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어머니는 비구니처럼 머리를 깎으셨다. 애써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셨지만 민머리의 파르스름한 빛은 미세한 경련처럼 낯빛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나 역시 숨이 턱 막히는 걸 애써 감추기 위해 태연한 척 씩 웃어 보였다.
장기까지 퍼진 난소암을 제거하기 위해 복막과 맹장과 임파선까지 들어내는 대수술을 받은 어머니는 그때 한참 항암 치료 중이었다. 투병하며 늘어난 얼굴 주름보다 풍선처럼 매끈했던 그 민머리가 나는 더 가슴 아팠다.
우리 시대 어머니들 대부분이 그랬듯 우리 어머니 역시 동네 미장원에서 대충 만 것 같은 짧은 파마머리를 평생 고수하셨다. 어릴 적에는 어머니의 그런 머리가 무슨 부직포처럼 거칠게만 느껴져 불만이었다. 사춘기를 지날 무렵 사람 잘 믿던 아버지가 사기를 당해 대책 없이 주저앉자 어머니는 곧바로 그 짧은 파마머리에 몸뻬 바지를 군복처럼 갖춰 입고 부산 감전동 새벽시장에서 식탁 서너 개 두고 밥집을 시작했다. 내 기억 속에 빛바랜 사진처럼 찍혀 있는 그 시절 어머니의 식당 풍경 중 하나는 비좁은 부엌방 구석에 블록처럼 잔뜩 쌓여있던 박카스 박스들이었다.
새벽시장은 말 그대로 새벽에 붐비는 곳이라 시장 안에 자리 잡은 밥집들은 대부분 밤부터 새벽까지 영업한 뒤 낮에는 문을 닫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작은 밥집은 새벽뿐 아니라 낮에도 열려 있었다. 새벽 장사를 끝내고서도 어머니는 짬짬이 들어오는 낮 손님을 받기 위해 부직포처럼, 수세미처럼 뻗친 그 거친 머리를 흔들어 잠을 쫓으며 불 앞에 섰다. 손님이 없는 시간 간간히 눈을 붙이는 쪽잠은 얕은 노루잠에 불과해서 체력을 되돌리기에 턱없이 부족했고 그 모자란 힘을 초인적인 정신력과 무수한 박카스 병으로 채워 넣으신 것이다.
어느 날 어머니 앞에 결연히 앉아 신학교에 가겠다고 선언했을 때, 어머니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한참을 멍하니 계시다가 또 한참을 펑펑 우셨다. 아들이 번듯하게 취직이라도 할 날만 바라며 고생을 견뎠을 텐데 소박한 그 희망마저 꺼져버렸기 때문일 게다. 누군가에게 따지기라도 해야 할 텐데 탓을 해야 할 대상이 하나님이라서, 원망조차 허락되지 않는 분이라서, 그분으로부터 아들을 되빼앗아올 수가 차마 없어서, 그래서 어머니는 그렇게 우셨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같이 울었다. 미안해서, 참 많이 미안해서 나도 마냥 울었다.
하지만 어머니 눈물은 딱 거기까지였다. 이후로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목회자의 길을 걷는 아들에게 원망하는 눈빛을 보내지 않았다. 어머니는 언제나 아들이 가는 길을 믿어주었고 아들이 하는 목회를 위해 기도하셨다. 주일 대표기도 순서만 되면 심장이 쪼그라들어 교회에 나타나지 않던 어머니였지만 이후로는 누구보다 헌신적인 교회의 일꾼이 되셨다.
그리고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수술을 받을 즈음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내 아들이 목사라서 좋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일을 하는 사람을 낳고 키워서 나는 참 좋다.”
수술 방에 들어가기 직전 어머니는 침대에 누운 채 떨며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날 어머니는 아들 손을 잡은 것일까, 목사 손을 잡은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 손을 잡고자 했던 것일까? 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날 아들이자 목사인 아들 손 위로 하나님의 손이 어머니 손을 꼭 겹쳐 잡고 계셨으리라 믿을 뿐이다.
지난한 항암 치료를 다 끝내고도 시간이 한참이나 흘렀다. 지난 추석, 몇 달 만에 내려온 아들 가족을 맞이하는 어머니 머리에는 기가 막히게 눈부신 은발이 수북하게 다시 자라 있었다. 동네 미장원에서 볶아대지 않은 어머니의 머리칼은 그렇게 가늘고 부드러울 수가 없었다. 머리털이 밀렸다가 다시 자란 삼손처럼 어머니 은발은 내 눈에 은총과 회복의 신호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라는 존재가 가진 힘은 삼손이 그랬듯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초자연적인 힘, 사랑과 신성의 어느 끝자락쯤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철부지 어린 손주들은 버릇없게도 할머니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깔깔대었다. 인형 털 같다고, 강아지 털 같다고. 하지만 아이들은 모를 것이다. 어머니의 머리털이 얼마나 검고 억세고 강인했는지, 얼마나 용맹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은혜로웠는지.
어릴 때는 나도 몰랐다. 그러나 내 나이 마흔하고도 중반에 이르고 보니 이제 비로소 알겠다. 부직포 같던, 수세미 같던 어머니의 그 머리는 가족을 위해 질끈 동여맨 전투화 끈과 같은 것이었음을. 파르스름한 그 민머리 앞에 섰던 그날에야 나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 은하수같이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이 아들이 연인처럼 쓸어 올려드려도 흉이 되지 않을 것이다. 목사 아들의 기도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순박한 뺨을 슬며시 어루만져 드린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어머니, 내 어머니여! 더 이상 검지 않고 뻣뻣하지 않은 그 머리카락이여! 시계 바늘이 일으키는 바람에도 부드럽게 흔들리는 극세사(極細絲)의 면류관이여! 주님 사랑에 가장 근접한 희생의 본을 보여주신 신성한 옷자락, 그 끝이여! 이제 행복하소서. 험악한 세월의 강 끝에서 이제는 환히 웃으소서. 날은 아직 남았고 주님의 은총은 닳음이 없으니 이제 은빛으로 계속, 그리고 또 계속 빛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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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렬은 동화작가이자 인천 논현감리교회 교육목사다. 장편동화 「너나들이 마을」로 제4회 우리교육 어린이책 작가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저서로 「애루수 시대」, 「고따개비 마을의 비밀」이 있다.