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엘륄은 영국의 영문학자 C. S. 루이스와 다르면서도 또한 비슷한 면이 많은 프랑스의 법학자이자 역사가이다. 일단 둘 다 평신도 신학자이다. 자기의 전문 분야에서도 돋보이는 연구 업적들을 내놓았지만, 그와 동시에 신학 분야에서 고전의 반열에 오른 걸작들을 쏟아내었다. 또한 C. S. 루이스가 그러하듯이 엘륄 또한 기독교 외적인 분야에서 중요한 저작들을 내놓았다. 그러나 역시 루이스와 마찬가지로 그런 저작들 또한 실은 기독교 세계관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루이스가 영국 학계에서 (그의 기독교 변증가 이미지로 인해) 다소 소외되었던 것처럼, 엘륄 역시 (그의 개신교 사상가 이미지로 인해) 프랑스 학계에서는 소외되었다. 더욱이 당시 프랑스 학계는 개신교 신앙을 가진 지식인에게 우호적인 곳이 아니었다.

 
신학과 사회학의 변증법

엘륄은 변증법을 학문의 방법론으로 채택했다. 그런데 정(正)과 반(反)의 두 요소를 한데 합(合)하지 않고, 역설적 긴장 가운데 병존시켰다. 무엇보다 그의 학문 체계는 하늘의 관점에서 선포하는 신학과 땅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사회학을 결합시킨 것이다. 그의 사회학적 분석은 진보적이지만, 그의 신학적 선포는 보수적이다. 그의 분석은 절망으로 귀결되나, 그의 선포는 소망으로 전개된다. 그는 현실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는) 필연성을 보지만, 믿음 안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자유를 찾아낸다. 그의 저작들 모두가 언제나 이 두 축 가운데 하나를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사상 체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서의 폭을 넓혀야 한다. 가령 그의 「기술 체계」를 읽었다면, 이어서 「자유의 윤리」와 같은 작품을 집어 들어야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와 같은 변증법적 접근법을 가장 매력적으로 보여주는 신학적 작품으로 「하나님의 정치와 인간의 정치」를 들고 싶다. 열왕기하를 그의 신학적 입장으로 분석하는, 매우 독특한 신학적 강해서다. 여기에서 우선 등장하는 것은 선지자이고,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선포한다. 그 선포를 접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누군가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또 누군가는 거부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건 말건 결국 하나님의 뜻은 성취된다. 그리고 그 말씀을 순종한 이들은 복을 받으나 그 말씀을 거부한 이들은 심판받는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와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드러내 준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엘륄의 열왕기하 묵상에 전율을 느꼈다. 이 강해집을 구해서 읽어보시기를 강력하게 권하는 바다.
엘륄의 변증법 채택은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에 대한 이해와 무관하지 않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요 17:11, 16). 엘륄이 자신의 연구 프로젝트의 서론 격으로 집필한 작품이 바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다. 요한복음을 통해서 들려오는 주님의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다. 그렇기에 실존 가운데 긴장이 있다. (유신론적 변증법을 대표하는)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역설을 「죽음에 이르는 병」을 통해 잘 묘사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무한과 유한, 시간과 영원, 자유와 필연의 접점에 서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변증법의 연장 선상에서 볼 때 엘륄은 분명 키에르케고르의 후예이다.

기술로 들여다보는 세상

자크 엘륄의 모든 사회학적 분석이 근본적이고 거시적이지만, 특별히 기술 철학이 그러하다. 그는 기술이라는 측면을 통해서 역사 전체를 조망하고, 현대 세계를 분석한다. 여기에서 기술이란 과학기술 입국을 말할 때의 그 기술이 아니라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만들어지는) 효율성을 추구하는 방법들의 총체이다. 가령 연애의 기술로 한동안 회자되던 픽업아트를 생각해 보라. 이성을 유혹하겠다는 목표 아래 극도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방법론이고, 나름 큰 시장을 형성하였다. 지금의 상황은 효율성이 (원래의 목적을 위한) 수단의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목표의 자리를 찬탈한 상황이다. 엘륄은 인간을 둘러싼 환경을 세 단계로 개괄한다. 고대의 환경은 자연이고, 중세의 환경은 도시이다. 그리고 물론 현대의 환경은 바로 기술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기술 속에서 살아가며, 그 기술 너머를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지고 있지 않다.
기술이 우리의 실존을 규정하는 좋은 사례로 스마트폰을 들 수 있겠다. 현대인은 스마트폰이 형성한 인식론적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이제 모두 스마트폰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지하철 안에서 보면 모든 이들이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있다. 그들이 경험하는 세상은 스마트폰의 그 작은 창으로 규정된 것이다. 그러니까 기술은 실상 우리의 실존을 지배하는 시대정신이다. 기술은 우리로 하여금 전적으로 자신을 의지하고 신뢰하게 만들었다. 현대의 기술은 자동성(효율성의 추구), 확장성(진보의 추구), 보편성(문화의 균일화), 자율성(외부 개입의 거부) 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즉 특정 기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이면에 놓인 정신이 문제인 것이다. 그 정신이 문화와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로마서 7장 24절에서 단어 하나를 수정하고 싶어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기술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기도로 여는 새로운 세상

