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남도답사 1번지’ 양림동
글 양성현  &  사진 정화영

​

광주의 근대화가 시작된 곳. 천형(天刑)이었던 한센인(나환자)마저 온몸으로 껴안은 곳. 이곳 양림동은 선교사들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이제 광주는 ‘기독교 남도답사 1번지’라고 칭하자.
‘기독교 남도답사 1번지’ 양림동을 거니는 일은 아마도 ‘보이지 않는 의미 있는 시간의 순례’가 될 것이다. 양림동은 과거와 현재가 맞물린 곳이다. 광주 양림동은 선교사들이 들어와 전라도에 근대문화를 꽃 피게 한 텃밭 같은 곳이다.
양림동에서 만날 수 있는 큰 축은 광주 정신과 기독교 역사, 전통문화와 예술이다. 양림동은 광주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 선교사들이 발을 내디딘 곳답게 기독교 유적지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선교사 묘역을 비롯해 우일선 선교사 사택, 오웬기념각, 양림교회, 어비슨기념관, 수피아여중고, 광주기독병원 등이 기독교 문화의 대표적인 명소다.
또 양림동 골목길 곳곳에서 예술가들이 살았다. 이 작은 마을은 3·1운동부터 6·25전쟁, 5·18민주화항쟁까지, 숫자만 표시해도 알 수 있는 우리네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두루 겪었다. 그래서 양림동은 100여 년 전 시간이 멈춘 곳, 근대의 시간이 오롯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3·1운동 만세 현장과 5·18광주민주화항쟁 당시의 긴박한 현장을, 그리고 1백여 년 전에 이곳에 와 정착한 파란 눈의 선교사를 만날 수 있다. 그들과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

우일선 선교사 사택

광주 양림동에서 만날 수 있는 돋보이는 기독교 문화는 ‘헌신’이다. 천형이었던 한센인마저 온몸으로 껴안은 곳이 양림동이다. 그 흔적은 광주 양림동 마을의 가장 높은 언덕에 있는 우일선(미국명 윌슨, Robert Manton Wilson) 선교사 사택에서 만날 수 있다. 우일선 선교사 사택은 양림동 양림산 기슭에 동향으로 세워진 2층 벽돌집이다. 광주에 현존하는 서양식 주택 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당시 광주시의 생활로는 매우 고급스러운 저택이었을 것이다. 선교사 사택을 이처럼 고급스럽게 지은 것은 고아와 환자들과 함께 머물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광주 최초의 고아시설인 충현원이 이 건물에서 출발했다. 한두 명 데리고 있던 것이 6·25전쟁 이후 전쟁고아들이 많아지자 새로운 건물을 지어 분리했다.
우일선 선교사는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정성이 지극했다. 1909년 광주 제중원장직을 맡고 있던 우일선은 당시 10여 명의 한센병 환자들을 모아 수용했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한센병원인 광주나(癩)병원의 시작이었다. 그는 1912년 광주나병원을 지었고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자 나중엔 여수에 애양원까지 개척했다.
우일선 사택 주변엔 아름드리 피칸나무와 흑호도나무가 있다. 양림동에 정착한 선교사들이 일부러 심은 나무다. 선교사들은 고향에서 가져온 은단풍나무, 북미산 흑호도나무, 피칸나무, 포플러, 플라타너스 등 수목을 심었다. 아마 이들 고향 나무를 통해서나마 향수를 달래고 싶었을 게다. 피칸나무 열매는 영양이 부족한 우리나라 양민들에게 주요 식품 공급원이 되었을 것이다. 또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전한 셈이다.

