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육식물 화제   illust 장정윤

​

​

​

선물 생각이 많아진 건 설날 어간이어서가 아니라, 아내가 다쳤기 때문입니다. 눈이 잔뜩 내린 날, 자정 넘어서 사무실로 향한 게 사달의 시작이었습니다. 마을 입구부터 사무실까지는 절반이 비탈인데다 눈까지 소복하게 덮였으니 차를 버리고 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에 싣고 다니던 등산화로 갈아 신고 걸음을 재촉합니다. 거리는 5백 미터에 지나지 않고 달이 밝아 큰 걱정은 없지만, 춥기도 하고 요즘 부쩍 출몰이 잦아진 멧돼지 떼도 신경 쓰여 걸음이 빨라집니다. 그리고 그예 아내가 빙판에 미끄러지고 말았습니다. 다리를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 밤새 앓고 일찌감치 병원을 찾았습니다. 최소 3개월은 꼼짝 말랍니다. 약속, 모임, 회의 죄다 취소입니다. 여태 무수리로 부려먹으며 살았는데, 이제 왕비로 모셔야 할 판입니다. 하루 세 번 수랏상 올리는 일부터가 걱정입니다.

그런데, 이튿날부터 선물꾸러미들이 밀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스타트는 역시 별천지모임 식구가 끊었습니다. 근처까지 와서 전화를 주는 바람에 돌려보내지도 못했습니다. 세 식구가 들이닥쳐서 이삿짐에 버금가는 짐을 내렸습니다. 반찬부터 간식에 커피까지 수많은 통과 상자를 남기고 돌아갔습니다. 밤에는 또 다른 식구가 달려왔습니다. 짬짜미라도 했는지 다들 코앞에서 전화질입니다. 이번엔 회복에 좋은 약이랑 아내가 죽고 못 사는 떡을 해왔습니다. 며칠 뒤에는 가까이 지내는 교회 친구 차례였습니다. 들고 온 짐을 풀어놓고 세어보니 총 23종이었습니다. 부엌을 통째로 옮겨온 줄 알았습니다. 새것이 분명해 보이는 그릇들도 자기들은 안 쓰는 물건이라며 다 가지랍니다. 이렇게 먼 길을 밤낮 가리지 않고 찾아와준 손님들이 참 반가웠습니다. 왕비마마는 말할 것도 없고 수라 걱정을 덜게 된 ‘종놈’도 입꼬리가 귀에 걸렸습니다. 선물 받는 게 그렇게 좋더냐고요? 좋다마다요. 하지만 진짜 고마웠던 건 선물 하나하나에 딸려온 마음이었습니다. 값나가는 선물이 아니었어도 그렇게 반색을 했겠느냐고요? 두말하면 잔소리죠. 증거도 있습니다.

시골로 사무실을 옮기고 일주일의 대부분을 산에 박혀 살기 시작했을 무렵, 규리네 네 식구가 가까운 계곡으로 물놀이를 왔었습니다. 아내는 규리 엄마와 초등학교 동창 사이여서 이미 왕래가 있었고, 저는 첫 대면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참 예뻤습니다. 요즘 아이답지 않게 휴대폰이나 게임기가 아니라 책을 들고 있었습니다. 식물을 좋아하고 곤충을 사랑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짜리가 풀이며 나무 이름을 꿰고 있었습니다. 꼬맹이들도 일정한 직장 없이 이 일 저 일 하며 시골에 사는 우리 부부를 신기해했습니다. 그렇게 헤어지고 몇 년 뒤, 규리가 선물을 보냈습니다. 학교에서 에코백을 만들었는데, 이모(아내를 걔는 그렇게 부릅니다)한테 주고 싶어서 보냈다는 겁니다. 제법 근사했습니다. 뒤집으면 안팎이 바뀌게 만들어 가방 두 개와 같은 효과를 내게 했습니다. 갓 중학교에 들어간 계집애가 조그만 손으로 감을 마르고 바느질을 했을 생각에 마음이 따듯해졌습니다. 규리가 대학에 들어간 지금도, 그 가방은 아내의 애장품입니다. 가방도 고맙지만 그 안에 가득 담긴 마음이 더 감사했습니다.
물론, 반대쪽 예도 있습니다. 값으로 치자면 규리의 가방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윗길인데도 썩 개운치 않은 선물들이 숱합니다. 거래처에서 명절마다 보내오는 선물은 고마우면서도 공허합니다. 카드 한 장 없이 건네주는 생일선물은 감사하면서도 아쉽습니다. 완충재에 둘둘 말아서 쥐어주는 선물은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베푼 것 없이 받는 선물임을 감안하면 감지덕지지만, 욕심은 끝이 없어서 기왕이면 마음까지 옹글게 받고 싶습니다. 카드와 포장지가 마음은 아니지만 그 흔적일 순 있지 않을까요?

값이 나가지도 않고 카드 한 장 들어 있지 않아도 그저 반가운 선물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요맘때가 그런 선물이 몰리는 성수기입니다. 며칠 전, 입춘 기념으로 화분들을 꺼내 정리하다 지난 해 초겨울에 처박아놓았던 화제 분 하나를 찾았습니다. 화제는 다육식물의 하나로 돌나물과 사촌지간입니다. 햇볕을 너무 좋아해서 빛 아래 오래 둘수록 빨갛게 물듭니다. 불 화(火)에 때 제(際) 자를 쓰는 터라 화제란 이름은 불꽃잔치쯤으로 해석해도 좋을 성싶습니다. 하지만 무심한 주인이 제때 갈무리를 해주지 않은 탓에 진즉에 죽어서 말라비틀어졌습니다. 흙을 털어냅니다. 날이 더 풀리면 선인장이라도 다시 심어야겠습니다. 그런데 겉흙을 들어내자마자 통통한 뿌리 하나가 톡 떨어집니다. 어라? 얘가 아직 살아 있는 모양입니다. 얼마나 반갑던지 소리를 지를 뻔했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생명이 돌아오는 것만큼 행복한 선물이 또 있을까요? 내친 김에 창고를 홀딱 뒤집습니다. 가을걷이할 때 놓쳐서 구석으로 굴러들어간 토란도 아직 탱탱합니다. 잘 챙긴답시고 비닐봉지에 싸서 서랍에 넣어둔 히아신스 구근들도 건재합니다.

화제 밑동이랑 구근들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굴려봅니다. 생각이 기계적이다시피 별천지모임으로 돌아갑니다. 한해 꼬박 모임에 참석하지만 아직 예수님을 받아들이길 완강히 거부하는 친구가 떠오릅니다. 말라붙은 화제처럼 살아날 기색을 보이지 않아 조금씩 지쳐가던 터였습니다. 하지만 정말 깊은 속까지 죽은 걸까요? 속을 뒤집어봐야 아는데, 내게 그럴 능력이 없으니 조금 더 끈덕지게 기다려봐야겠습니다. 날 풀리고 물 머금으면 초록 잎을 피워 올릴지 누가 알겠습니까? 햇볕을 잘 받아 빨간 불꽃잔치까지 벌여주면 얼마나 기쁠까요?
아마, 그만한 선물이 없을 겁니다. 

나벽수는 전문 번역가이자 작가, 기자다. 「천로역정」, 「래디컬」, 「닉 부이치치의 허그」 , 「팀 켈러, 결혼을 말하다」 등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번역했으며, 「벽수 씨의 교회 원정기」, 「까칠한 벽수 씨, 목사에게 묻다」(공저)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