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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신학 소개 | 두란노아카데미 소개


너무 기뻐 믿을 수 없는 사실- 누가복음 24장의 주해와 적용
본문의 주해

누가복음의 대단원인 24장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보도한다. 이 두 사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근심’과 ‘두려움’으로 시작하여(4~5절) ‘놀라움’과 ‘기쁨’으로 이어진 후(37, 41, 52절)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송’하는 것으로 끝난다(52~53절).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의 끝이 아니었다. 그 뒤를 이은 부활과 승천으로 또 다른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행 1:1~11; 2:32~36). 누가복음 24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분해할 수 있다:

1.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과 베드로(1~12절)
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난 예수(13~35절)
3. 예루살렘의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36~43절)
4. 예수의 마지막 교훈과 당부(44~49절)
5. 예수의 승천(50~53절)

처음 네 단락에서 누가는 예수의 부활을 이야기하되 각각 다른 방식으로 다른 강조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1~12절은 특별히 ‘빈 무덤’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13~35절은 부활한 예수의 첫 번째 출현을 서술하고 그의 부활이 구약성경에 자세히 예언된 사실임을 강조한다. 36~43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기의 몸을 만져보라고 청하고 그들 앞에서 음식을 먹음으로써 자신이 환영(幻影)이 아님을 증명한다. 44~49절에서는 구약에 약속된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그 구원을 온 세상에 전파하도록 명령하고 위임한다. 마지막 단락(50~53절)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부연 설명 없이 짧게 보도한다.

(1)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과 베드로 (1~12절)1
예수의 부활사건의 첫 증인과 메신저는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갈릴리로부터 예수를 함께 따라 온 여인들로서 그의 십자가 처형뿐 아니라 그의 시신이 장사된 무덤까지 따라가 보았던 목격자들이다(23:50~56). 그들은 시간에 쫓겨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던 예수의 몸에 향품과 향유를 바르기 위해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즉 그들이 다시 움직일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각에, 무덤을 다시 찾았다(1절). 그런데 무덤 입구를 막아놓았던 크고 무거운 돌이 굴려 옮겨져 있었고(2절), 그 안에 있어야 할 예수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3절).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그들에게 갑자기 눈부신 옷을 입은 두 남자(천사, 23절)가 나타나 예수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고 알린다(4~6절). [그가] 살아나셨다(일으킴을 받았다)는 동사의 부정과거 수동태(gerthe, has been raised)는 이 일이 하나님의 행위로 말미암았음을 암시한다.
천사들은 또한 이 일이 예수 자신의 약속대로 이루어진 것을 상기시킨다: 그가 갈릴리에 계실 때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기억하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6~7절, 비교. 9:22, 44; 13:32~33; 17:25; 18:32~33). 7절에서 사용된 동사 데이(dei, must)는 예수(인자)의 체포와 십자가 처형과 부활이 모두 하나님이 확정하신 계획에 따라 일어난 사건들이었음을 보여준다. 누가는 이 동사를 그의 복음서에서 18번이나 사용하면서 구약성경에 예언되고 예수의 삶으로 성취되어 나가는 하나님의 계획을 강조한다(참조. 26, 44절).2
그 여인들은 천사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돌아가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자신들이 보고 들은 바대로 예수의 부활소식을 전했다(8~9절). 하지만 사도들은 빈 무덤과 천사에 관한 그들의 증언이 터무니없게(lros, nonsense) 들려서(개역: 허탄한 듯 뵈어) 믿지 않았다(11절). 이 여인들의 숫자는 율법이 인정하는 증인의 수(신 19:15)를 훨씬 초과했음에도 불구하고(10절,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 참조. 막 15:40; 16:1), 그들의 증언은 그 내용의 비합리성뿐 아니라 당시 유대사회의 여성에 대한 편견 때문에도 더욱 가볍게 취급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의 말을 그냥 쉽게 넘겨버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바로 이틀 전 예수를 세 차례나 부인하는 과정에서 그의 초월적인 지식과 말씀의 힘을 절감했기 때문에(23:31~34, 54~62) 그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그들의 증언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곧 무덤으로 달려가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무덤 안에서 시신은 보지 못하고 수의만 발견한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스스로 이상하게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갔다(12절). 여기서 이상히 여기다(thaumazein, wonder)라는 단어는 빈 무덤이 베드로에게 일으킨 질문들과 그 질문들에서 시작된 믿음의 첫 걸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3