​

선교사 묘역

양림동을 걷는 것은 기독교 순례를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흔적이 양림산 자락과 양림동 골목을 따라 오롯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호남신학대학 뒷산 양림산 정상에 기독교의 성지인 ‘선교사 묘역’이 있다.
무등산이 바라보이는 야트막한 산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그들이 터를 잡고 나무를 심고, 교육과 의료로 봉사를 펼쳐온 양림동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유진 벨 부부와 오웬, 브란트 의사 등 22기의 선교사 묘가 이곳에 모여 있다. 이들은 모두 광주 지역의 근대문화를 꽃 피게 한 주역들이다. 어쩌면 이들은 그저 이방인이 아닌 이 땅에서 헌신과 사랑을 쏟아 온 ‘진짜 광주 사람’이었다.
고요한 무덤들 앞에 서면 1백여 년 전 이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 선교사들의 희생을 추억하게 한다.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909년,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가장 먼저 묻힌 이는 오웬이다. 오웬 선교사는 의사이면서 목사였다. 1904년 12월 19일 유진 벨과 함께 광주에 기독교를 처음으로 전파한 인물이다.
이 선교사들이 양림동에서 보인 사랑은 지대했다. 선교 기간이 끝나도 자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먼 이국땅에 기꺼이 뼈를 묻었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묘역으로 기록되기에 충분하다.
그들은 국가나 인종적 이질감을 줄이기 위해 한국 이름을 쓰는 등 양림인으로 남으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애착, 사랑을 뛰어넘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들이 광주에서 펼친 업적 중에 근대화나 의료, 교육 분야 등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1백 년이 넘도록 당시 선교사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추모하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

오웬기념각

양림교회 옆에 ‘오웬기념각’이 있다. 오웬은 선교와 의료 봉사에 헌신해 온 광주 근대화의 선각자였다. 오웬은 선교와 의료 봉사에 헌신하다 1909년에 급성폐렴으로 세상을 떴다. 오웬이 급작스럽게 죽자, 1914년 가족과 선교회는 그곳에 오웬기념관을 세운다. 한국에 온 지 5년 만인 1909년 폐렴으로 사망한 오웬과 그가 존경했던 할아버지를 함께 기념하기 위해 올린 건물이다. 오웬은 생전에 이곳에 할아버지 윌리엄 오웬을 추모하는 병원이나 기념관을 지으려 했다. 할아버지 이름으로 된 건물을 짓고 싶었다. 하루 종일 걸어서 찾아온 조선 성도들이 성경 공부를 마치고 추위에 떨면서 노숙하는 것을 마음 아파했다. 살아서 못 이룬 꿈을 사후에야 이룬 셈이다. 기념각 입구 문지방에 ‘윌리엄 오웬과 클레멘트 오웬을 기념하여’라는 표찰이 붙어 있다.
사각형 건물 모서리에 강대상을 놓고 좌우 출입문을 통해 남녀 성도들이 출입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네덜란드식 벽돌 쌓기로 지어진 기념각은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당시의 정서에 의해 남녀 출입구가 따로 만들어진 점이 이채롭다. 남녀가 유별난 시절 한 사람이라도 더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예배당 출입문을 하나 더 만든 것. 여성을 위해서였다. 좌우 출입문의 모양과 크기가 동일하다. 남녀를 차별하지 않기 위해서다.
오웬기념각은 광주 신문화의 발상지다. 교회 행사는 물론 크고 작은 강연회와 음악회, 영화, 연극, 무용 등의 공연이 펼쳐졌다. 광주 최초의 오페라 공연과 서양 음악회가 여기서 열렸고, 3·1운동을 고취하는 설교가 행해진 곳도 여기다. 광주에서 처음으로 서양 음악회가 열린 곳도 여기인데, 1920년 미국 컬럼비아대학을 마치고 돌아와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일하던 김필례가 이곳에서 음악 발표회를 가졌다. 드라마 <각시탈>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

광주기독병원(옛 제중원) 의료전시관 

광주 지역 최초의 근대 병원은 제중병원으로 현재의 광주기독병원이다.
1905년 11월 20일 양림동에 둥지를 틀고 질병으로 고통 받는 지역 주민과 의료 소외계층에게 사랑과 나눔을 실천해 온 제중병원은 광주 근대 의료의 시작점이다. 한센인 치료를 처음으로 시작했던 곳이기도 하다. 1909년 4월 4일, 오웬 선교사가 급성폐렴으로 사경을 헤맨다는 다급한 전보가 목포 선교부에 들어왔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급히 행장을 꾸려 조랑말에 올랐다. 목포를 떠나 나주 남평쯤에 도달했을 때 길가에 걸인 한 명이 쓰러져 있었다. 산발한 머리에 몸에서 역한 냄새가 풍겼다. 손과 발은 짓물러 형태를 알 수 없었다. 그마저 한쪽 발에만 해어진 짚신을 신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걸인은 신음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한센병 환자였다. 한센병은 하늘이 내린 형벌이라 하여 친자식도 집에서 내쳐질 때였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이를 지나치지 않고 환자를 부축해 자신의 조랑말에 태웠다.
포사이드 선교사가 광주에 도착했을 땐 이미 오웬은 운명한 뒤였다. 이국에서 맞이한 동료 선교사의 죽음에 한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동료를 살리기 위해 길을 재촉했으나 한센병 환자를 거두느라 시간을 지체했다는 죄책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오웬의 부인이 슬픔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는 남편의 침대를 내주며 한센병 환자를 눕히도록 했다. 기력을 차리자 진료소로 옮겼다. 난리가 났다. “문둥병 환자를 병원에 데리고 왔다”며 다른 환자들이 거칠게 항의했다. 다른 곳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 환자를 눕힐 작은 공간으로 진료소 근처 오래된 벽돌 가마터를 마련했다. 가마를 입원실로 지정한 1909년 4월 7일은 사실상 광주나병원이 생긴 날이다. 광주나병원, 여수애양원 등을 설립해 이 땅에서 외면해 온 한센병 치료와 결핵 퇴치 사업에 크게 기여했다.
광주기독교병원 1층에 제중원의 역사 기록이 오롯이 남아 있다. 역사의학 자료 전시관이다. 1백여 년 전 제중원 시절부터 사용되던 각종 근대 의료기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
수피아여고(수피아여학교)

