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고,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다고 한 시인은 노래했다. 흔들리지 않고 성숙하는 인생이 있을까? 방황하지 않고 깊어지는 신앙이 있을까? K보리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바람이 불었다. 지독한 바람 앞에 그녀는 갈대처럼 고독하게 흔들렸다. ‘스티븐 존슨 증후군’이라는 희귀병은 그녀의 평범했던 모든 일상을 앗아갔다. 고난의 이유를 묻는 그녀에게 하나님은 ‘봄’을 선물하셨다.
취재 이승연 사진 한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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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소설에서 이 단어가 등장할 때 독자의 혈관은 수축되기 마련이다. ‘어느 날’은 이야기를 한 단계 도약시키고, 때론 반전을 선사하기도 하며, 독자의 예측을 비틀 때도 있다. 그러하기에 ‘느닷없음’에 발동을 거는 ‘어느 날’이란 단어에 나는 마음이 끌린다. 사실, 소설이기에 급작스런 변화를 반기는 것이지 일상에서의 ‘어느 날’은 썩 달갑지 않다. 그저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 지루하더라도 안정감을 주는 평범한 하루하루가 이어지기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망하지 않을까? 나이가 들면 들수록 말이다. 안정의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으니. 적어도 나는 그렇다.
최근 K보리는 「일곱 번째 봄」이란 책을 썼다. 7년간 겪은 치열한 투병기란다. 책 표지에 기록된 문구가 시선을 끌었다. “평범하기만 하던 ‘어느 날’ 그날 퇴근 이후 나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어느 날!’이라…. 저 한 문장에서 한 인생의 지각판이 틀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책을 집어 들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그녀에게 ‘어느 날’은 인생의 전과 후를 가르는 분기점이었다. 일상의 사소한 것들의 질감이 변화된 것. 책을 덮은 후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물에 고인 물처럼 K보리 마음 안에 고여 있는 이야기들을 그녀의 음성으로 직접 듣고 싶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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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달새 같은 톤의 통통 튀는 밝은 목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왔다. 고난의 파고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사람의 목소리치고는 밝다. 너무 밝아 낯설기까지 하다. 젖은 면직물처럼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릴 거라고 짐작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여름 화초 마냥 싱싱한 목소리를 들을 거라고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
두란노 본사에서 K보리를 만났을 때 그녀는 언니와 함께였다. 언니에게 몸을 의지한 채 조심스레 걷는 그녀는 앞이 전연 보이지 않는 듯했다. 책에서도 그녀는 수차례 눈 수술을 받았지만 경과는 나아지지 않았다고 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나요?”
그녀는 음성이 들리는 쪽으로 얼굴을 돌렸지만 시선은 나를 비껴 허공으로 흩어졌다.
“네. 보이지 않아요. 투병하면서 시력이 점점 나빠졌는데, 지금은….”
일렁거림 없는 물결 같은 그녀의 얼굴에 과하지 않은 미소가 떠올랐다. 커피 잔을 앞에 두고 그녀와 마주 앉았다. 그녀의 언니가 그녀의 손을 꼭 그러쥐었다. 책에서 그녀는 언니를 가리켜 ‘천사’라고 불렀다.
“목소리가 밝으세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힘든 시간을 보낸 사람 같지가 않아요.”
“긍정적인 성격이거든요. 제가 슬퍼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만개한 벚꽃처럼 환하게 웃는 그녀를 보니 나도 절로 배시시 웃음이 흘렀다.
“책에서는 ‘어느 날’이라고 썼더군요. 그날 보리 씨의 일상은 무너졌지요. 당시 느꼈던 감정이 궁금해요.”
“그날은…, 그저 무덤덤하게 맞이한 지극히 평범한 월요일이었어요. 그리고 그날은…, 평범했던 일상의 마지막 날이었죠. 그때 제 나이 서른한 살. 저는 의상 디자이너였어요. 출근 후 오후부터 몸살이 난 것처럼 한기가 느껴지더군요. 납을 맨 것처럼 몸이 무거웠어요. 손과 발, 입안에 붉은 반점들이 났어요. 동네 병원 응급실에 입원한 후 기나긴 투병 생활이 시작되었죠. 병이 발병하고 증상들이 너무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사실, 어떤 감정을 느낄 겨를도 없었어요. 살아야 하는 건지, 죽어야 하는 건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죠.”
“스티븐 존슨 증후군이었죠? 병명이.”
“저는 좀 더 심하게 병이 온 케이스예요. ‘독성표피괴사용해증’이라고 하는데, 전신의 피부가 벗겨지고 장기도 손상되고, 손발톱 다 빠지고, 머리카락도 녹아내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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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존슨 증후군의 원인은 대부분 약물에 의해 발생한다. K보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라식 수술을 받고 난 후 복용한 항생제 부작용으로 그녀는 이름도 생소한 희귀 질병을 얻게 된 것이다. 나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모호함이 불편했다. 분명한 원인이 있는 고난이 있겠느냐마는 그럼에도 나는 다소 과장 섞인 목소리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약 한 알을 삼킨 것뿐이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먹는 항생제 한 알. 가볍게 입안에 털어 넣은 그 알약 하나로 인한 결과가 너무 끔찍한 고통이었단 말이죠.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나요?”