(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난 예수(13~35절)
이 부분의 기사는 누가의 독특한 자료로서 그의 아름다운 회화적 필체가 가장 돋보이는 대목이다. 여기 등장하는 두 사람의 제자는 예루살렘에서 충격적인 주말을 보낸 후 엠마오의4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들은 함께 걸어가면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14절). 사실상 그들의 대화는, 15절의 동사(syzetein)가 보여주듯이, 매우 열띤 토론과 논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5 19b~24절은 그들이 벌인 토론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빈 무덤’의 의미에 대해 논쟁을 벌였을 것이다(22~24절 참조). 이때 그들 앞에 예수가 나타났다. 그는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는 그들에게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었으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서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15~16절). 부활 이후 처음 나타난 예수의 모습은 보통 사람의 외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원래 그를 알았던 제자들도 즉시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달라져 있었다(비교. 막 16:12; 요 20:14~15).
예수가 그들의 대화 내용에 대해 질문하자 그들은 침통한 얼굴을 하고 멈춰 섰다(17절). 예루살렘에서 겪은 일로 말미암아 매우 낙심하고 슬퍼했기 때문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인 글로바는 도대체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거기서 최근에 일어난 일을 어떻게 알지 못하느냐고 반문했다(18절). 예수는 그것이 무슨 일이냐고 되물었고, 그들은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들을 바로 당사자에게(!) 소상히 말해 주었다(19b~24절). 즉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에 힘이 있는 선지자(prophts)(19절)6 예수를 법정에 넘겨주어 사형 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20절)는 것이다. 사실상 예수를 선지자 이상의 인물로 생각했던 두 제자는 그가 바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고 소망했으나 그 소망은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21절). 그들은 계속해서 예수의 무덤을 방문했던 여인들이 그의 시신은 보지 못하고 천사를 만났으며, 다른 동료 제자들(베드로 등)도 역시 그의 무덤이 비어 있음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전해 주었다(22~24절).
이에 대해 예수는 그들의 미련함(anotos, foolishness)과7 더디 믿는 마음(bradys ti kardiai tou pisteuein, slow?eartedness to believe)을 책망했다(25절). 그들은 무엇보다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르는’ 그리스도(메시아)의 길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가 먼저 십자가의 고난을 받은 후 그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반드시 일어나야 할(dei, must) 순서였고(26절), 그것은 또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이미 여러 차례 예고했던 내용이었다(9:20~22, 44~45; 18:31~34). 예수는 이제 그들에게 다시 한번 모세와 모든 선지자로부터 시작해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하여 쓴 것들을 설명해 주었다(27절). 그 결과 구약성경은 그들에게 비로소 열린(dinoigen)8 책이 되었고 그들의 마음이 속에서 뜨겁게 타올랐다(32절).
날이 저물어 목적지에 당도하자 제자들은 예수를 강권하여 그들의 처소에 모셨다(28~29절). 함께 식사할 때에 예수는 빵을 들어 축사한 후 떼어서 그들에게 주었고(30),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30~31a절). 그리고 그 순간 예수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31b절). 예기치 않은 주님의 출현과 가르침으로 그의 부활을 확인한 그들은 즉시 밤길을 되돌아 달려가서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알렸다(33~35절).

