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로병사’라는 극명한 팩트를 나는 가늠하기 어렵다.
이 사실 앞에 서 있는 것조차 꺼려지기 때문일 터.
생의 길목이 끝나갈 즘에서야 저 운명적 진리의 한 단어를 떠올리며 모든 것을 수긍하듯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 뒤 마지막 긴 호흡을 내뱉을지도.
그러니까 ‘생로병사’는 단어의 정의를 그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일생 동안 축적된 모든 경험치를 바탕으로 마지막 순간에 깨닫게 되는, 어찌 보면 경지(?)에 이르렀을 때 ‘생! 로! 병! 사’ 글자 하나하나의 조합이 완성되어 몸에 인처럼 뚜렷하게 새겨지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아직 수십 년의 호흡을 더 이어가야 할 나로서는 도무지 저 말의 의미에 가닿을 수 없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이생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의 마지막을 살피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나는 ‘생로병사’의 이미지를 어렴풋이 그릴 수 있게 된 거 같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한층 더 선명해졌다.

5년 전, 아버지는 폐암 말기를 선고 받으셨다. 6개월 전 건강 검진을 받았을 당시 존재하지 않던 암 세포가 급작스럽게 등장, 빠르게 퍼져나간 것이다. 반갑지 않은 소식에 당황하셨을 법한데 아버지는 의외로 의연하셨다. 그러나 투병 생활이 시작되자 삶에 대한 욕구를 드러내셨다. 이제 갓 만난 하나님을 찾으셨고, 즐겨 부르던 뽕짝 대신 찬송을 부르셨고, 문병 온 목사님의 기도에 ‘아멘!’ 하며 두 손을 그러모아 쥐셨다. 평생 예수를 모르던 아버지가 생의 장막이 내려앉으려고 하자 마치 즙을 짜듯 애절한 믿음을 손에 그러모으고 주님께 받치려는 모습을 보며 나는 면도날에 베인 것처럼 마음이 몹시 쓰렸다.
아버지는 병이 나으면 좋아하던 등산을 더욱 자주 하실 거라며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셨다. 그러나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암 세포는 온몸에 잠식해 수술적 치료는 고려되지 않았다. 항암제 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반복적으로 받았으나 아버지의 몸은 점점 죽음으로 삭아졌다.

아버지의 암 세포는 악랄하여 모욕적인 방식으로 아버지를 몰아갔다. 허리뼈에 눅진하게 스며들어 아버지를 침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았다. 허리를 펴지 못한 아버지는 살짝만 움직여도 극심한 고통으로 새된 소리를 지르며 식은땀을 흠뻑 흘리셨다. 아버지의 머리숱을 뭉텅이로 뽑아 헐벗은 민둥산으로 만들었고, 생리적 현상을 스스로 감당치 못하게 했다. 낮게 깔린 먹구름처럼 낯빛에 어둔 절망을 드리웠다. 생의 마지막에 발을 디딘 아버지의 모습은 한겨울 잎 떨어진 앙상한 나무, 그것이었다.
대부분 사람들의 죽음은 아버지의 죽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징글맞게 생과 사의 줄다리기를 하다가 모든 기력을 소진하고, 가열하게 모멸의 폭격을 맞은 뒤, ‘하~’ 마지막 호흡을 내뱉는 것…. 아버지는 생의 마지막 2주를 호스피스 병동에서 보냈다. 그곳은 속절없이 죽음의 기운을 공기 중으로 흘려보냈는데, 나는 아버지를 뵈러 갈 때마다 주변 침상이 비었다가 채워지는 속도 앞에 심장이 뻐근해지는 통증을 느꼈다. 국수집 회전율처럼 빠르게 죽음을 소비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어진 침상을 보며 불과 며칠 전까지 누워 있던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 떠올랐다. 비록 모르핀에 취한 몽롱한 눈빛들이었지만 홀로 죽음 앞에 직면한 자들의 쓸쓸함, 적막한 고독, 이생의 미련을 나는 그들의 표정을 통해 실감나게 읽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들이 서 있는 자리가 다른 자리보다 더 가치 있는 어떤 것이 되기를 바라지만, 죽음의 자리는 언제나 동등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사는 동안 영광스러웠든, 비루했든 말이다.
거칠게 호흡하며 누워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아버지는 지금 문 앞에 서 계시겠구나. 안식할 수 있는 낙원의 문을 열 준비를 하고 계시겠구나. 언젠가 나도 아버지의 침상에 눕게 되겠지. 본향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한 번은 누워야 하니….’ 그러자 신기하게도 피부에 닿아 있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휘발되었다. 이별의 슬픔이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생의 트랙의 종착점에 다다른 아버지가 부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진리의 빛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컴컴한 어둠 속에서 믿음만을 붙들어야 한다고 했던가. 부활의 소망을 품은 크리스천들에게 ‘죽음’의 의미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해석된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생의 시작이기에….

사실, 나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것이 나는 몹시 한스럽다. 아버지 곁을 지키다가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가 이제 막 고속도로에 진입할 때 핸드폰 벨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어디니? 차 돌려라! 아버지가 이상해.” 어머니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절박했다. 나는 급하게 차를 돌리고 속도를 높였지만, 도착했을 때 이미 아버지의 심장은 멈춰 있는 상태였다.
한 사람의 인생이 끝났음에도, 그 역사가 막을 내렸음에도, 지구별에서 7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낸 누군가의 숨이 끊어졌음에도, 세상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장중하고 위엄 있는 음악이 흐르지 않았고, 나뭇가지가 부르르 떨리지도 않았으며, 새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밤 시간인지라 도시가 이전보다 고요해지고 인적이 드물어졌을 뿐, 도로 위로 차는 여전히 매연을 풍기며 쌩쌩 달렸고, 사람들은 바쁜 걸음으로 조명 낮은 어둔 곳으로 사라졌다. 결코 지금 시간이 1시간 전과 같을 수 없음에도 세상은 똑같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심히 흘러갔다.
한 인간의 생로병사 인생은 이 행성에 티끌만 한 흠집, 충격도 주지 못하고 안개처럼 스러지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한 인간의 죽음 앞에 아무 일 없다는 듯 반응하는 이 모든 것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여전히 한 존재의 지속성을 직감케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연은, 시간은 아는 것이리라. 존재의 영원한 연속성을…. 나는 죽음에 대한 모든 것들의 밋밋한 반응 앞에서 죽음을, 그리고 생로병사 인간의 일생을 무심하게 대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5월은 아버지의 기일이 있는 달이다. 이 달에 나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죽음을 묵상한다. 애도는 남아 있는 자의 의무이기에 아버지가 그립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게도 개인의 종말이 다가올수록 그리움은 재회의 기대감으로 바뀌는 거 같다. 어쨌든 아버지와 나는 천국에서 다시 만날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