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고려대에서 열린 베리타스 포럼에 강사로 참석하고자 오스 기니스(Os Guinness)가 내한했다. 베리타스 포럼은 미국 각 지역의 주요 대학을 돌면서 진리에 대해 열린 대화를 진행하는 모임이다. 1992년에 당시 하버드대학교 교목이던 켈리 먼로 컬버그가 시작한 프로그램으로 이에 대해서는 그녀의 저작 「베리타스 포럼 이야기」(IVP)에 잘 다루어져 있다(개인적으로 ‘Finding God beyond Harvard’라는 원저 제목보다 번역서의 담백한 제목이 훨씬 낫다고 본다. 이 제목은 그녀가 이보다 10년 전에 묶어 펴낸 ‘Finding God at Harvard’에서 따온 것이다). 베리타스 포럼은 기독교에 대한 일차원적 변증보다 지적으로 깊이 들어간 대화를 나누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스 기니스는 첫 번째 연사로 적절한 선택이다. 기독교 변증과 전망을 위한 논의에서 그보다 더 적임자도 많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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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있는 멘토

그런데 우리에게 알려진 오스 기니스의 모습은 베리타스 포럼의 주요 연사로 불리게끔 하는 변증가의 이미지라기보다는 일종의 인생 멘토인 듯하다. 가령 「소명 The Call」(IVP)이나 「인생 Long Journey Home」(복있는 사람)과 같은 작품에서 드러나는 그의 모습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그는 이런 저작들에서 소명이나 삶의 의미라고 하는 진부하게 들리는 개념에 대해서 기존의 기독교 서적들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넓게 다루었다. 중국 선교사 자녀라 중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의문의 여지가 없는 영국인이다. 영국적 교육을 착실하게 이수한 교양인답게 폭넓은 지성사적 맥락 속에서 기독교적 주제를 차근차근 풀어 나가는 그의 고유한 방식은 독자들의 눈을 넓혀 준다. 단지 방대한 인용으로 지식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루는 주제들을 그러한 지식들로 구성된 거대한 흐름 속에 얹어서 사유를 심도 있게 전개한다.

오스 기니스의 이런 섬세한 논의의 귀결은 반드시 신앙적이다. 가령 그가 보기에 소명(Call)의 핵심은 우리를 불러 주신 하나님(Caller)을 바로 아는 것, 그 자체이다. 소명은 우리 삶을 특정한 사명(가령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는 것)으로 지정하는 것이라기보다 특정한 존재로 부르는 것이다. 곧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초대하는 것이 바로 소명의 참된 의미다. 주님을 따르는 자로서 기본적인 소명은 그분에 의하고, 그분을 향하며, 그분을 위한 것이다.  그렇기에 소명은  언제 어디서나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생각하고, 발언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소명은 이렇게 존재에서 행위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나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에 모든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을 섬겨야 한다.

회의의 문제를 검토하는 노작 「회의하는 용기 God in the Dark」도 오스 기니스의 신앙적 통찰을 잘 보여 준다(이 제목 자체는 C. S. 루이스의 「피고석의 하나님 God in the Dock」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회의(doubt)는 믿음과 불신이라고 하는 두 가지 마음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이다. 무엇보다 회의의 유형을 아홉 가지(망각, 신에 대한 오해, 빈약한 믿음의 근거, 헌신의 결여, 불순종, 감정의 폭주, 쓴 뿌리, 궁금증, 조급증 등)로 분류하여 치밀하게 분석한다. 아마도 회의의 성격과 유형에 대해 이보다 더 깊고 자세한 논의를 다른 신앙 서적들 중에서 찾기는 어려울 게다. 그야말로 모든 교회의 목회자와 선교단체의 간사들이 숙독해야 할 목회적인 걸작이다. 오스 기니스가 전개하는 전체 논의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잖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터이지만, 충분히 그만한 값을 할 것이다.

교양 있는 예언자

나는 이러한 방식으로 영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확장시켜 주는 오스 기니스의 이런 작품들을 모든 교인들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품격 있는 신앙 서적들이 오스 기니스의 작품 세계를 대변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애초에 「무덤파기 작전 The Grave-Digger File」을 통해서 국내 교회에 널리 소개되었다(이는 「악마의 비밀문서를 훔치다 The Last Christian on Earth」라는 제목으로 다시 나왔다). 아마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상기시키는 방식으로 구성된 가상의 작전 개요 문서이다. 그 작전의 목표는 서구 교회의 전복이다. 특히 사자의 방법(전면전)이 아니라 여우의 방법(비밀전)으로 즉 침투, 무력화, 전복, 이탈, 해방 등으로 진행된다. 어렵게 들리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신천지의 파수꾼 전략과 상당히 유사하다. 또한 약점이 아니라 강점을 공격하기 전략을 제안하는데, 이는 문화와의 접목을 통해서 교회를 예속시키고, 세속화시키는 것이다(그렇기에 낮은울타리에서 출간되었다).