(3) 예루살렘의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
(36~43절)
이 단락의 장면은 앞 단락(13~35절)과 그대로 연속된다. 사도들을 포함한 제자들이 한 데 모여 그의 출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예수 자신이 몸소 그들 가운데 나타나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라고 인사한다(36절). 이 인사말은 승리로 끝난 그의 사역을 요약하는 축복과 위로의 선포였다. 그러나 제자의 무리는 그를 유령으로 생각하고 놀라며 무서워했다(37절). 그들은 아직도 그가 살아나서 그들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예수는 그들의 당황함과 마음속의 의심을 간파하고(38절) 그들에게 십자가 처형의 흔적이 남아있는 자신의 손과 발들을 보고 만져서 확인하라고 권한다(39절; 비교. 요 20:20, 25, 27). 예수의 부활체는 여전히 물리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고린도전서 15장 35~49절이 제시하듯이, 부활의 몸은 영화롭게 변화된 상태이긴 하지만 또한 물리적 신체성의 요소를 계속 보유하는 까닭에 현재의 몸과 유사한 동시에 다른 측면들도 있다.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정말 살아있음을 확실히 증명해 보이기 위해 그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내보이는 동안에도(40절) 그들은 그의 부활을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은 반신반의(半信半疑)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누가는 그들이 아직 믿지 못한 이유를 너무 기뻐서(apo ts charas, because of joy)라고 밝히는데(41a절), 만일 그들이 그를 끝까지 예수와 동일시하지 않았다면 결코 그런 기쁨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말 죽었던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인식하게 되자 잠시 동안 거의 마비된9 채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 같다. 예수는 자신의 육체적 부활을 더욱 확실히 알게 하기 위해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고 물었고(41b절) 그들에게서 받은 구운 생선 한 토막을 그들 앞에서 받아먹음으로써 자신이 한낱 유령이 아니라 분명히 몸을 지닌 실체임을 입증했다(42~43절).
예수가 자신의 손과 발에 남아있는 십자가형의 상처를 암시한 대목(39~40절)과 제자들 앞에서 생선을 먹는 장면(42~43절)은 신자들이 앞으로 갖게 될 부활의 몸의 성격과 조건을 유추하는 성서적 근거로 삼기 어렵다. 이를테면 이 본문을 근거로 신자의 몸이 부활한 다음에도 이전에 손상되었던 신체의 흔적을 간직할 것이고 계속해서 땅의 음식을 먹을(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추론이다. 고린도전서 15장 35~54절의 진술에 의하면, 우리가 입게 될 부활의 몸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은,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능력 있는, 하늘의 질서에 속한 몸이다. 그것은 ‘성령’에 의해 생명을 얻고 활력을 공급받는 영의 몸(sma pneumatikon)으로서 현세의 물리적, 신체적, 정신적 제약과 한계를 초월하고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뛰어넘어 자유롭게 활동하며 존재할 것이다.10 그러므로 본문의 기사들은 어디까지나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체적 부활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자기 계시 방식으로 이해돼야 할 것이다.

(4) 예수의 마지막 교훈과 당부(44~49절)
이제 예수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과 앞으로의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그는 어떻게 해서 지금 그들 앞에 다시 서게 되었는가? 십자가와 부활은 그에게, 그리고 또한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다시 살아난 지금부터 과연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예수는 십자가 사건 이전부터 그들에게 자기가 겪게 될 일들에 관하여 누누이 예고하였음을 상기시킨다:11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과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44절). 그는 일찍부터 제자들에게 구약성경 전체(모세 율법, 선지서들, 시편)가 자신에 관하여 예언하고 있으며 그 예언들은 꼭 성취될 것이라고 가르쳤다(4:18~21; 9:30~31; 11:29~32; 18:31~33; 20:17, 42~43; 22:37; 요 5:39).12
여기서 예수는 다시금 제자들에게 성경책을 열어 주었다(비교. 32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들로 하여금 성경을 깨닫게 하려고 예수가 먼저 한 일은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는(dinoixen) 것이었다(45절). 그는 자신(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록된 구약의 약속들을 세 개의 동사로 요약한다(46~47절): 고난 받다(pathein), 살아나다(anastnai), 전파되다(krychthnai). 즉 그는 그리스도(메시아)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dei, must) 고난을 받아야 했고(참조. 시 22; 69; 사 52:13~53:12), 살아나야 했으며(참조. 시 16:8~10; 110:1), 그러므로 이제 제자들은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를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해야 한다(참조. 사 40:3-5; 암 9:15).
제자들은 지금까지 예수를 둘러싸고 일어난 모든 사건들의 목격자요 증인이었다(48절). 예수는 곧 그들을 땅 끝까지 파송할 계획을 품고 있었으며(행 1:8), 따라서 그들에게 먼저 필수적인 장비를 갖추어 주어야만 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그는 그들에게 머지않아 성령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는데(49a절),13 이 성령의 보내심은 또한 그의 아버지께서 이미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것이었다.14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옷 입는(endyssthe, clothe) 것이었다(49b절; 비교. 행 1:4, 8). 그들을 세상 앞에서 예수의 유력한 증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이 예수의 목격자와 동반자로서 쌓아 온 경력이 아니라 그들에게 와서 능력을 입혀 줄 성령이었다(12:11~12).

