해서 알고 싶어지는 것이라고. 사랑하니까 이해하고 싶고 도와주고 싶은 거라고. 그런데 먼저 알아야 사랑한다니.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 가능한 이 드라마의 제목을 나는 이 관점에서 풀고 싶다. ‘아는’ 와이프란 이전 삶에서 한번 아내였기에 정보를 아는 것 이상의 의미이다.
아내(남편)의 마음과, 처한 상황과, 괴로움과 공포를 ‘알아야’ 그래야 비로소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화학 반응의 열정 그 이상이다. 선택지가 있다면 내가 아닌 ‘네’가 살고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과 이를 위해 내 몸이 어느덧 움직이고 있는 상태, 그게 사랑이 아닐까. 그래서 사랑은 감정만이 아니라 통전적인 ‘행위’이다. 네가 무엇을 해야 비로소 사는 듯 생기 있고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마지막 회에서 주혁과 우진이 여전히 바쁘고 고달프고 동동 뛰는 상황에서도 환히 웃을 수 있었던 까닭은, 단순한 육아 분담 때문만은 아니지 싶다. 상대방의 버거움을 ‘알아주는’ 남편과 아내였기에, 그래서 기꺼이 내 몸과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기에 가능한 웃음이다.

사랑의 조건이 ‘앎’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익히 우리에게 가르치신 바다. 우리 인간의 상황을 아시기 위해, 우리에게 맞춤형의 사랑으로 움직이시기 위해, 몸을 입고 인간으로 오셨지 않나.
물론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땅에 육을 입고 오셨다는 사도 요한의 신앙고백을 뒤집을 마음은 없다. 다만 처음의 신적 사랑이 온전히 인간에게 맞춤형의 사랑이 된 것은 그가 온전히 인간으로 살아내시고 인간을 ‘알았기에’ 가능했다는 말이다.
이제라도 ‘너’를 보자. 나의 전제와 답으로서가 아니라. 온전히 너의 의미와 상황을 이해하기 위하여. 너를 알고자 하는 그 마음이 사랑의 조건이다.  

백소영은 이화여대와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사회윤리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강의로, 글쓰기로, 그리고 대중 특강으로 사람을 만나면서 삶을 배우고 삶에 관여하는 구체적인 신학을 하려고 노력하며 산다. 저서로 「드라마틱」, 「엄마 되기, 힐링과 킬링 사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