광주에 온 선교사들은 110여 년 전 당시 척박한 땅에 기독교와 신문화를 전하고, 학교를 지어 근대 교육 토대를 마련했다. 1908년 수피아여학교와 숭일학교를 지은 것이다.
양림동 수피아여고에 고풍스런 옛 건물이 남아 있다. 커티스 메모리얼 홀, 윈스브로우 홀, 소강당 등이 있다.
커티스 메모리얼 홀은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한 유진 벨(배유지) 선교사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건물이다. 배유지 목사를 기려 ‘배유지 기념 예배당’으로 명명했다고 한다. 1층은 거주 공간, 2층은 강당으로 사용되는 교회 건물이다. 간결하면서도 매력적인 모양새다.
1927년 윈스브로우(Winsborough) 여사가 받은 생일 헌금으로 건축한 건물이 윈스브로우 홀이다. 건축은 이화여대 본관을 건축한 전문 건축가 서로득(Swinehart) 선교사가 건축했다. ‘원스브로우 홀’은 일제강점기인 1927년에 건립되어 근대 호남 지역 선교사들의 기독교 문화 전파의 거점으로서 역할을 했다.
붉은 벽돌로 건축된 광주 수피아여고 소강당은 광주 지역 근대사학의 효시이면서 광주에 남아 있는 체육시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수피아여고가 당시 학교 인가를 목적으로 1928년에 신축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지난 2011년에 철거 위기를 맞기도 했는데, 이를 가까스로 모면하고 같은 해 7월 22일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7호로 지정되었다.
붉은 벽돌 건물, 박공지붕과 왕대공트러스 등은 당시의 건축 양식과 기술을 후세에 전하는 건축물로서 가치가 높다.

​
최상현 고택과 사동 최부자집(최명구 선생)

양림동 탐방은 시간 여행이자 문화예술 여행이며 전통문화 산책길이다. 양림동은 근대와 현대의 역사가 고스란히 중첩돼 공존하는 곳, 서양 건축과 우리의 전통 한옥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광주시 문화재로 지정된 최상현 고택과 이장우 가옥, 사동 최부자집이 대표적이다. 최상현 고택은 ‘최 부자’로 알려진 최명구 선생의 장남 최상현이 살던 곳이다. 최상현 선생은 중국과 무역을 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던 재력가였지만 그보다는 독립운동을 돕고 빈민 구제에 힘쓴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최상현 선생은 특히 일본 침략 당시 이 건물 다락방에 독립운동가를 숨긴 일화로 유명하다.
그의 아버지 최명구 선생은 유명한 ‘흥학관(興學館)’을 만든 분이다. 흥학관은 이 나라 청년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장소이자 민족정신을 앙양하는 종합수련원 같은 장소였다. 일제강점기 때 월남 이상재 등 거물급 인사들이 흥학관에서 강연을 할 때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아쉬운 것은 이 멋진 집을 구경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최상현으로부터 집을 산 집주인이 문을 꽁꽁 닫고 있다. 게다가 자기 이름을 붙여 ‘최승효 고택’이라고까지 작명했다. 지정문화재 이름을 최초의 건축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이런 인심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양림동에서 약 5백 미터 떨어진 곳에 최상현 선생의 큰아들 최성숙을 위해서 지은 집이 있다. 일명 ‘사동 최부자집’이다. 1800여 평의 대지에 지은 어마어마한 규모다. 2층 목조 건물이 당당하게 서 있다. 원형으로 다듬은 주춧돌 위에 세운 기둥들은 함경도에서 가져온 목재를 사용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품격 높은 솟을대문에 꽃 담장까지 있었다고 하니, 위용을 짐작할 만하다.
지금은 변했지만 당시에는 주변 풍광이 아주 멋졌다. 최부자집 앞으로 광주천이 흘렀다. 20년대 초엽만 해도 시퍼런 광주천이 사동을 감돌아 나갔다. 생각할수록 멋들어진 풍광이다.
최부자집은 근대문화유산으로 가치가 높다. 그런데 이 멋진 집은 세월의 풍상을 고스란히 떠안고 쇠락해 가는 집이 됐다.