「무덤파기 작전」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통해 드러나듯이 오스 기니스는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위기에 직면하여 진단과 해법을 내놓는 예언자다. 그런데 비단 「무덤파기 작전」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저작들, 특히 교회 성찰과 문명 비판에 초점이 맞춰진 저작들의 공통된 그의 전략은 적을 그의 무기로 공격하는 것이다. 이는 그의 학문적 멘토인 피터 버거로부터 배운 것이다. 피터 버거는 지식사회학 진영을 대표하는 사회학자이자 루터란 신자이다. 가령 상대주의를 상대화시키고, 회의주의를 회의하고, 해체주의를 해체하는 식으로 능란하게 다루는 것이 버거의 고유한 전략이다. 오스 기니스가 사회학자 버거의 영향을 받은 것은 그의 전공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평신도이다. 그 자신은 신학자나 목회자가 아님에도 수많은 목회자와 평신도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오스 기니스의 사역 모델은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그의 신앙적 멘토인) 프란시스 쉐퍼 목사일 것이다. 쉐퍼는 스위스 라브리 공동체에서 회의하는 세속의 지성인들과 청년들을 상대로 선교 사역을 행했다. 정직한 질문에 주는 정직한 답변이 그의 모토이다. 그렇게 정직한 추구를 위해 그는 서구 지성사를 폭넓게 파악해야 했다. 그의 주요한 변증서들은 한결같이 장구한 역사적 시야를 담지한다. 특히 그가 영국의 역사가 케네스 클라크의 「예술과 문명」에 대한 기독교적 응답으로 제출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스펙트럼은 압도적이다(이는 그의 아들 프랭키 쉐퍼가 만든 영화를 위해 프란시스 쉐퍼가 작성한 대본의 증보판 격으로 제작된 책이기도 하다). 비록 그의 철학적 이해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20세기 후반 기독교 지성을 대변했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새로운 르네상스

오스 기니스에게는 프란시스 쉐퍼의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능가하는 작품을 쓸 만한 역량(과 아마도 야심)이 있다. 프란시스 쉐퍼가 68혁명 이후 서구의 추구에 응답하였다면, 기니스는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서구의 고민에 대해 말을 건네고 있다. 근래에 출간된 「오스 기니스의 저항 Impossible People」이나 「풀’스 톡 Fool’s Talk」, 그리고 「르네상스 Renaissance」가 바로 그런 맥락에서 나온 작품일 것이다. 이 작품들은 하나같이 서구 문명의 황혼에서 역사를 돌아보고 있다. 현 시기가 역사의 전환기임을 그는 주목하고 있다. 「오스 기니스의 저항」의 원제, ‘불가능한 사람들’은 성직 매매를 강력하게 비판한 11세기의 개혁자인 피터 다미안(Peter Damian, 베드로 다미아노) 추기경을 가리켜 부르던 호칭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는 실로 교권으로 통제될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우리 역시 현대성(modernity)의 유혹 앞에서 다미안처럼 흔들리지 않는, 불가능한(흔들릴 수 없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풀’스 톡」은 「오스 기니스의 저항」과 궤를 같이한다. 특히 그 제목에서 암시되듯이 「풀’스 톡」이 전제하는 모델은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愚神禮讚)」이다. 아마 오스 기니스는 제2의 쉐퍼가 되고자 하는 것 이상으로 21세기의 에라스무스가 되고 싶어 하는 듯하다. 「우신예찬」, 특히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말하는 후반부가 그러하듯이 「풀’스 톡」 또한 어리석은 자가 되기를 촉구하고 있다. 광대가 지배층의 어리석음을 풍자하는 등의 바보 어법(Narrenrede)은 감춰진 지혜를 드러내는 오래된 방식이다. 이는 세상의 지혜를 넘어서는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선포하는 바울과 나아가 세상을 사랑하사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게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다. 부당하게 피고석에 앉게 된 하나님을 변증하기 위해서 이 불통의 시대에 다시금 소통, 즉 변증에 나서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도와 변증과 제자도를 하나로 결합해야 한다.

오스 기니스의 역사 인식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르네상스」이다. 초대교회 당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시야로 조망하는 가운데 지금의 위기를 검토하고 있다. 그리고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위협 속에서 도래한 서구의 황혼기에 필요한 것이 바로 새로운 르네상스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제안되는 큰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항」과 「풀’스 톡」을(가능하면 그의 모든 저작을) 함께 보는 것이 좋겠다. 어쩔 수 없는 서구 중심적 접근에 대해서는 유념해야겠지만, 우리 현실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더불어 그의 접근법을 우리의 자리에서 적극적으로 전유(專有)해야 할 것이다.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진가는 폭넓은 교양 속에서 논의를 전개하는 광대한 시야를 통해 잘 드러난다. 그가 제안하는 구체적인 내용보다 실은 그 폭넓은 시야와 심오한 교양이야말로 우리가 배워야 할 미덕이다. 우리의 영성만큼 교양이 진전할 때에야 한국교회가 세상 속의 빛과 소금으로 다시 서게 될 것이다. 

이원석은 한국교회 변혁의 근간은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바른 공부에 있다고 믿는다.
성경과 고전 읽기를 통한 교회 성숙에 일조하고자 「공부하는 그리스도인」을 썼다.
지금도 한국교회가 공부하는 교회가 되도록 독려하는 마음으로 집필과 강의에 매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