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ust 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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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요즘 말로 ‘얼리 어답터’였다. 우리 동네의 신문물 전파는 언제나 아버지가 도맡았다. 아버지의 허영 또는 허세를, 나를 포함한 철없는 자식들은 반색했고 엄마는 질색했다. 교환수에게 번호를 말하면 연결해 주는 전화를 처음 놓은 집도, 양문을 열어 배불뚝이 모니터가 튀어나오는 다리 넷 달린 텔레비전을 처음 들여놓은 것도 우리 집이었다. 그 텔레비전 덕분에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에 다 모여 청와대를 나서는 육영수 여사의 검은색 영구차를 볼 수 있었다.
텔레비전은 나에게 좋은 아버지의 이미지를 가르쳐주었다. 즐겨 보던 미국 드라마 〈월튼네 사람들〉과 〈초원의 집〉에 나오는 아버지는 자애롭고 다감했다. 드라마 속 아버지 월튼 씨나 로라의 아빠는 자식의 속내를 가장 먼저 알아보고 제일 따듯하게 보듬어주는 존재였다.
유머 있고 친절하고 인간미 넘치는 최고의 인물이 텔레비전 안에 있었다. 그땐 우리 아버지 빼고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월튼 씨나 로라의 아버지 같은 줄 알았다. 드라마에서 아버지를 그렇게 그려낸 데는 1970년대 미국에 가정 폭력과 아동 학대를 일삼는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꽤나 많았기 때문이라는 걸 안 것은 한참 후였다. 그들에게도 이상적인 아버지가 필요했던 거다.
나는 드라마에서처럼 따듯하고 자상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아버지가 가장 아버지다운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보면 아버지는 0점에 가까웠다. 성실함과 책임감, 예의와 양심에서 90점이었건만, 나는 말 한마디의 온도에 0점을 주며 좋은 아버지 기준에서 아버지를 탈락시켰다. 나는 소심하고 예민한 여자애였다.
반에서 1등을 몇 번 하자 아버지는 둘째딸을 수재로 인정하고 초등학교 4학년인 나를 새벽 4시에 깨웠다. 당시만 해도 신문은 제목과 본문에 한자투성이였는데, 아버지는 한자로 쓰여 있는 기사 제목을 한 번 읽어준 다음 내가 그대로 읽어내기를 기대했다. 호통과 졸음이 번갈아 쏟아지던 그 새벽, 아버지가 정말 미웠다. 행복과 성공은 철석같이 성적순이라 믿는 아버지의 신념 때문에 성적표가 나오던 날은 무릎 꿇고 2시간 이상 일장연설을 들어야 했다.
〈초원의 집〉을 같이 본 아버지는 왜 느끼는 바가 없을까? 인생 최대의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늦게 결혼해 아이 넷을 둔 아버지는 그때
40대 초반이었다. 불혹을 넘긴 가난한 가장은 자식을 통해 대리만족이나 보상을 얻고 싶었던 것 같다. 마흔을 지나면서 아버지의 40대를 조금 이해했다.
아버지가 쉰둘이었던 때, 나는 대학생이었다. 어려운 집안 형편은 나 몰라라 한 채 대학을 서울로 가겠다는 둘째딸의 고집을 아버지는 꺾지 못했다. 아주 가끔 집에 내려오는 나에게 아버지는 묻곤 했다.
“요즘 서울 사람들은 전두환더러 뭐라 그러냐?” 나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담아 아버지의 질문을 무질렀다. “나쁜 놈이라 그러지 뭐라 그래.”
대학 다니는 아들딸이 도통 이야기할 틈을 안 준다는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며, 이제야 쉰둘이었던 그때의 아버지를 이해하고 있다.
보도 지침으로 언론이 막혀 있던 시절,
아버지의 그 질문은 세상의 속사정이 정말 궁금해서 던진 말이라는 것을. 아니 무엇보다 서울서 대학 다니는 딸년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아비의 마음을 겨우 그렇게 표현한 것이었다는 것을.
생애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경의를 보냈던 날은 첫 직장이었던 손바닥만 한 잡지사를 그만두겠다고 작심한 그날이었다. 아버지도 이런 날들로 30년을 채우셨구나. 2년 반 만에 사표를 던진 나는 사회인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했다. 그날 이후 아버지의 나이를 셈하며 아버지를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잡지사 수습기자 시절,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간 나는 밥상머리에서 엄마한테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다. “내가 명색이 잡지사 기잔데, 요새 뭔 드라마가 뜨는지, 뭔 유행어가 돌아다니는지 몰라. 집에 텔레비전이 없잖아. 대중문화를 모르는 내가 무슨 잡지사 기자야.” 며칠 후 서울 내 자취방으로 텔레비전이 하나 배달되었다. 둘째딸의 애로 사항을 옆에서 묵묵히 듣던 아버지가 보내주신 것이었다.
쉰둘의 나는 지금, 아버지를 조금 이해한다.
내가 착한 아내이자 나쁜 아내이기도 하고,
좋은 딸이자 못된 딸이기도 한 것처럼, 아버지 또한 좋은 아버지이자 나쁜 아버지였다고.
시대와 부대끼며 가족을 부양하느라 자신에 대해서는 생각할 틈조차 허락받지 못한 애틋한 생활인으로 살다 가시게 해서 미안하다고.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찌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다행히 시간이 갈수록 감사의 마음에 밀리고 있다. 아버지는 그랬다. 여름이면
열 살도 안 된 올망졸망한 네 아이를 데리고 시원한 개천에 자주 나갔고, 유년 주일학교의 동화 같은 시간을 남겨주었고, 딸이라고 차별하지 않고 키워주었고,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한 나에게 일주일에 한 번 꼭 편지를 써서 보내주었고, 당신 성에 차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한마디 반대 없이 인정해 주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알게 해준 분이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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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경은 ‘봄이다 프로젝트’ 편집주간으로 일하고 있다. 2년 후면 책 만드는 직업을 가진 지 서른 해가 된다. 취미는 다음 행선지의 항공권 검색, 요즘 꽂혀 있는 문장은 Enter with the pass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