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ust 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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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이종혜 선생님이세요?”
웬 낯선 총각의 목소리였다.
“네, 맞는데…, 누구세요?”
“저 진호예요.”

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 5학년 첫 담임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한 아이가 전학을 왔다. 5학년답지 않게 작고 마른 체격이지만 제법 단단해 보이는 녀석이었다. 입을 꼭 다문 표정이 야무지기까지 했다. 아이 아버지가 지방에서 전학을 오게 된 경위를 말해 주었다. 교도소에 있는 동안 진호 엄마는 도망을 가 버렸고, 출소한 뒤 두 아들을 데리고 자기의 이력을 모르는 동네로 이사를 왔다는 것이었다. 진호는 공부를 열심히 하진 않았지만 글씨만큼은 반듯하게 썼고,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할 때면 그 작은 몸에서 스피드가 뿜어져 나왔다. 체육대회 날에는 반 대표로 달리기를 해서 아이들에겐 영웅이 되었다.

어느 날 아침에 출근을 했더니 교실 뒷벽에 걸린 벽시계가 떨어져 있었다. 와장창 깨진 시계를 바라보며 누가 그랬느냐고 했더니 진호가 그랬단다. 공을 뻥 차서는 시계를 맞혔단다. 교실에서 공을 찬 것도 화가 날 일인데 일부러 시계를 맞혔다는 사실에 더 화가 났다.
“진호야, 네가 그랬니?”
“네.”
한마디 변명도 없이 자기가 그랬단다. 아이들 앞에서 야단도 치고, 일장 훈계도 하고, 반성문도 쓰게 했다. 그렇게 혼이 나도 녀석은 삐치거나 풀이 죽지도 않는다. 금방 헤헤거리며 노는 것이 나만 열 받은 꼴이 된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출근하니 이번엔 청소함 문짝 한쪽이 떨어져 있었다. 이번엔 누가 그랬나 싶어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또 녀석이다.
그 문짝을 올라타고 놀다가 떨어졌단다. 녀석이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를 치는데 야단치고 훈계하고 나중엔 손바닥을 때려주어도 나만 화가 나지, 녀석은 그러고 나서는 그만이다. 처음 담임을 하면서 녀석 때문에 힘든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상한 건 사고를 치고 나서 누가 그랬느냐고 물어보면 녀석은 한 번도 자기가 안 그랬다고 발뺌을 하지 않았다.

하루는 학급일지가 없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는 지금처럼 컴퓨터에 모든 걸 기록하는 때가 아니어서 공책 한 권에 학습 내용이며 평가며 학급의 모든 것을 기록했다. 그만큼 중요한 일지였는데 그게 없어진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사방을 뒤져봐도 없는데 한참 후에 누군가 찾았다며 신나게 달려온다. 진호였다. 아이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나는 진호를 칭찬해 주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이상했다. 그 일지를 찾아온 위치가 물건을 둔 사람이 아니면 알 턱이 없는 곳이었다.
“진호야, 혹시 네가 거기 두었니?”
“네.”
기가 막혔다. 거기에 숨긴 것이나 찾아온 행동, 그게 자기라고 대답하는 것 모두가 황당했다. 왜 그랬냐는 질문에, 선생님한테 칭찬을 받으려고 그랬단다. 그날은 야단을 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한 아이가 자기 집에 있던 돼지 저금통이 없어졌단다. 우리 반 친구들하고 놀았다는데, 진호를 의심하진 않았다. 그 즈음 진호는 행동이 많이 좋아졌고, 사고치는 일도 뜸했기 때문이다. 그런 진호를 의심하는 것조차 미안했지만 그날 진호도 함께 놀았다는 말에 혹시나 했는데 이번에도 녀석이었다. 그날은 화를 내지 않았다. 나도 지쳤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다 집으로 돌아가고 진호랑 나랑 둘만 남았다. 그냥 집에 가라고 했다. 선생님도 지쳐서 이젠 더 야단치고 싶지가 않다고 했다. 그런데 녀석이 집에 가기는커녕 꼼짝을 하지 않았다. 책가방을 뒷문으로 내놓고 어서 가라고 했다. 그랬더니 녀석이 가방을 주워 들고는 앞문으로 들어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반응에 화가 났다. 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그렇게 야단을 맞을 땐 꿈쩍도 안 하던 녀석이 펑펑 울면서 잘못했다고 때려 달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때려주기 전엔 절대로 집에 안 가겠다는 녀석의 손바닥을 결국 때리며 같이 울었다.

“진호야, 선생님한테 한 번 와. 선생님이 고기 사줄게.”
곧 수능을 본다는 진호에게 고기를 사주고 싶었다. 그런데 죄송해서 오지 못하겠단다. 5학년 때, 녀석 생일이라 케이크를 사주었는데 한참을 망설이며 ‘그거 집에 들고 가면 아빠한테 혼난다’고 결국 빈손으로 갔던 진호의 뒷모습이 맘에 걸렸던 기억이 있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고 초보 교사였던 나는 진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잘못된 행동을 바르게 고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엄마에게 혼나는 걸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하는데, 진호에겐 잘못했을 때 야단치고 때려주는 엄마의 손길마저도 가슴 아리게 그리웠던 것이다. 그걸 난 너무 늦게야 깨달았다. 엄마가 되고 자식을 키우다 보니 진호의 기억이 자꾸만 떠오른다.

결국 진호는 그날 찾아오지 않았다. 무심한 녀석이 목소리만 한 번 들려주고는 연락처도 주지 않았다. 한 번 더 진호에게서 전화가 온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진호야, 미안해. 선생님이 그땐 진호의 마음을 너무 몰랐어. 우리 만나서 밥 한 끼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