(5) 예수의 승천(50~53절)
누가는 예수의 승천을 보도하는 유일한 복음서 기자다. 그는 이 복음서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짧은 기사들로 끝내고 있다: 첫째, 예수가 제자들을 예루살렘 밖 베다니까지 데리고 나간 것과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한 것(50절), 둘째, 그들에게 축복하면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진/ anephereto eis ton ouranon, he was carried up into heaven]15 것(51절; 비교. 행 1:9~11), 셋째,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proskynsantes auton, worshipped him]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52절), 넷째, 그들이 줄곧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지낸 것(53절) 등이다. 아무런 설명 없이 극히 간결하게 연결된 위의 기사들은 이 복음서의 후편인 사도행전 1장 1~11절의 기사와 자연스럽게 포개지면서 하나가 된다. 본문의 승천 기사에 의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한 예수가 이 땅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보인 마지막 행위는 축복(eulogein, bless)이었고, 그에 대해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보인 응답은 [경배와] 찬양([proskynein, worship]/ eulogein, praise)이었다.

본문의 메시지와 적용

(1) 부활에 대한 불신과 회의
누가복음 24장 본문은 예수의 신체적 부활(bodily resurrection)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다.
첫째로, 사도들을 포함한 모든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불신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거듭되는 확실한 증거들이 필요했다. 본문은 1세기의 제자들이 21세기 현대인들과는 달리 복음서의 기적들에 대해 활짝 열린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을 무력하게 만든다.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처음 반응은 현대인의 반응과 마찬가지로 매우 회의적(skeptical)이었으며 그들은 계속되는 증언과 증거들 앞에서도 결코 쉽사리 설복당하지 않았다.
사도들은 맨 처음 예수의 빈 무덤(3절)과 천사의 메시지(7절)에 관한 여인들의 증언(8~10절)을 들었을 때 그들의 말이 터무니없게(비합리적으로) 들려서 믿지 않았다(11절). 그 다음에 그들은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는 베드로의 증언을 들었다(34절). 그리고 엠마오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돌아온 두 제자의 증언을 들었다(35절).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 앞에 직접 나타난 예수를 유령으로 여기고 무서워하면서 마음으로 의심했다(37~38절). 더구나 상처 자국이 남아있는 예수의 손과 발을 보고 나서도(39~40절) 그들은 너무 기뻐서 아직 믿지 못했다(41절). 결국 그들을 더 납득시키기 위해 예수는 그들 앞에서 굳이 생선 한 토막을 ‘먹어 보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42~43절). 사실상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정말로 부활하였고 몸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셨다.
제자들이 처음에 보인 불신과 회의는 그들이 당초에 예수의 부활을 기대하거나 소망한 적이 없었음을 가리켜준다. 예수에 대한 그들의 기대와 희망은, 엠마오의 두 제자가 대변하듯 십자가와 함께 모두 사라졌으며, 따라서 그의 부활은 꿈에도 상상치 못한, 현실이라고 믿기에 두렵고 어려운 사건이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는 오히려 여인들이 다른 어떤 제자들의 그룹보다 더 민감하고 신속하게 반응했다. 본문이 부활 사건의 첫 번째 증인들로서 여성들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은 여기 기록된 부활 기사의 역사적 신빙성이 매우 높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만일 1세기의 교회가 이 기사를 조작했다면, 구태여 당시 사회에서 경시 당하는 여인들을 그 사건의 주요 증인들로 등장시키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기독교 복음과 신앙의 핵심을 이루는 내용이지만(롬 4:24; 고전 15:1~19), 그리스도의 교회는 처음부터 그 역사적 사실에 대한 증언과 메시지를 신속하게 믿지 못했다. 제자들이 그들에게 누차 예고되고 가르쳐졌던 예수의 부활을 믿기 어려웠다면,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주님의 재림과 그에 따른 신자의 육체적 부활은 여전히 믿기 어려운 교리임에 틀림없다. 바로 그 때문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셔야 했고(행 2:1~13, 32~33) 지금도 성령은 부활의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셔서 일하셔야만 한다(고전 2:10~16).
둘째로, 부활의 복음은 그것을 전하는 사람에게 항상 특별한 인내를 요구한다. 오늘날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유일한 구원의 길로 선포하려는 전도자는 부활의 메시지를 처음 전했던 인물들의 심정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수가 그의 사역의 중요한 시점들에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소망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들이 보였던 무관심과 몰이해를 생각해 보라. 부활의 첫 증인이었던 여인들이 직접 보고 들은 바를 전했을 때 그들이 곧바로 받아야 했던 냉소와 경시의 눈빛을 상상해 보라. 자신들에게 나타난 주님을 각각 전하고 난 시몬과 글로바 등이 다음 순간 홀연히 나타난 그분을 모든 동료가 유령처럼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것을 보았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짐작해 보라. 그러므로 우리도 부활의 메시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때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인내를 연습해야만 한다. 그들이 처음에 그 메시지를 듣고 비웃고 돌아선다고 해도 너무 놀라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다. 제자들은 많은 증언과 증거를 접한 후에야 비로소 불신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었다. 오늘날 사람들도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성령의 내적 증거와 아울러 그렇게 많은 부활의 증인들이 필요할 것이다.