‘왜?’라는 질문은 마음의 불편함을 덜기 위한 몸부림일 것이다. 자신에게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온 고통의 원인을 알고자 사람들은 깊고 처절한 몸부림을 친다. 책에서 그녀는 “나는 서른한 살 가장 꽃다운 나이에 일생일대의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고 하면서도 “나는 한 번도 ‘하나님, 왜 하필 저예요?’라고 묻지 않았다”라고 고백했다. 나는 그 문장에 밑줄을 그으며 ‘어떻게 반문하지 않을 수 있지?’라고 의아해했더랬다.
“그냥 저는, 조용히 받아들였어요. 지금 벌어진 상황을 말이죠. 첫날 드레싱을 하는데 너무 고통스럽더군요. 그 고통,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지옥이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네요. 용광로 속에서 몸이 타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하는. 사람이 지를 수 없는 괴성이 제 입에서 계속 터져 나왔으니까. 끔찍했죠. 그날 새벽, 초강력 모르핀을 맞고 간신히 잠이 들었는데, 꿈을 꿨어요. 침대에 누워 있는 저를 둘러싸고 천사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더군요. 날라리 신도였던 저를 잊지 않고 하나님이 부르셨어요. ‘보리야. 내가 있잖아!’ 그분의 계획 가운데 제가 있음을 느꼈어요.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들었죠. 이후 그렇게나 끔찍한 치료를 백 번 넘게 받았지만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달력에 이 모든 일들이 계획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수긍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시 한 번 찌르듯이 물었다.
“정말, 하나님을 원망한 적이 없으신가요?”
“네. 단 한 번도. 저도 신기해요. 아마 하나님은 아시지 않았을까요? 제가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그녀의 단호함이 내 질문에 빗장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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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을 위해 스튜디오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그녀에게 기타를 쥐어주었다. 책에서 그녀는 투병 중에도 기타를 배웠다고 했다. 몸이 불편해도 영어 회화를 수강했다고. 그러니까 불완전한 삶일지라도 ‘오늘’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기타를 연주하는 K보리의 모습에서 나는 정돈된 그녀의 정서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분명 그녀에게 투병 전 ‘오늘’과 투병 후 ‘오늘’은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K보리의 책에서 나는 이 한 구절을 읽고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언니의 부축을 받아 화장실 가기까지 성공했다. 사람으로 태어나 생리적인 현상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음이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한 것인지를 나는 처음 깨달았다. 단언컨대 오늘 이 자리에 오기까지 결코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 없음을 나는 뼈저리게 느꼈다.”
“보리 씨에게 ‘오늘’은 어떤 의미인가요?”
그녀가 기타 연주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잠시 동안 밀도 있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뻑뻑해진 공기를 뚫고 날카롭게 셔터 소리가 울렸다.
“오늘이요? 음, 사실, 몸이 아프다 보니까, 또 볼 수 없으니까,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에 절망을 느끼곤 했어요. 당시의 ‘오늘’은 평범한 일상을 꿈꾸게 하는 ‘오늘’이었어요. 남들이 그저 평범하게 소비하는 시간들이 저에게는 꿈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생각들이 물이 밀려나가듯 저 멀리 사라지더군요. 지금 저에게 ‘오늘’은 그저 최선을 다하는 삶이에요. 제 생의 전부인 것처럼 ‘오늘’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죠. 그러다보니 이렇게 책도 쓰게 되었네요. 기자님과 인터뷰도 하고 있고요. (웃음)”
여전히 그녀는 투병 중이다. 7년간의 투병 생활 동안 19번의 수술을 받았고, 수십 번의 시술을 견뎠다. 눈 수술을 받고 실밥을 풀기도 전에 다시 수술 계획을 잡아야 했다. 시력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도 않는 중에 귀도 들리지 않아 귀 수술을 받기도 했다. 몸이 무너지는 것을 견뎌내면서 그녀가 쏟아야 했던 눈물을, 마음에서 끓는 화염 같은 속내를, 고통 앞에 단독자로 서야 하는 적막함을, 제3자가 감히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무슨 수로 가장 합당한 위로의 한마디를 골라 건넬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이 하지 못하는 위로를 하나님은 하신다.
“이 병에 걸릴 확률이 만분의 일이라고 하더군요. 의사들조차 저에게 재수 없어서 걸린 병이라고 했어요. 상처를 받았죠. 그런데 욥기를 보면서 위안을 얻었어요. 나는 하나님의 VIP라는 확신이 들었거든요. 고난은 하나님께 버림받았기 때문에 찾아온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주어진 거니까요.”
이유 없이 찾아오는 고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나님은 왜 그녀에게 모진 고난을 허락하신 것일까?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문득 양명수 교수의 「욥이 말하다」의 한 대목을 떠올렸다.
“이런저런 모양으로 세상 풍파를 겪고 세상의 악에 수난당하는 어린이들의 고통, 그리고 신체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이들의 고통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들 역시 세상 짐을 대신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들이 아닐까? … 까닭 없이 당하는 그들의 고난 역시 세상이 치러야 할 죗값을 대신 치르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을 세상의 대속자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무고한 이들의 고통을 보는 세상의 시각이 그런 식으로 형성될 수 있지 않겠냐는 얘기다. 고난을 당하는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들로서는 고통이 그냥 우연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을 보는 세상은 세상 짐을 지고 가는 어린 양들을 그들에게서 떠올릴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나는 K보리가 하나님께 선택 받은 위대한 사역자로 보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그녀의 등 뒤로 바람이 불었다.
고난의 길목에서 꽃을 피우는 봄바람이었다.
마른 뼈를 살리시는 성령의 바람이었다. 욥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입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