이렇듯 엘륄의 기술 분석은 우울하다. 기술로 작동하는 현실은 우리의 믿음을 억압하고, 비관의 수렁 속으로 밀어 넣는다. 기술은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기독교와 동떨어져 있다. 그렇다면 이 비관을 깨부수고 닫힌 세계 속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시게 하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간단하다. 바로 기도이다. 우리의 손을 들고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을 구하는 가운데 우리의 앎이 바뀌고, 우리의 삶 또한 바뀐다. 필연성의 굴레에 휘말린 우리의 앎과 삶을 바꾸려면, 바로 기도가 요청된다. 기도는 우리의 눈을 열어 (기술의 전횡에 휘둘리고 있는) 인간과 세상의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있게 해준다. 기술의 필연성에 저항하여 믿음 안의 자유를 경험하기 위한 토대가 바로 이것이다. 기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정신에 기술의 세뇌가 아니라 성령님의 조명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도는 불가능한 것이다. 원칙적으로 보면 인간 존재의 모든 것이 요청되는 전인격적인 행위이나 기술 사회 속에서는 기껏해야 효율적인 도구로 전락할 따름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기도는 가능한 것이다. 이는 기도가 불가능함에도 기도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왜 기도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명령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기도의 명령은 응답의 약속과 함께한다.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을 바꾸고, 세상 앞에서 바로 서게 해준다. 기도는 기술에 지배받는 현대 사회에 대한 저항의 행위이며, (기술의 현대 사회 지배에 대한) 종말의 승리를 내다보는 희망의 행위이다. 기도는 세상 속에서 싸우며, 주님의 재림을 선취한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 속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신다. 기도는 종말로 가는 길을 예비해 준다.

고독한 선지자

엘륄의 삶을 지탱하는 슬로건은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로 정리될 수 있다. 그렇기에 그가 살던 보르도 지방에서 문제가 된 환경 문제나 청소년 문제에 집중했다. 그의 사유는 인류와 역사를 포괄하는 거대한 작업으로 결실을 맺었으나, 그의 실천은 댐 건설의 저지나 지역 청소년의 계도 등에 집중되었다. 심지어 그 실천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그는 하나님의 부름에 충실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사실 그는 강고한 현실 체제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 따라서 그의 사회 참여적 실천은 종종 말하는 선지자적 비관주의와 겹치는 대목이 있다. 그의 작품세계의 결론 격의 저작인 「존재의 의미」가 전도서 강해집이라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하나 현실 안의 비관은 믿음 안의 낙관으로 승화된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온 인류와 세상 문화를 심판하는) 종말론적 승리를 충실하게 믿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엘륄은 선지자이다. 세상을 향해 가차 없이 비판하고, 또한 은총을 선포했다. 하지만 그는 고독한 선지자였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눅 4:24). 그는 고향(프랑스)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타지(미국)에서 인정받았다. 실은 미국의 인정을 통해서 거꾸로 프랑스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종교적 정체성(개신교인)이 프랑스 학계에서 불편을 자아내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의 학문적 성취(특히 기술 연구)가 미국의 현실에 외려 더 부합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보면, 그의 연구는 전 지구적으로 적용될 수밖에 없는 탁월한 업적이다. 고향이 박대하던 선지자를 이제 전 세계가 주목한다. 앞으로 더욱 주목받게 될 것이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사람을 높이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닌가. 

이원석은 한국교회 변혁의 근간은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바른 공부에 있다고 믿는다.
성경과 고전 읽기를 통한 교회 성숙에 일조하고자 「공부하는 그리스도인」을 썼다.
지금도 한국교회가 공부하는 교회가 되도록 독려하는 마음으로 집필과 강의에 매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