(2)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의 말씀
누가복음 24장은 하나님이 언제나 그의 계획에 따라 행하시며 그 계획은 우리에게 미리 약속의 말씀을 통해 주어진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이란 주제는 맨 처음 1~2장에서 강조했던 주제인데 또다시 마지막 장에 도입됨으로써 이 복음서 전체를 괄호로 묶고 있다. 24장에서만 3번 등장하는 동사 dei(must)는 오래 전에 확정되고 구약성경에 예고되었던 하나님의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대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매번 강조한다(7, 26, 44절). 그 계획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체포’와 ‘십자가’ 처형과 ‘부활’의 사건을 핵심으로 하며(7, 26, 46절), 그의 이름으로 ‘회개’하고 ‘죄 사함’을 얻는 복음이 예루살렘부터 땅 끝까지 전파될 것을 포함한다(47절).
빈 무덤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여인들은 천사들로부터 그[예수]가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기억하라!(6b절)는 책망 섞인 권고를 받았다. 좌절과 낙망 속에서 귀향 길을 가던 엠마오 두 제자는 부활한 주님으로부터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아!(25절)라는 꾸중을 들었다. 거듭된 증언과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활의 사실을 믿기 꺼려하던 모든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과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는 질책을 받았다(44절). 한마디로, 본문에서 제자들은 하나님/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에 새겨두지 않고 그냥 가볍게 넘겨 버렸기 때문에 책망을 들었다. 우리 자신도 그런 경솔한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성경 안에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고 따라서 받아들이기 힘든 약속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나에게 익숙한 사고의 범주를 따라 그 말씀들을 듣기보다 그 약속을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과 능력을 믿는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롬 4:17b~22).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 이루신다는 생각은 우리의 믿음과 소망의 기초가 된다. 오늘날 우리가 믿고 기다려야 할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약속들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동반할 신자의 일반적 ‘부활’이다. 신약성경이 수없이 예고하고 있는 이 약속도16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속에서 앞으로 우리에게 어김없이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그가 지으신 새 하늘과 새 땅에 그들을 거하게 하실 것이다(계 21~22장). 만일 그러한 세계가 지금도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보이지 않게 다가오고 있다면, 그 세계를 준비하는 일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우선적인 과제가 돼야 한다. 우리가 그 세계에서 누리게 될 삶은 지금 이 세상에서 누리는 삶과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길고도 복되기 때문에 그 미래에 관한 일들은 오늘의 어떤 관심사보다도 훨씬 중요하다.