​
정율성 거리

양림동은 수많은 예술인들을 배출했다. 중국 혁명음악의 대부 정율성 선생, ‘고독의 시인’ 다형(茶兄) 김현승, 이수복, 문병란, 곽재구, 서정주가 여기에서 살았다.
TV 드라마 작가 조소혜, 소설가 황석영과 문순태, 박화성도 있다. 불우한 시대를 살다 간 영화감독 정준채, 그리고 임권택도 학창시절을 양림동에서 보냈다. 화가 배동신, 황영성, 우제길, 이강하, 한희원은 물론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 작가, 음악가 정추, 정근, 피아니스트 한동일 등 양림동을 거쳐 간 예술인 수는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된다.
이곳에 정율성(1914~1976) 생가와 정율성로(路)가 있다. 정율성은 광주가 낳은 항일운동가이자 중국 최고 인민 음악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광주 숭일학교를 마치고 1933년 항일 운동에 가담한 형들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옌안의 루쉰예술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한 뒤 1939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중국 아리랑’이라 불리는  〈옌안송〉을 비롯해 가곡·합창·동요·영화음악 등 360곡을 남겼다. 그가 남긴  〈팔로군 행진곡〉은 1949년 중국 건국과 함께 ‘인민해방군가’로 불리다 정식 군가로 비준 받은 유명한 곡이다.
정율성의 재능 개발은 외삼촌 최흥종 목사, 최영욱의 영향이 컸다. 정율성의 큰 외삼촌이 광주의 어른이자 가난한 자의 성자였던 오방 최흥종(1880~1966) 목사고, 작은 외삼촌은 미군정 시절 초대 전남도지사를 지낸 최영욱(1891~1950) 박사다. 최흥종은 정율성의 음악적 재질을 발견하고 음악 혼을 불어넣어 주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최 목사는 정율성에게 서양 명곡을 들려주거나, 그가 활동하던 광주YMCA, 교회, 양림동 선교사촌을 통해 서양 음악과 접하게 하면서 동시에 민족의식을 심어주었다. 정율성-정추 형제는 외가를 통해 기독교적인 생명 존중, 사랑 실천의 정신을 배웠다.

​
다형 김현승 시비

“가을에는 / 기도하게 하소서… /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호남신학대학 캠퍼스에 시인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 시비가 있다. 다형(茶兄) 김현승(1913∼1975)은 ‘고독의 시인’, ‘눈물의 시인’으로 불리었다. 시인의 문학 발원지는 양림동이다. 그는 신앙과 사유, 고독, 근대의 분위기 속에서 시의 방향을 가다듬고 천착했다. 그는 양림동을 자신의 고향이자 ‘영적인 저수지’로 여겼다. 부친이 양림교회에 부임하던 때부터 양림동에 정착해 30여 년간 머물렀다.
김현승 시인은 양림산을 자주 산책하며 사색을 즐겼다. 학교 뒷산에 있는 선교사 묘원으로 가는 길목엔 ‘시인의 길’이 조성돼 있다. 시인은 이곳에서 무등산과 시내를 바라보며 시상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는 숭실전문학교 3학년 때인 1934년 5월 동아일보에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과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로 등단했다. 이후 서정성 짙은 시와 종교적 성찰이 담긴 시를 발표하며 자신만의 문학세계를 열어 왔다.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사랑과 고독 등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시를 많이 썼으며 대표작으로  〈김현승 시초〉, 〈옹호자의 노래〉 등이 있다.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제중로 47번길에 시인 김현승의 호 ‘다형’에서 이름을 딴 ‘다형다방’이 있었다. 김현승 시인은 평소 커피를 좋아했다. 그는 생전에 커피를 즐겨마셨기에 ‘차를 좋아하는 형’(다형)이라고 불렸다.

