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꽃  illust 장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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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갑 씨가 모임에 발을 끊었습니다. 열댓이 모여 말씀 보고, 기도하고, 세상에서 어떻게 그 가르침대로 살아갈지 나누는 그 별천지모임에서 말입니다. 그렇게 등을 돌리는 데는 보통 몇 가지 이유가 있게 마련입니다. 알맹이가 없든지, 알맹이가 있기는 한데 영양도 맛도 없든지, 함께하는 이들 가운데 누군가가 꼴 보기 싫든지 뭐 그런 거 아닐까요? 원갑 씨는 마지막 경우에 해당하는데 그 상대가 하필 나벽수, 바로 저입니다. 밉고 싫다는 눈치를 꾸준히 주더니 결국 떠나고 말았습니다.

발단은 “모임 시간을 지켜달라”는 훈수 한마디였습니다. 원갑 씨는 늦는 게 아니라 너무 서두르는 게 문제였습니다. 늘 모임이 시작되기 30~40분 정도 일찍 도착했습니다. 모임 자리와 저녁밥을 내주는 미숙 씨는 입장이 좀 곤란한 눈치입니다. 본래 낯가림이 심해서 언니 말고는 단 둘이 있는 분위기를 못 견뎌하는 편입니다. 게다가 요리에 서툰 싱글의 솜씨로 열 명 넘는 이들이 먹을 음식 준비를 하자니 좀 바쁘겠습니까? 거들어줄 식구가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걸리적거릴 판입니다. 리더로서는 여성 멤버들과만 연락하고 싶어 하는 그 친구의 성향도 신경이 쓰였습니다.
말 많은 세상, 조심이 필요했습니다. 누군가 원갑 씨보다 더 일찍 와주면 해결될 일이지만 대부분 멀리 사는 터라 30분 당기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1년 가까이 지켜보다 원갑 씨를 따로 만나 부탁했는데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습니다. “날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거냐?”는 게 거부 반응의 골자였습니다. 그냥 편안히 교제하러 갔을 뿐인데 벽수가 이상한 눈으로 본다며 불쾌해 했습니다.
듣는 쪽에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아직 그런 얘길 할 만큼 신뢰가 쌓이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똑같이 불쾌한 얘기도 믿을 만한 이의 입을 통하면 받아들이기가 한결 쉬운 법이니까요. 시간을 두고 다독이기로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것 말고도 전화로, 문자로 SNS로 끊임없이 연락을 합니다. 식구들도 나서서 속을 풀어주려 애씁니다. 정기적으로 만나 교제하자고 몇 번 제안하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습니다. 상대가 마음에 안 드나 싶어서 모임에 나오는 목사님이 제안을 해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틀어진 마음은 갈수록 엇나갑니다. 별천지 식구들이 입원하면 전화를 걸어 “문병을 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리더가 따로 만나는 걸 싫어해서요”라고 합니다. 몇 차례 같은 일이 되풀이됩니다. 꼭 벽수한테 전해야 할 말이 있으면 다른 이에게 대신 알려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만하면 이편을 보는 시선이 거의 국가원수(의미에 맞춘 발음은 ‘웬수’) 급입니다.
조금 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모임을 떠나는 건 상관없지만 상한 상태로 보내는 건 아쉽습니다. 식구들과 함께 기도합니다. 연락을 해서 만납니다. 목사님 내외분에게 동행을 부탁드립니다. 누군가 역성들어줄 이가 있으면 말하기가 한결 편하지 않을까요? 마음은 정리됐는지, 여전히 불편하게 하는 구석은 무엇인지 묻습니다. 오해하고 있는 점들을 설명하고 목사님도 곁에서 거듭니다. 고개를 끄덕끄덕하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이번엔 벽수가 빠지고 그쪽에서 비교적 쉽게 마음을 여는 이들끼리 만나게 합니다. 결과는 매한가지입니다.

지금 원갑 씨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건 벽수가 내놓은 두 가지 복귀 조건입니다. “기도하고 염려해줘서 고맙다”는 인사가 첫째고 “앞으로 잘 해보자”는 다짐이 두 번째입니다. 받아들이기가 정말 어려운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편에서 ‘조건부’를 고집하는 데도 이유가 있습니다. 원갑 씨가 비슷한 패턴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임에 들어가고, 스스로 만들어낸 이유로 부딪히고, 상대를 끊임없이 비난하다, 그편에서 비위를 맞춰주면 돌아가고 아니면 다시 떠나는 일이 벌써 네 번째입니다. 소문을 들어 알고 있음에도 동행하기로 했던 건 크리스천들의 모임이 폐쇄적이어선 안 된다는 식구들의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으니 흐름을 깨는 장치가 필요했습니다. 이번에도 원갑 씨는 SNS에 연신 이별을 암시하는 글을 올립니다. “아, 이제 떠날 시간이다”라든지 “난 역시 공동체와 맞지 않는 사람인가?”라는 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NS 모임방에 꼬박꼬박 들어와 게시 글을 읽고 식구들을 만나면 “정말 내가 남아 있길 바라느냐?”고 묻는 걸 보면 떠나겠다는 의지보다 잡아달라는 요청이 더 도드라집니다.

분꽃 씨앗이 이제 싹을 틔워 잎이 여섯 개가 됐습니다. 꽃씨 봉투에 적힌 설명에 따르면 이제야 안심하고 꽃밭에 옮겨 심을 때가 됐다는 뜻입니다. 벼르고 별러서 씨를 뿌렸는데, 좀처럼 싹이 트지 않아 걱정이 많았습니다. 날마다 들여다보고 심심하면 물을 줍니다. 물을 너무 많이 줘서 그런가 하고 물주는 간격을 늘여봅니다. 빛을 따라 씨앗을 뿌린 화분을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닙니다. 그런데 무려 두 달 만에 싹을 틔웠습니다. 지화자! 모종을 조심스럽게 들어내 화단에, 화분에 옮겨 심습니다.
머리로는 여전히 원갑 씨와 씨름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궁둥이라도 한 번 걷어차고 싶습니다. 냅다 쏘아붙여주고 싶은 말이 오천 명한테 잔뜩 먹이고(뜻을 살린 발음으로는 ‘멕이고’) 열두 광주리가 남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제 꼴을 헤아리고 분꽃을 대하는 이편의 마음을 생각해 욕구를 눌러두기로 합니다. 주님이 날 지켜보며 겪었을 허탈감을 감안하면 어디 가서 억울함을 하소연할 처지가 못 됩니다. 분꽃과 사람의 가치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는 짓이고요. 꽃 한 송이 보자고 이만큼 기다렸다면 사람이 꽃 피는 걸 보려면 좀 더 기다리는 게 정답일 겁니다. 답을 알면서도 조급증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분꽃은 6월부터 피어 10월까지 간다는데, 사람 꽃은 언제나 피려는지, 모종을 옮겨 심는 손에 괜히 힘이 팍팍 들어갑니다. 뿌리를 눌러 죽이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원갑 씨 얘기냐고요? 아닙니다. 제 얘기죠. 제 꽃도 아직 피워 올리지 못했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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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벽수는 전문 번역가이자 작가, 기자다.
「천로역정」, 「래디컬」, 「닉 부이치치의 허그」 , 「팀 켈러, 결혼을 말하다」 등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번역했으며,
「벽수 씨의 교회 원정기」, 「까칠한 벽수 씨, 목사에게 묻다」(공저)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