(3) 성경의 중심 주제와 깨달음
누가복음 24장은 또한 우리가 성경을 올바로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기억해야 할 원리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부활한 예수가 본문에서 세 번씩이나 강조한 바에 따르면, 구약성경은 전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책이다. 먼저 27절에서, 예수는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자기에 관하여 쓴 일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다음으로 44절에서는, 그가 이미 공생애 초기부터 제자들에게 구약성경의 모든 책들 가운데 자신에 관하여 성취될 예언들이 골고루 들어 있음을 가르쳤다고 말한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들과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어서 46~47절에서는, 예수가 자신에 관하여 구약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들의 핵심을 ‘십자가의 죽음’(그리스도가 고난을 겪고)과 ‘부활’(사흘 만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과 ‘그를 믿어 얻게 되는 죄 사함’(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과 그 믿음의 ‘전 세계적 전파’(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로써 요약한다.
누가복음 24장 본문은 구약성경의 ‘기독론적 이해’, 즉 구약성경을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과 성취의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읽고 파악하려는 해석방법론이 후대 교회에서 시작되어 발전한 것이 아니라 원래 예수 자신에게서 시작되어 그의 제자들에게 전승되었음을 가르친다. 신약성경과 아울러 구약성경의 모든 책들이 다루고 있는 중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모든 책들이 기록된 목적은 결국 한 가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영생과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다(요 5:39; 20:31; 딤후 3:15; 롬 1:2~4; 3:21~22; 16:25~26).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마다 언제나 이 중심 주제와 목적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성경 가운데 어떤 본문을 읽고 연구하든지 우리의 근본 동기는 항상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음’으로 ‘죄 사함’과 ‘구원’을 (더욱 온전히) 얻으려는 것이 돼야 한다.
성경의 참된 이해는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의 지능과 열심과 노력에 달려 있지 않다. 우리는 그 사실을 신약시대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들과 같은 처지에 있었다. 성경 안에서 예수를 자신의 구원자로 만나지 못하는 사람에게 성경은 닫혀 있는 책이다. 오늘날에도 진정한 의미의 (회개, 죄 사함, 믿음, 거듭남을 포함하는) 회심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이 성경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열심히 읽고 토론하고 가르치고 그것에 관하여 글을 쓸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본문은 사람들에게 닫혀있던 성경이 어떻게 열리게 되는지 두 가지 과정을 말해 준다. 첫째, 32절에서 엠마오의 두 제자는 길 위에서 만난 주님이 그들에게 성경을 열어 주었고 그때 그들의 마음이 속에서 뜨겁게 타올랐다고 회상한다. 예수가 그들에게 성경을 열어 준 방법은, 27절이 말하듯이, 성경 전체에 걸쳐 기록된 자기에 관한 사항들을 자세히 설명해 준 것이었다. 성경은 그 책의 전체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빛 아래서 비로소 열려지기 시작한다. 둘째, 45절에서 예수는 성경을 깨닫게 하려고 그들[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주었다. 여기서 그가 연 것은 성경이 아니라 제자들의 ‘마음’이었다. 그 목적은 그들이 성경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서도 주님은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있던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믿음으로 반응하게 하셨다. 본문 45절을 앞 뒤 문맥(44절과 46~47절)과 연결해 보면, 이 두 과정이 분리되지 않고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이 오늘도 열린 책이 되기 위해서는 위의 두 가지 과정이 모두 일어나야 한다. 먼저, 성경의 각 책과 본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유기적인 관련 속에서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통합되고 열려지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누구나 성경 안에서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만난 후에야 그 책 각 부분의 내용들을 새롭고 온전히 깨달아가게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을 그렇게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설명해줌으로써 그 책을 열어준다. 다음으로, 어떤 사람이 성경 안에서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만나기 위해서는, 그래서 그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성령이 그 사람의 ‘마음’을 열어 주셔야만 한다. 성경이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줄 수 있는 까닭은 오로지 성령의 영감 때문이다(딤후 3:15~17; 벧후 1:20~21). 성경을 포함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모든 것을 분별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은 반드시 성령의 조명과 깨우침을 받아야 한다(고전 2:9~16).

(4) 예수의 승천의 의미
부활 이후 40일 동안 여러 장소의 제자들에게 나타났던(행 1:3) 예수는 그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갔다. 이 공개적 승천의 의미는 대략 다섯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예수의 지상사역은 끝났다. 부활의 몸을 입은 예수는 분명히 지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갔다. 따라서 그의 제자들은 더 이상 그의 육체적 출현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둘째, 예수의 천상사역이 시작될 것이다. 그의 승천은 지상과의 작별인 동시에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권능의 주로서 활동하는 시발점이기도 하다(눅 22:69). 셋째, 성령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교회는 예수가 떠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성령)를 기다렸고(행 1:4), 승천한 예수는 중보자로서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었다(행 2:30~36). 넷째, 예수는 승천했던 방식으로 이 땅에 다시 올 것이다. 그의 재림도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가시적으로 일어날 것이다(행 1:9~11; 비교. 눅 21:27). 다섯째, 제자들은 예수의 재림 때까지 이 땅에서 위임 받은 사명을 성취해야 한다. 너희가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행 1:11a)라는 천사의 말은 제자들의 관심사가 땅에 있어야 할 것을, 즉 그리스도의 증인들로서 땅 끝의 모든 족속들에게 나아가야 할 것을 상기시킨다.