​
3·1만세운동길

3·1만세운동 태동지인 광주양림교회(기장) 앞 휴먼시아아파트 놀이터에는 1919년 3월 1일에 있었던 독립만세운동 선언문인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의 기념비가 있다. 이곳은 일제로부터 조국이 해방되기까지 수많은 광주의 애국지사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조국의 독립을 외쳤던 곳이다.
광주에서의 3.1만세운동은 서울보다 늦은 3월 10에 열렸다. 지리적으로 서울과 떨어져 있었고, 준비에 다소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거사를 큰 장날과 연계해 장날 이전으로 택했기 때문이다. 1919년 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 아래 작은 장터에는 약 1천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양림동에서는 양림동 기독교인과 숭일·수피아 학생들이 광주천을 타고 내려왔고, 일반 시민은 서문통(西門通, 지금의 우체국 앞길에서 황금동으로 가는 길)으로, 농업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은 북문통(北門通, 지금의 우체국 옆 충장로2가에서 파출소까지)을 거쳐 운집했다.
이렇게 시위 군중이 모여들자 숭일·수피아 학생들은 선언문과 태극기 등을 나누어 주었으며, 장터에 나온 사람들까지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시위 행렬은 서문(西門)을 지나 우체국 앞을 돌아 충장로로, 금남로로 들어섰다. 그리하여 일제강점기 시대 법원(옛 광주은행 본점이 있던 자리) 앞을 지나 광주경찰서가 있는 곳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일본의 무장 기마헌병대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시위대에 폭행과 구타를 가하고 총검을 휘둘렀다.
양림동 3·1만세운동 태동지는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거리이자 테마공원이기도 하다. 놀이터 옆 민족대표 33인의 비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숙연해진다. 이분들과 수많은 광주 시민들의 열정적인 노력 덕에 우리가 이렇게 이를 추억하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간 여행 펭귄마을 & 컬러마을

양림동 커뮤니티센터 뒤편에 펭귄마을과 컬러마을이 있다. 온갖 잡동사니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고물 창고가 ‘펭귄마을’이고, 이와는 달리 깔끔한 색 담으로 단장한 곳이 ‘컬러마을’이다.
버려진 세간들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았기에 펭귄마을을 걷는 일은 마치 버려진 고물 거리를 만나는 것과 같다. 어쩌면 ‘시간 여행’이 될 것이다. 주막에 찌그러진 주전자와 양은냄비를 만나고, 자전거 바퀴, 문창살, 고장 난 벽시계, 재봉틀, 철모, 영화 광고 그림, 그리고 추억이 아련할 골목길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과거 화재로 폐허가 된 빈 집의 물건들을 버리지 않고 동네 벽에 하나둘씩 전시하게 된 게 시작이었다. 언뜻 구질구질해 보일 수 있는 소품들이지만 그걸 덮는 익살과 풍자가 있어 즐거운 골목 풍경이 되었다. 투박하지만 정감 넘치는 물건과 글, 그림으로 마을에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펭귄마을의 명소는 펭귄시계점과 펭귄주점이다. 대형 벽걸이 시계에서부터 탁상시계, 원형시계에 이르기까지 1백여 개가 넘는 오래된 시계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요즘 여행지에는 컬러가 대세다. 양림동 펭귄마을 바로 옆쪽, 펭귄마을 부근 동네에 컬러마을이 생겼다. 펭귄마을이 인기를 얻으면서 주위로 점점 확장한 데 따른 것이다. 장소가 늘어나면서 컬러 포토 존이 되고, 이어 가게들이 들어서고 있다. 컬러를 특징화한 가게들이 들어서고 있고 컬러를 내세운 마케팅을 시도하고 있어 곧 명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당신은 꽃을 닮았군요.”, “오늘도 예쁘다.”  컬러마을에는 아름다운 색을 칠한 벽에 예쁜 문구들이 쓰여 있다.

양성현은 여행칼럼니스트다. 「내일신문」 취재기자, 「뉴욕일보」 서울특파원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양림동 걷다」, 「앙코르와트 4박6일」, 「한양도성 가는 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