주(註)

1. 공관복음(마 28:1~10; 막 16:1~8; 눅 24:1~12)과 요한복음(요 20:1~18)의 부활 기사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점들이 나타난다. 이 차이점들의 설명에 관해서는 J. Wenham, The Easter Enigma: The Resurrection Accounts in Conflict?(Grand Rapids: Zondervan, 1984); G. Osborne, The Resurrection Narratives: A Redactional Study(Grand Rapids: Baker, 1984), 149 n. 2를 참조하라. 최근에 D. L. Bock, Luke 9:51~24:53, ECNT 3B(Grand Rapids: Baker, 1996=2000), 1885~1888은 이전의 여러 시도들을 비평적으로 검토한 후 보다 그럴듯한 설명을 제안하였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요한은 먼저 자신이 경험한 부활 사건을 자신의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나서(요 20:1~10) 마리아의 이야기(11~18절)로 되돌아간다.
2. 눅 2:49; 4:43; 9:22; 11:42; 12:12; 13:14, 16, 33; 15:32; 17:25; 18:1; 19:5; 21:9; 22:7, 37; 24:7, 26, 44.
3. Osborne, The Resurrection Narratives, 114; D. L. Bock, Luke,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Zondervan, 1996), 607~608.
4. 엠마오(Emmaus)의 위치는 아직도 불확실하며 예루살렘과의 거리도 사본들 간에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사본들은 양자 사이의 거리를 60 스타디아(stadia)[약 11 km]로 기록하고 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Bock, Luke 9:51~24:53, 1907~1908을 보라.
5. 눅 22:23; 행 6:9; 9:29에서 사용된 이 동사의 용법을 참조하라.
6. 누가는 특히 ‘선지자’로서의 예수를 자주 언급하고 있다(눅 4:16~30; 7:16, 22~23, 39; 9:9, 18; 13:31~35; 행 3:14~26; 10:38~39).
7. 롬 1:14; 갈 3:1, 3; 딤전 6:9; 딛 3:3을 비교하라.
8. 32b절: s dinoigen hmin tas graphas(그가 우리에게 성경을 열어 주었을 때에; 비교. 개역: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9. Bock, Luke, 620.
10. 고전 15:35 이하의 ‘부활의 몸’에 관해서는 필자의 졸고 ‘죽은 자들이 어떤 몸으로 오는가?’ 고전 15:35~58의 ‘부활의 몸’에 관한 주석적 연구,『성경과 신학』26(1999), 63~132를 참조하라.
11. 눅 9:22, 44; 17:25; 18:31~33; 22:37을 참조하라.
12. 이에 관해서는 R. T. France, Jesus and the Old Testament: His Application of the Old Testament Passages to Himself and His Mission(Vancouver: Regent College Publishing, 1992), 특히 83~163, 259~263을 참조하라.
13. 요 7:39; 14:16~17, 26; 15:26; 16:7~15를 비교하라.
14. 사 32:15; 44:3; 겔 36:26~27; 39:29; 욜 2:28~32를 참조하라.
15. 어떤 사본들(A*, D, 그리고 옛 라틴 사본들)에는 51b절의 kai anephereto eis ton ouranon(그리고 그가 하늘로 올려졌다)란 어구가 빠져 있다. 만일 이 부분이 원문에 포함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기서 예수의 ‘승천’(ascension)을 말할 수 없고, 단지 그가(31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을 ‘떠나’ 갑자기 사라진 것만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어구가 원문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은 아주 높다. 위의 어구와 동일한 사본상의 증거를 보이는 52a절의 proskynsantes auton(그들이 그에게 경배하였다)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Bock, Luke 9:51~24:53, 1949~1950을 참조하라).
16. 마 22:23~33 par.; 요 5:25~29; 6:39~40, 44, 54; 11:24~25; 고전 15:50~54; 고후 5:1~10; 빌 3:20~21; 살전 4:13~17; 계 20:4~6; 20:13.
장해경 ● 아세아연합신학대학 교수 | 20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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